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중검 대 중검
맹주와 종남파 장로만큼이나 운경은 놀랐다. 아니, 그 이상으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낙수파암 초식을 펼칠 때만 해도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낙수파암 초식 특성상 두어 번은 막아낼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나 계속 막아낼 수는 없다.
초식 하나가 마치 연환식처럼 펼쳐지는 특성을 가진 게 바로 낙수파암이다.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그 말 그대로 같은 지점을 계속해서 공략함으로써 아무리 단단한 상대도 뚫어내는 게 바로 낙수파암 초식이다.
처음 검초가 날아들 때는 십중팔구 병기로 막아내게 되어 있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두려워할 바위는 없기에.
가볍게 막아내리란 생각에 백이면 백 병기를 들어 올려 막는다.
남궁천도 그랬다.
그렇게 첫 공격을 막아냈지만,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나면 그게 어디 낙수파암 초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두 번, 세 번, 네 번……!
예상대로 남궁천은 한 걸음씩 밀려나고 있었다.
이제 한 번만 더 때린다면 뚫지는 못하더라도 밀어내어 장외 실격이 가능한 찰나였다.
하나 이 순간 운경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남궁천이 장외실격을 당하고도 남았어야 한다는 점.
그게 아니면 상대의 팔이 으깨졌어야 한다는 점.
한데도 남궁천은 수어 번을 막아냈다. 이상할 정도로 담백하게 막아냈다.
마치 모래더미에 검을 푹푹 찔러대는 느낌이랄까?
이는 남궁천이 금계의 기운과 상극을 이루는 화계(火系)의 기운을 운용했기 때문이다.
하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운경으로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일 수밖에.
‘도대체 어찌……!’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이 상황을 자세히 지켜보지 못한 맹주와 장로는 오죽하겠나?
귀빈석에서 지켜보던 맹주는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고, 종남파 장로는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부르르 떨었다.
‘무극검을…… 무극검을 맨손으로 낚아채?’
아직 대성하지 못한 상태라고는 하나 운경의 무극검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니, 애초에 저 어린 나이에 펼칠 수 있는 검법이 아니었다.
한데 그걸 막는 것도 모자라 손으로 손목을 낚아채다니?
바닥이 깨지고 파편이 튀어오르고 먼지 안개가 퍼지면서 잠깐 실수를 했을 테지.
그래,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이 일을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필시 운이리라!’
종남파에서 온 장로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맹주는 조금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원래 한 번 모난 돌로 보이기 시작하면 좀처럼 좋게 볼 수 없는 게 사람 마음 아니던가?
틀림없이 죽었을 거라고 확신했던 목란산 동굴에서도 생환했고, 이번엔 막기 어려울 거라 여겼던 종남파의 검법까지 막았다.
이리 되자 맹주의 불안감은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네놈의 끝이 어디냐? 보여라!’
한편 남궁천은 서서히 단전에서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의 독문심법인 창궁대연신공이 꿈틀거리며 혈맥을 따라 흐르기 시작한다.
동시에 남궁천은 관전석 쪽을 힐끔 보았다.
남궁검이 여전히 무감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영감, 지켜보쇼. 내가 소가주가 될 만한 재목인지! 차근차근 인식시켜 줄 테니!’
팍!
순간 남궁천이 뿌리치듯 손을 놓자, 운경이 뒤로 튕기듯 멀어졌다.
운경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무슨 짓이지?’
그도 그럴 것이 기껏 금나술로 손목을 잡았다면 뼈를 부러뜨리든 꺾어 버리든 제압을 해야 할 일이 아닌가?
그도 아니면 방어하기 힘들게 검을 찔러 오거나.
한데 이렇게 멀찍이 던져두면 오히려 방어할 시간을 벌어주는 셈이 아닌가?
설마……?
불현듯 스친 생각에 운경이 미간을 팍 구겼다.
서서히 기수식을 취하는 남궁천을 보면서 운경은 자신의 짐작을 거의 확고하게 굳혔다.
‘같은 방식으로 상대해 주겠다는 건가!’
