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누구 마음대로 실격이래?
내내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남궁검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아, 아버지……!”
그런 남궁검의 소매를 찢어질 듯 꽉 움켜쥔 사람은 남궁화였다. 그녀는 안색이 새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 지금 저게…… 무슨 말이죠? 천이가…… 어떻게 됐다고요? 왜……? 왜 천이가……?”
정신적 충격을 이기지 못한 남궁화가 스르르 허물어지려고 하자, 남궁검이 얼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받쳤다.
그가 손끝으로 한 줄기 공력을 불어 넣어주자, 남궁화의 전신에 훈풍이 도는 듯했다.
“정신 차려라, 화야.”
여전히 냉랭한 목소리였지만, 남궁검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두 사람보다 더 놀란 사람도 있었다.
금왕 진득랑.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남궁천이…… 죽었다고?’
그럴 리가!
잠룡이라고 믿었던 남궁천은 한낱 꿈이었단 말인가?
자신의 딸이 그리 믿었고, 자신 또한 의심하지 않았건만.
하면 홍이는? 우리 소홍이는 어찌 되었단 말인가?
금왕이 주먹을 꽉 쥐고는 귀빈석에서 일어난 맹주를 올려다보았다.
맹주의 눈길이 마침 금왕과 정확히 마주쳤다.
그 순간 금왕은 맹주의 눈이 한없는 슬픔에 잠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눈빛으로……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시오! 제발!’
당장 달려가서 맹주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왠지 맹주가 입을 여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말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귀를 틀어막고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조차 까딱할 수 없었다.
마치 점혈을 당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간 것처럼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어려웠다.
그러는 사이 맹주의 잔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스며들어 와 폐부를 찢어발겼다.
“우리는 며칠 전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었소. 본 맹의 청랑단이 곧바로 놈들을 추격하여 흉수를 찾아내고 납치당했던 여생도의 위치를 알아냈소. 하나 그들은 협상하기 위해 나섰던 우리의 정의로운 생도를 잔인하게 죽였소. 바로 남궁천 생도요. 남궁천 생도는 스스로 그 여생도를 구하기 위해 본 맹의 임무에 참여할 것을 강하게 원했소. 이에 청랑단주는 협상을 위해 남궁천 생도를 보냈으나…….”
맹주가 끓어오르는 격정을 다스리려는 듯 또 말을 멈췄다.
그제야 군데군데 술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흉수를 욕했고, 누군가는 죽었다는 남궁천을 애도했다. 혹자는 믿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고, 용천관 생도들은 얼음처럼 굳어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잠시 호흡을 고른 맹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악랄한 놈들은 정의롭게 나선 남궁천 생도를 가차 없이 죽였소. 그 과정에서 납치당했던 여생도 역시…… 사망하고 말았소.”
“……!”
털썩!
금왕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싹 빠진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홍이가 죽다니…… 내 딸이…… 홍아……! 홍아!’
금왕이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졌다.
그런 금왕을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맹주가 깊은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새벽 이 소식을 들었으나 믿을 수가 없었소. 해서 지금까지 우리의 신룡, 남궁천 생도가 돌아오길 기다렸소. 기적이 일어나길! 부디 이 강호에 그런 재앙이 일어나지 않기를! 하나…… 남궁천 생도는 아무래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소.”
“그 흉수 놈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누군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맹주가 씁쓸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놈들은 청랑단이 모두 섬멸했소.”
“하면 두 생도의 장례는…….”
“당연히 장례를 치러야겠지. 하나 애석하게도 두 아이의 시신을 찾지 못했소. 잔악한 놈들이 벽력탄을 써서 동굴을 무너뜨리고 청랑단에도 피해를 입혔소. 무너진 동굴은 질풍대가 확인을 마쳤소.”
맹주의 말에 금왕이 입을 틀어막았다.
뱃속에서부터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속이 울렁거려서 더 이상은 관전석에 앉아 있기도 힘들 지경.
