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누구 마음대로 실격이래?
언제나 얼음 조각 같던 모용신도 이번만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한참을 굳은 듯 서 있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너…… 괜찮은 것이냐?”
무수히 떠오른 질문 중에서도 이런 질문이 제일 먼저 나온 이유는, 남궁천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진소홍을 들쳐 메고 쉬지 않고 달려온 흔적이 역력했다.
게다가 전신에 꼬질꼬질하게 묻은 흙먼지로 보아서는 맹으로 돌아오는 여정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는 방증이리라.
남궁천이 진소홍을 옆에 내려두고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풀었다.
“어차피 사정 봐줄 것도 아닐 테니 그냥 합시다.”
“어떻게 그곳에서…….”
“운이 좋았죠. 무작정 통로를 따라 안쪽으로 달려가다 보니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진소홍은…….”
“아, 조금 지쳐서 그렇지 멀쩡합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여기까지 말이 이어지자, 사람들이 다시 한번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오오오! 남궁천이 진소홍을 구했다!”
“결국 적들만 섬멸하고 생도들이 모두 무사하구나!”
“역시 신룡이다!”
“그래도 너무 좋아하지 말게. 천랑단원들의 피해가 만만치 않다잖나?”
“아…… 그랬지?”
사람들의 술렁임에 모용신의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남궁천은 말 그대로 신룡이 되어서 부활했고, 무적이라 자랑하던 청랑단만 사상자가 생긴 꼴이 되었다.
게다가 인질은 남궁천이 구해왔으니 그야말로 신룡의 탄생을 도운 셈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비무를 멈출 명분도 없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된 이상 비무를 진행해서 이 말 같지도 않은 신화에 찬물을 부어야 한다.
더 이상 끓어오르지 못하도록.
보아하니 남궁천은 시간 내에 대연무장에 도착하기 위해서 상당히 무리한 상태.
아직도 숨이 고르지 못한 걸 보면 기력이 상당히 쇄진한 상태이리라.
‘그래, 차라리 쉴 틈을 주지 않고 비무를 진행한다면 운경이 이 불길을 잠재울 수 있을지도. 그게 아니면 기권을 선택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는 것도 방법일 터.’
생각을 마친 모용신이 귀빈석을 힐끔 돌아보니, 맹주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진행하라는 뜻.
모용신이 남궁천을 보며 물었다.
“자네는 지금 몹시 지쳐 보이는군. 큰일을 겪었으니 곧장 비무를 치르는 건 무리인 것으로 보이는데. 쉬는 게 어떠한가?”
“비무를 연기한다는 겁니까?”
“그건 아닐세. 기권하는 게 어떤지 묻는 걸세.”
그러자 진소홍이 불쑥 끼어들었다.
“네, 전 기권할 거예요.”
“잘 생각했네. 자네는?”
모용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의 입매가 묘하게 비틀린다.
“전 그냥 한다고 말했을 텐데요.”
“자칫 무리하면…….”
“그건 제가 알아서 결정합니다.”
언뜻 무례한 말투처럼 들렸지만, 지금 사람들은 남궁천이 이뤄낸 기적에 완전히 취한 상태였다.
그의 무례한 말투가 사람들의 귀에는 그저 당당함으로만 들렸다.
모용신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비무를 진행하도록 하지.”
“우와아아아아아!”
“신룡, 이겨라! 너만 믿는다!”
“끝나지 않는 기적을 보여줘라!”
“오늘은 너의 날이다앗!”
관전석이 들썩일 정도로 함성이 차올랐다.
모용신의 지시에 진행을 돕는 무인들이 진소홍을 부축하여 데리고 내려가자, 곧 비무가 정식으로 시작됐다.
“시작하라!”
“와아아아아아!”
귀가 먹먹할 정도의 함성을 들으며 운경이 빙그레 웃었다.
“무사 생환하여 다행이오. 난 남궁 소협이 돌아오지 못하는 줄 알고 내심 상심했다오.”
“걱정해 준 건 아닐 것 같고.”
“하하. 뭐, 사실 우리가 친분이 거의 없는 만큼 걱정까지 한 건 아니오. 다만, 나 역시 부전승으로 결승에 오르는 건 그리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겼기에.”
“하긴. 부전승으로 결승에 오르는 것보다야 최선을 다하고 탈락하는 게 더 명예롭긴 하지.”
남궁천의 말에 운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역시 남궁 소협은 재미있는 분이오.”
“별말씀을.”
“그럼 남궁 소협의 말대로 최선을 다해보겠소. 남궁 소협이 조금 지친 것 같긴 하나,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나니 내가 최선을 다해야 옳을 것 같아서.”
