소설리스트

파공검제-101화 (101/508)

101. 이변의 이변

촤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유현이 피를 뿌리며 물러났다. 살짝 스친 것 같은데 생각보다 상처가 깊은지 옆구리에서 선혈이 흐른다.

파바밧!

유현이 멈칫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백무극이 빠른 속도로 파고들었다.

슈캉!

한 줄기 빛이 터지면서 유현의 검이 튕겨 나간다.

백무극의 도는 확실히 정공법이다. 묵직하고 빠르다. 군더더기도 없다.

유현의 검이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면, 백무극의 도는 매순간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움직임이 직선에 가깝다.

마치 군대에서 사용하는 도식 같다. 지나치게 절도가 있고, 깔끔한 정공법이다 보니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워낙 빠르고 강하니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게다가…….

‘도대체 어찌 된 사람인지……!’

슈카가강!

순간 눈앞에서 불꽃이 터졌다.

바로 지금이다.

유현은 미간을 잔뜩 좁히고는 빠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파바바밧!

타다다닷!

백무극이 빈틈을 주지 않은 채 빠르게 쫓아온다.

유현의 검에서 매화향이 퍼져 나간다. 거기에 불그스름한 기운이 노을처럼 번진다. 예기를 품은 검신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검초가 파생된다는 게 경이로울 지경이다.

하나 그 검로가 백무극의 칼날에 하나하나 막힐 때마다 어김없이 어둠이 내려앉는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순간에는 백무극의 칼이 뱀처럼 휘어지면서 흩날리는 매화 꽃잎을 멀찍이 날려 보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정공법에 직선만을 고집할 것 같은 칼이 거짓말처럼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춘다.

아주 찰나의 변화일 뿐이지만, 이전에 사용한 도식이 워낙 정공법이다 보니 엄청난 변화처럼 느껴진다.

동시에 백무극의 표정에 묘한 희열이 차오르는 건 기분 탓일까?

‘눈빛이 또 달라졌다.’

따다다다당!

도검이 부딪치면서 연신 불꽃이 터지는 와중에도 유현은 백무극의 표정이 어딘지 달라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눈빛에 모종의 광기가 스며들었다.

‘도대체 백무극……!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맹한 표정에 우직할 정도로 정공법만 사용한다 싶었는데, 갈대처럼 휘청거리는 변초와 허초에도 능하다.

게다가 변초와 허초를 쓰는 이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이 된다.

비유나 은유가 아니라 정말 다른 사람이 된다.

“킥킥킥.”

나직한 웃음소리.

‘또……!’

유현의 표정이 굳는다.

처음 저 웃음소리를 들었을 땐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데 아니다.

분명 백무극은 웃고 있었다. 오히려 이 비무를 즐기는 것처럼.

까아앙!

순간 금속성이 터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살짝 거리가 벌어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유현은 다시 볼 수 있었다. 백무극이 자신을 보며 혀를 빼물고 히죽 웃는 모습을.

절묘하게도 팔과 도로 얼굴을 가렸기에 그 표정은 오로지 유현만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그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파바바밧!

백무극이 현란한 보법을 밟으며 달려든다.

이번엔 대놓고 변초와 허초가 난무하는 도식이 펼쳐진다.

쉭쉭쉭쉭……!

눈앞에서 수십 개의 칼날이 쏟아지는 순간, 유현도 이를 악물고 매화검법을 펼쳤다.

따다다당……!

그렇잖아도 화려한 도검에 불꽃이 마구 튀어오르니 지켜보는 관전자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주먹을 쥐었다.

“대, 대단하다! 과연 화산파야.”

“세상에 비무가 이렇게 화려할 수도 있다니.”

“이건 또 다른 세상을 보는 기분이군.”

“그나저나 저 백무극도 대단하군. 화산의 유현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싸우다니. 누가 이길지 가늠이 안 되는걸?”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주연화도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사형……!’