그가 비척거리면서 일어나자 호신위가 얼른 다가와 부축했다.
“주군!”
“그, 그만…… 돌아가지.”
“모시겠습니다.”
금왕이 다 죽어가는 음성으로 말하자, 호신위가 얼른 그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남궁검과 작별 인사를 나눌 정신도 없었다.
남궁검 역시 떠나는 금왕을 말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살벌하게 굳은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궁화는 벌써 눈이 촉촉하게 젖어서는 남궁검의 손을 꽉 잡았다.
“아버지…… 천이가…….”
“아닐 것이다.”
“예?”
남궁화가 놀란 표정으로 남궁검을 보았다.
그 와중에도 남궁검의 표정은 놀라울 정도로 냉정해 보였다. 그가 날카롭게 다듬은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말했다.
“두 가지. 하나는 그 아이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지 않느냐?”
“하지만 그건 폭약 때문에…….”
시체조차 찾을 수도 없는 걸 테지요.
차마 이어질 말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그 무언의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남궁검이 말을 이었다.
“강호에선 시체를 보기 전까지 죽음을 장담하지 말란 격언이 있지.”
“알아요. 하지만…….”
“둘째로 그 아이는 쉽게 죽을 아이가 아니다.”
그 목소리에 어찌나 단단한 신뢰가 깔려 있는지 하마터면 남궁화도 그대로 믿어 버릴 뻔했다.
남궁검은 예의 그 얼음 조각 같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저승사자도 거부한 아이가 아니더냐? 이리 죽을 아이가 아니다. 죽음에서도 돌아온 아이다. 그러니 좌절할 필요 없다.”
“아버지…….”
남궁화가 주먹을 꼭 쥐며 남궁검을 보았다.
저 단단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슴이 조여오는 것만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의 희박한 믿음이 사실처럼 크게 다가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맹주는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본 맹은 이 자리에서 천명하겠소! 두 어린 영웅의 죽음을 애도하고, 희생당한 두 용봉을 위해 피의 복수를 하겠노라고! 본 맹은 그 흉수들의 배후를 끝까지 파헤쳐서 악의 뿌리를 뽑아 버릴 것이오! 정의를 수호하려다 희생당한 두 생도를 위해서! 본 맹이 존재하는 한 악의 뜻대로 이 강호가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오!”
대연무장에 맹주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함성을 지르거나 환호를 하는 자들은 없다.
하나 맹주는 알고 있었다.
이미 관전석을 메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무림맹에 대한 신뢰와 불의에 대한 저항심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음을.
맹주는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금왕을 가만히 보았다.
금왕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호신위의 부축을 받으며 대연무장을 벗어나려는 듯했다.
하나 그는 이 모든 연설을 들었을 터다.
지금은 딸을 잃은 심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겠지만, 때가 되면 인간의 심리란 이성적으로 굴러가게 마련이다.
그때는 맹을 찾아와 복수를 돕겠다고 나서리라.
그것이 하나뿐인 딸을 잃은 아비의 심정일 테니까.
한참의 정적 끝에 누군가 불쑥 물었다.
“하면 오늘 비무는 어찌 되는 겁니까?”
기다렸던 질문이다.
맹주는 양민들과 무인들을 찬찬히 둘러보다가 말했다.
“예정대로 진행하겠소. 사마외도의 무리들은 어떻게든 본 맹을 흔들고자 했겠으나, 본 맹은 그 어떤 역경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오. 신룡과 봉황을 잃었으나,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인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오!”
맹주의 목소리가 대연무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 울림은 뭇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고, 그들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림맹을 지지합니다!”
“맹주님을 지지하겠습니다!”
“결코 정의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무림맹이 건재하는 한 악의 무리가 설 자리는 없다!”
“피의 복수를!”
“우와아아아!”
대연무장에 함성이 차올랐다.