“물론이오. 그리고 내가 좀 지쳤어도…… 할 만하니까 한다고 하지 않았겠소?”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
아무리 유들유들한 운경도 이쯤 되니 자신을 무시하는 기분이 들어 썩 유쾌하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그의 표정이 어느새 싸늘하게 굳더니 무거운 목소리를 뱉어냈다.
“좋소. 그럼 우리 함께 최선을 다해봅시다.”
“뭐, 나는 최선까진 안 해도 될 것 같지만, 나름 애써봅시다.”
“후후. 이제 보니 남궁 소협께서는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라, 웃긴 사람이었군.”
후우우웅……!
순간 운경의 전신에서 훈풍이 불어나갔다. 달라진 기도에서는 투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그 기운이 어찌나 짙은지 자칫 살기처럼 느껴질 정도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도 나름 경계를 분명히 구분하는군.’
대체로 투기가 극에 이르면 살기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타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
하나 운경은 정확히 그 경계를 걷고 있었다.
종남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후기지수라더니, 과연 그럴 만하다.
스슥……!
운경의 신형이 흐트러지듯 옆으로 이동한다.
종남파의 무공 특징 중 하나가 주로 강맹한 중검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보법이나 신법이 은밀함에 무게를 둔다는 점이다.
물론 남궁천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너네 장로들 때문에 진절머리가 난 적이 꽤 있거든.’
잠시만 방심하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도끼 같은 대검을 휘둘러대니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스으으읍, 후우우우.
남궁천이 심호흡을 하고는 관전석을 힐끔 보았다.
남궁검이 언제나처럼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
‘저 영감은 외손자가 생환해도 눈 하나 깜빡 안 하는군.’
은근히 서운한 마음이 들면서도 어쩌면 생환을 믿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번 비무에서도 압도적인 기량 차이를 보여야 한다는 것.
척!
‘와라!’
남궁검이 벽라검을 앞세우고 힘을 주는 순간, 그것을 신호라도 여긴 듯 운경이 바닥을 차며 쏘아져 나갔다.
타앗!
“이여어어업!”
우렁찬 기합성과 함께 운경이 바람을 타듯 날아들었다.
그 움직임이 몹시 부드러우면서도 강맹한 위압을 품고 있었기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콱 쥐고 마른침을 삼켰다.
쩌어어엉!
운경의 검과 벽라검이 부딪치면서 고막을 찢을 듯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터져 나온 기파가 사방으로 불어나가면서 운경의 장삼자락이 사정없이 펄럭였다.
“엄, 엄청난 격돌이다!”
“대, 대단해!”
지켜보던 관전자들이 입을 딱 벌렸다.
하나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운경이었다.
놀랍게도 남궁천이 검을 들어 막으면서도 단 한 발자국도 밀려나지 않았다는 점!
‘어찌……?’
몹시 지쳐보였기에 몇 번 휘몰아치면 가볍게 이길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한데 자신의 중검을 받아내고도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설마 일부러 지친 척을 한 거였나?’
그럴 리가.
실제로 그가 느끼기에 남궁천의 기도는 꽤 흐트러져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감지하지 못할 만큼 강한 고수……?’
그럴 리가!
이번엔 더 강한 부정이 일어난다.
운경이 혼란에 빠진 사이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천하삼십육검의 제이초. 이미 공개 석상에서 한 번 써먹은 검을 또 쓰면 너무 뻔한데.”
“……!”
쑤아아앙!
순간 남궁천이 검을 휘두르자 운경이 튕기듯 멀어졌다.
타다닷!
얼른 보법을 밟고 밀려나는 것을 방지한 운경이 재빨리 반격을 대비했다.
한데…….
‘음?’
오지 않는다.
남궁천은 검을 한 차례 휘두르기만 했을 뿐 그 자리에 서서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다.
‘지친 건가? 아니면…….’
뒤이어진 생각에 기분이 팍 상한다.
‘그렇게 애쓰지 않고도 날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건가?’
가소로운!
운경이 미간을 잔뜩 구겼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그가 목을 한 차례 우두둑 꺾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런. 내가 실례했소. 최선을 다한다고 해놓고 너무 남궁 소협을 얕잡아 본 것 같군.”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오.”
“좋소, 이제부터는 제대로 상대해주지. 후회하지 마시오.”
“얼마든지.”
순간 운경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냐, 네가 그리 원한다면 종남의 검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마.
애초에 운경은 남궁세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살성과 연을 맺은 집안?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시건방지게 검의 제왕이라며 떠들어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만병지왕이라는 검을 다루면서 제왕의 가문이라 운운하다니.
종남파는 예로부터 중검을 익혀왔다. 그럼에도 검의 극의를 깨우치지 못해 평생을 수련한다.