그녀는 백무극이 이만큼이나 사형을 몰아붙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팽수혁을 비롯한 다른 관전자들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다.

유현이 누군가?

화산파에서 가장 기대하는 후기지수가 아닌가?

수십 년 만에 화산을 이끌 재목이 나타났다며 칭찬을 자자하게 늘어놓던 그 유현이다.

한데 백무극이 그런 유현을 상대로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앞서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마침내 금속성이 요란하게 울린 후, 두 사람이 서로를 지나쳤다.

찰나지간 유현은 다시 한번 백무극의 광기에 찬 표정을 확인했다.

“킥킥. 화산도 별것 없네.”

“……!”

촤아아악!

순간 뜨끈한 감각이 갈비뼈 쪽을 스치며 지나갔다.

“큽!”

파바밧!

유현이 얼른 보법을 밟으며 튕기듯 물러났다.

탁탁탁!

재빨리 점혈을 해서 지혈하자 장삼을 축축하게 적시던 피가 가까스로 멈췄다.

“사형!”

관전자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주연화다.

하나 유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소?”

묵직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순간 백무극이 움찔거리더니 예의 그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유현은 기가 찼다.

조금 전 자신을 스치며 비웃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이 한순간 저렇게 달라질 수 있나?

단지 표정만이 아니다.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전혀 다른 성질처럼 느껴진다.

“나를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있으나, 화산을 무시하는 건 참을 수 없소.”

“……?”

“어느 쪽이 진짜 모습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짜 화산의 모습이 무엇인지는 가르쳐 드리겠소.”

유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한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연화가 두 손을 모아 쥐고는 힘을 주었다.

‘사형이…… 화를 내고 있어.’

처음이다.

늘 너그럽고 무딘 성격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벼른 칼날처럼 날카롭다.

옆에서 지켜보던 팽수혁도 유현이 어딘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오, 유현 도장에게 저런 면도 있었군.”

“사람은 겉만 보고 알 수 없지.”

문득 들린 목소리에 팽수혁이 움찔 거리고 돌아보았다.

어느새 남궁천이 다가와 서 있었다.

“너, 너……! 언제 온 거냐?”

“아까부터 있었는데.”

“…….”

“할 말 있으면 노려보지만 말고 해.”

팽수혁이 발끈하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는 툭 던지듯 말했다.

“반갑다, 이 새끼야.”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너도 만만치 않아, 새끼야.”

‘난 너보다 나이가 많아서 괜찮아, 새끼야.’

물론 마지막 생각은 굳이 내뱉지 않았다.

대신 남궁천은 유현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내심 감탄했다.

‘제법이네. 백무극의 눈을 보지 않는군.’

아마 상대의 눈을 보는 순간 의도대로 검식이 펼쳐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리라.

그게 환술이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것 같지만.

‘게다가 저 기운은 분명…….’

본 적이 있다.

과거 화산파 이대 제자와 싸울 때였지, 아마.

건곤매화공(乾坤梅花功).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당시 이름을 꽤 떨치던 화산파 제자가 꽤나 남궁천을 괴롭힌 적이 있었다.

결국 날 잡고 반 죽도록 패주다가 녀석의 동료들이 몰려오는 바람에 달아난 적이 있었는데…….

‘뭐, 잘 살고 있겠지.’

아무튼 그때 녀석이 어설프게나마 펼친 내공심법이다.

화산파에서 자하신공을 익히기 직전에 배우는 심법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상승심법이고 익히는 것도 수월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그때 그 녀석보다 오히려 낫네?’

구오오오오……!

확실히 건곤매화공을 운기하는 유현은 이전과 다른 중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귀빈석에서 지켜보던 맹주도 눈을 가늘게 떴다.

‘생각보다도…… 한 수가 있었군.’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맹주가 백무극을 가만히 보았다. 유현은 확실히 생각보다 강하다. 하나 맹주의 기준에서 백무극이 유현을 넘지 못하면 실패작이나 마찬가지다.