참으로 광오한 태도가 아닌가?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동등한 상황으로 되돌려놓고 검격을 펼치겠다니!
오냐, 그렇다면 어디 와봐라!
종남을 우습게 본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운경 역시 단전에서 공력을 끌어 올리면서 전신을 단단하게 다지기 시작했다.
방어에 효용이 뛰어난 태을신공을 운기하자 전신의 근육마저 꿈틀거리면서 반응한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남궁천에게 더욱 자세히 보였다.
‘태을신공이군.’
눈을 가늘게 뜬 남궁천에게 금계의 기운이 혈맥을 따라 퍼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운경은 내공을 수준급으로 익힌 게 분명해 보였다.
전생에 마주친 종남파 고수들 중에서도 이 정도로 내공 운용을 편하게 하는 이는 드물었으니까.
나이에 비하면 운경은 확실한 재목감이랄까?
‘크기도 전에 너무 밟아주는 게 좀 미안하지만…… 거친 환경에서 자라야 더 굳건해지겠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남궁천이 벽라검을 척 앞세우고는 남궁검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말했다.
“과연 종남의 검은 훌륭했소. 이제 본 가의 검을 받아주시길.”
“얼마든지.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것이 얼마나 과욕인지 깨닫게 해주겠소.”
중검과 쾌검을 모두 추구하는 남궁세가를 꼬집는 말이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아니면 애초에 잡지 못할 거라고 한 마리 포기한 것을 후회하게 되거나.”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종남은 중검으로 검의를 깨우치는 문파. 검 끝에는 항시 누군가의 목숨이 걸려 있소. 그것이 지키는 쪽이든, 해하는 쪽이든. 그렇기에 검은 무거워야 하는 법이오.”
“하면 본 가의 검은 얼마나 무거운지 판단해 주시길.”
“얼마든지.”
운경이 입매를 비틀었다.
남궁가의 중검이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
쾌와 중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과욕을 부리는 몰락 가문이 아닌가?
남궁가의 검이 힘으로는 결코 종남을 넘어설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지켜보는 맹주와 종남파 장로도 같았다.
특히 장로는 긴장을 풀며 내심 코웃음을 쳤다.
‘저 신룡이라는 아이가 아무래도 요행이 통하자 크게 방심한 모양이구나. 아무리 그래도 본 문을 상대로 중검이라니. 개파조사 이래 중검이라는 한 우물만 파온 종남이다. 한데 중검 대 중검으로 맞서겠다고? 한심한…… 쯧쯧.’
이러한 생각은 사실 남궁검도 다르지 않았다.
“무리수를 두는군.”
그가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자, 옆에 앉은 남궁화가 조심스레 물었다.
“역시…… 본 가의 검이 힘으로는 종남에게 어려울까요??”
“허튼소리.”
“예?”
“본 가를 어찌 생각하는 것이냐? 본 가는 제왕의 가문이다. 종남 따위에게 밀릴 리가.”
“하지만 조금 전에 아버지는 무리라고…….”
“저 아이를 보아라. 지금 펼치려는 게 무엇인지.”
“아……!”
그제야 남궁화는 나직이 탄성을 터뜨렸다.
남궁천의 기수식.
왼발을 반 보 정도 내밀었고, 오른발을 한 보 정도 뺐다. 그리고 검을 평행하게 눕혀서 마치 화살을 재우는 듯한 자세.
창궁검법이다.
남궁세가의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 되는 검법.
남궁세가의 아이가 작대기라도 든다 싶으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검법이기도 하다.
그만큼 탄탄한 기본기를 중시하는 검법이지만, 위력이 강한 편은 아니다.
적어도 종남파의 중검에 맞서겠다면 창궁무애검법 정도는 펼쳤어야 할 텐데…….
‘도대체 어쩌자고…….’
남궁화가 마음을 졸이는 사이, 남궁천은 화계의 속성으로 창궁대연신공을 운기했다.
창궁대연신공은 대체로 금계의 기운을 품지만, 화계의 기운에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오행의 성질을 변형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온갖 무공을 다 섭렵한 남궁천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
‘화의 극으로 금을 녹여 제련한다!’