한데 남궁세가는 중검과 쾌검을 동시에 추구한다. 그리고 마치 극의라도 깨우친 것처럼 제왕을 운운한다.
“진정한 중검이 무엇인지 보여주겠소. 중검과 쾌검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도 알려주겠소.”
남궁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시건방진.
언제까지 그 건방진 태도가 유지되는지 두고 보마.
구오오오……!
운경의 전신에서 시퍼런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남궁천은 단전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흑빛 기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금계의 기운.
검은색 공력이 온 전신에 열화처럼 퍼져 나간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호오, 태을무극공(太乙無極功)……?’
확실히 자신감을 가질 만하군.
태을무극공은 종남파에서도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독문심법.
그들의 검법 중에서도 강공일변도인 무극검(無極劍)을 소화해 내기 위해서 만들어진 내공심법이다.
종남파의 태을신공을 무극검에 더 어울리게 개량한 것인데, 익히기가 굉장히 까다로워서 정작 종남파의 제자들조차 꺼리는 무공이라고…….
‘한데 그걸 익혔단 말이지?’
다른 이에겐 운경이 그저 단단하게 변한 정도로만 보이겠지만, 남궁천에겐 운경의 전신이 검은빛으로 물들어 마치 철인(鐵人)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간다아앗! 남궁처어어언!”
찰나, 운경이 바닥을 차면서 포탄처럼 날아갔다.
무극검의 제일초 무극태절(無極太絶)!
마치 세상을 쪼개 버릴 것만 같은 기세로 운경이 남궁천을 덮쳐간다.
이를 지켜본 맹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제법이구나. 어쩌면 생각보다 일이 간단해질지도.’
그뿐만 아니라 종남파에서 참관한 장로 역시 몸을 가늘게 떨며 전율했다.
‘장문인이 아끼는 아이라기에 어느 정도일까 했더니…… 과연 저 아이는 종남의 보배로다!’
움직임에서부터 강맹함이 느껴진다. 아니, 가만히 서 있을 때조차 느껴진다.
한데 저 어린 나이에 태을무극공까지 저 정도로 익혀내다니!
‘우승 후보로다!’
그렇게 종남파 장로의 든든한 신뢰를 받으며 운경이 남궁천을 덮쳤다.
쩌어어어엉!
금속성이 폭음처럼 들렸다.
뒤이어 운경이 그대로 원심력을 이용해 회전하며 무극검 제삼초 쇄월검파(碎月劍波)를 연환식으로 펼쳤다.
꽈아아앙!
다시 한번 폭음 터지는 소리가 일어나고 남궁천이 튕겨 나갔다.
운경이 곧장 남궁천을 쫓아 달려갔다.
‘막아도 밀어낸다!’
파바바밧!
“이여어어업!”
쑤아아앙!
이번에는 무극검의 제사초 근철파암(根徹破巖)!
따아아앙!
검격이 어찌나 강맹한지 검으로 막아냈음에도 남궁천의 전신에 묻은 흙먼지가 풀썩 일어나며 뿌연 안개처럼 흩어진다.
‘아직 남았다!’
타앗!
다시 연환식으로 펼쳐지는 제오초 낙수파암(落水破巖)!
허공으로 살짝 떠올랐던 운경이 빠르게 남궁천을 향해 사선으로 내리찍었다.
따앙! 땅! 땅땅!
단 한 번이 아니라, 밀려난 남궁천을 그대로 밀어붙이며 찌르고, 또 찌른다.
그 충격으로 비무대 바닥이 깨지면서 먼지가 더욱 극심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촤아아악!
마침내 뭔가를 베어내는 소리!
장내가 침묵에 잠겨들고 모두가 눈을 크게 뜬 채 흙먼지가 잔뜩 일어난 곳을 보았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자들이 술렁였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먼지가 안개처럼 퍼져서 보이질 않아.”
한편 귀빈석에서 지켜보던 맹주는 자꾸만 입가에 매달리는 미소를 떨치기 어려웠다.
마지막 순간 분명 금속성이 터지지 않았다.
운경의 강공이 통한 것이리라.
종남파 장로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운경! 네가 해냈구나!’
이로써 종남파가 무연회 결승에 오르리라!
그리고 마침내 먼지 안개가 서서히 걷혔을 때,
“보인다!”
“우와아아아앗!”
사람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맹주와 종남파 장로는 환호성을 터뜨리는 사람들과 상반된 표정으로 경악했다.
“어찌……!”
운경이 뻗은 검이 남궁천의 장삼 자락을 찢었다. 하나 남궁천은 멀쩡하다.
대신 남궁천이 운경의 손목을 꽉 움켜잡은 채로 씨익 웃고 있었다.
“이제 내 차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