‘너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맹주가 속으로 읊조리는 사이, 유현의 전신에서는 붉은빛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스스스슷.

유현의 검이 마치 분신술이라도 쓴 것처럼 여러 개로 나뉘면서 기수식을 취했다.

여러 개의 검이 하나로 합일되는 순간,

파아아앙!

유현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튀어나갔다.

쉬쉬쉬쉬쉭……!

붉은빛의 기운이 검신을 감싸면서 현란하게 움직인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화려하다.

슈카카캉!

불꽃이 터지면서 기운이 더욱 짙게 물든다.

파바바밧!

백무극이 뒤로 물러나면서 입매를 비튼다.

“햐! 끝내주는군!”

평소 백무극답지 않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하나 유현은 동요하지 않았다.

환검(幻劍)이 난무하다가 변검(變劍)이 짓쳐들어오고, 허검(虛劍)이 시선을 잡아끈다.

“저, 저건……!”

팽수혁이 놀라서 더듬거리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이군.”

“저게…… 가능해?”

“가능하니까 펼치고 있겠지.”

비록 완전하진 않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십사수매화검의 검의를 관통하지 못하니 그저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 이십사수매화검은 화산파에서도 궁극의 검법으로 손꼽는 절학이다.

물론 지금은 그 이상의 상승무공도 존재하지만, 이십사수매화검 역시 아무나 쉬이 익힐 수 있는 검법이 아니다.

자칫 잘못 익히면 오히려 자세가 망가져서 제 살 깎아먹는 역효과 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제법 그럴듯하잖아. 어쩌면……?’

그랬다.

남궁천이 은근히 기대를 할 만큼 유현의 무공은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다.

모든 관전자들이 탄성을 터뜨릴 정도.

맹주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욱 굳었다.

이 상황을 그저 담담히 지켜보는 자는 귀빈석의 화산파 장로뿐이었다.

그는 허연 수염을 쓸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유현이다. 이 비무는 이제 끝이 났구나.’

유현이 비무에서 이런 상승 무공을 꺼내 들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납득했다.

백무극이 생각보다 강했으니까.

하나 이십사수매화검이 나온 이상 백무극은 유현을 당해낼 수 없으리라.

일초식이 막히면 이초식으로, 이초식이 막히면 삼초식으로. 그렇게 이십사초식까지 끊임없이 연환식으로 펼칠 수 있는 게 바로 이십사수매화검이다.

게다가 무수한 변초와 허초가 있으니 검로만 따지면 수백 가지가 넘는다.

그걸 완전하진 않더라도 상당히 비슷하게 구사하는 유현이었다.

절대 질 수가 없는 싸움.

‘이것이 바로 화산이다. 무명방파의 후기지수가 하루아침에 뒤집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그의 짐작대로 백무극은 상당히 고전하고 있었다.

‘치잇!’

카캉! 캉!

피츗! 츄아앗!

쏟아지는 검을 막아내던 백무극이 혀를 차며 미간을 팍 구겼다.

어찌나 정신없이 검격이 쏟아지는지 마치 검림(劍林)에 갇힌 기분이다.

막고, 피하고, 돌아서도 계속해서 검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헛!”

순간 은빛 줄기가 허공을 가르며 목을 향해 짓쳐들었다.

백무극이 얼른 칼을 돌려세우자, 매섭게 짓쳐들던 칼날이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옆구리에서 뜨끈한 감각이 확 퍼져 나간다.

촤아아악!

“끄으읍!”

찰나 백무극의 눈이 뒤집혔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차갑고도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씨발.”

“……!”

갑자기 또다시 달라진 분위기에 유현이 미간을 좁혔다.

그뿐만 아니라, 관전석에서 지켜보던 남궁천도 흠칫거리고는 중얼거렸다.

“저 새끼……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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