환호성이 아닌, 울분의 함성이자, 결의의 함성이었다.
그 모습을 둘러본 모용신은 다시 한번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맹주님……!’
정말이지 대단한 사람이 아닌가?
어찌 보면 생도 둘을 잃었으니 무림맹이 비난을 받아 마땅할 일이다.
한데 말투와 억양, 표정과 단어 선택 등으로 분위기를 단박에 바꿔 버렸다.
그의 눈빛과 동작 하나하나가 모든 사람들의 인지를 흔들어 놓았다.
함성이 잦아들자 맹주가 모용신에게 눈짓을 했다.
남궁천과 진소홍의 실격을 알리고 비무를 예정대로 진행하라는 뜻이다.
모용신이 심호흡을 하고는 사자후로 외쳤다.
“이로써 이번 비무는 남궁천이 참가하지 못하는 관계로 실격 처리가…….”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스라이 고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더니 그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게 아닌가?
분명 대연무장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워낙 우렁찬 기합성이었기에 관전자들마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았다.
이제 막 관전석을 벗어나려던 금왕조차 움찔거리고는 돌아섰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는 마침내 대연무장 출입로까지 다다랐다.
“우아아아압!”
찰나, 대연무장 입구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내달려오더니 허공을 훌쩍 날아서 비무대로 단숨에 올라서는 것이 아닌가?
타악!
“헉, 헉, 허억……!”
바람처럼 나타나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생도.
그는 분명……!
“맙소사……! 어, 어떻게 된 거지?”
“가만, 저 생도는 분명……!”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지?”
웅성임이 들불처럼 번져간다.
그리고 비무대에 갑자기 나타난 상대를 본 모용신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귀빈석의 맹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어, 어찌……!’
그랬다.
진소홍을 어깨에 들쳐 메고 나타나 숨을 헐떡이는 생도는 틀림없이 남궁천이었다.
전신에 흙먼지가 잔뜩 묻은 남궁천이 고개를 들더니 대연무장이 쩌렁쩌렁 흔들리도록 외쳤다.
“누구 마음대로 실격이래!”
그 목소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진, 진짜 남궁천이다!”
“우아아아아앗! 남궁천이 돌아왔다!”
“신룡이 나타났다! 봉황을 업고 나타났다!”
“기적이 일어났다! 진정한 기적이 일어났다아앗!”
관전석이 떠나가도록 환호성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절망의 끝자락까지 갔던 금왕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군!”
“괜찮다. 괜찮아…… 다 괜찮다!”
금왕이 호신위의 손길을 뿌리치며 웃었다. 아니, 울었다. 그는 기쁨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아아, 돌아왔구나! 돌아와 주었어!”
남궁화도 남궁검의 손을 콱 움켜쥐었다.
“아버지! 천이가! 천이가……!”
“보고 있다.”
여전히 냉정한 목소리로 딱딱하게 내뱉는 남궁검이었지만 입가에는 아주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철없이 속 썩이는 건 여전하구나.”
“그러게요.”
이번만은 남궁화도 남궁검의 말을 부정하지 않은 채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용천관 생도들은 목청이 찢어지도록 환호성을 질렀고, 묵묵히 바라보던 비량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다만 모용신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눈썹을 사정없이 꿈틀거렸다.
‘어, 어찌……? 어째서 저놈이……?’
이해할 수가 없다.
분명 폭약이 터지고 동굴이 무너져서 살아남은 자가 없었는데! 도대체 저놈은 죽지 않는 귀신인가?
모용신이 힐끔 귀빈석을 보자 맹주 역시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좀처럼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맹주였으나, 이번만큼은 화가 잔뜩 난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껏 신룡이니 뭐니 하며 잔뜩 띄워놨는데 이리 멀쩡하게 살아 돌아오다니!
남궁천이 벽라검을 척 내밀었다.
“자, 시작합시다. 여기 신룡이 도착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