심상을 떠올리자 남궁천의 전신 혈맥을 따라 흐르는 공력이 점점 뜨거우면서도 단단하게 다져지는 듯하다.
찰나,
타앗!
남궁천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와아아앗! 빠르다!”
“남궁천이 공격한다!”
“저거 정말 중검인가?”
사람들의 환호성과 함께 이런저런 말이 터져 나온다.
쉬이이잇!
화계의 기운으로 창궁대연신공을 운용하니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운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검면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이게 중검이라고? 지금 장난하나?’
너무 빠르지 않은가?
게다가 뻗어오는 속도로 보건대, 누가 봐도 쾌검에 가깝다.
“가소로운!”
운경이 검면을 틀면서 남궁천의 검봉을 막아냈다.
‘이딴 가볍디가벼운 검 따위는……!’
순간 폭음과 같은 소리가 울렸다.
쩌어어엉!
“……!”
운경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공력을 집중한 손가락이 부러질 것처럼 아프다.
검파를 쥔 손바닥은 찢어질 것만 같다.
한데 놀랄 겨를도 없다.
어느새 남궁천이 몸을 휘돌면서 검을 사선으로 그어왔다.
운경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얼른 검을 돌려세웠다.
이번엔 손가락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검면을 받쳤다.
까아아아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팔이 저릿하게 울려온다. 어깨가 탈골될 것처럼 아프다. 눈동자는 격하게 흔들린다.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이만한 무게를 이렇게 빨리 펼칠 수 있다고?
검초를 보면 너무 간단하다.
사실 피하려고 하면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모양새가 우습다.
한껏 종남의 중검이 중원 제일이라고 떠들어댔는데, 이제 와서 검격을 받아내지 않고 피한다면?
관전자들은 필시 운경이 겁을 먹은 것이라 판단할 터.
‘그럴 수는 없……!’
운경이 다시 눈을 부릅떴다.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남궁천이 허공으로 솟구치더니 무섭게 떨어져 내린다.
‘설마 나와 똑같은 방법으로……?’
펼치는 검법은 다르지만, 초식의 형태가 비슷하다.
마침내 남궁천이 혜성처럼 떨어지며 검을 내지르자 연속해서 금속성이 울린다.
땅! 따당! 땅!
콰직! 쿠궁!
“크읏!”
운경의 입에서 신음이 터지고 말았다.
하늘에서 천근추가 떨어져 내리는 것만 같다.
바닥이 깨지면서 파편이 튀어오르고 먼지가 휘날린다.
그 무게를 버티자니 무릎 관절도 나갈 것만 같다.
장문인이 직접 하사한 보검이 아니었다면 검도 지금쯤 박살이 났을 터다.
쩌엉!
촤아아아아악!
마침내 마지막 일격을 받은 운경이 한참이나 미끄러졌다.
‘떨어진다……!’
이를 악물고 무게 중심을 앞으로 옮기며 모든 공력을 발바닥으로 실었다.
콰가각!
마침내 밀려나던 운경이 멈췄다.
정말이지 간발의 차이.
발뒤꿈치가 비무대 밖으로 삐져나왔다.
탁!
겨우 한 걸음 내디딘 운경이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었다.
“헉, 헉, 헉……!”
드늛은 대연무장에 그의 숨소리만 울린다.
관전석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남궁천의 무지막지한 중검에 다들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남궁검과 남궁화도 마찬가지.
남궁화가 남궁천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읊조렸다.
“아, 아버지…… 저게 어떻게……?”
언제나 냉엄한 남궁검도 지금만큼은 눈자위를 가늘게 떨었다.
“대성…… 한 것인가?”
“네에?”
남궁화가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창궁검법이 아무리 기초 검법이라지만, 하나의 검법을 대성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웬만한 중소방파의 장문인들도 검법 하나를 대성하지 못한 채 팔 성 정도에 다다라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데…… 저 어린 남궁천이 창궁검법을 대성했다고?
남궁화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는 그 순간, 운경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공격을 멈췄어? 설마 지금 나를 간 보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운경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감히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