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누구 마음대로 실격이래?
“진소홍이 죽었다고?”
맹주의 눈자위가 꿈틀거렸다.
모용신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진소홍이 죽었다니…… 금왕의 딸이…….”
뜻밖의 소식에 맹주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하나 노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단지 예상치 못한 결과로 당황한 모습만 역력하다.
맹주는 쉽게 흥분하지 않고, 화를 잘 내지 않는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감정을 절제하고 대안을 빠르게 세워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금왕의 금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했다. 그리고 그 위험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일이 어긋났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분명 위험하긴 해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놈들은 진소홍을 납치한 후 그대로 달아나 주기만 하면 될 일이었고, 청랑단은 놈들을 추격하는 척하다가 진소홍을 데리고 오면 끝이었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
적과 내통한 사실을 들키지만 않으면 식은 죽 먹기보다 별것 아닌 임무.
만에 하나 내통 사실이 드러날 위험이 생기면 살인멸구라는 차선책도 준비되어 있었다.
금왕의 금력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모험은 아주 값싼 대가였다. 황제도 버선발로 맞이한다는 그 금왕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데 왜 실패한 걸까?
어디에서 어긋난 건가?
문득 얼굴 하나가 스친다.
어미를 닮아 반반한 외모에 제 아비처럼 당당한 성격이었던 아이.
최근 떠오르는 신룡이라며 각광받았으나, 맹주의 눈에는 그저 튀어나온 돌에 지나지 않았던 아이.
‘남궁천……!’
그래, 그 아이가 무연회에서 급부상한 후로 모든 게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천만다행인 것은 남궁천이 죽었다는 것인가?
맹주가 한참 만에 침묵을 깨고 물었다.
“원인이 무엇이라 보는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남궁천과 진소홍이 죽은 것으로 보아서는…….”
“남궁천이 그들을 도발했다?”
“예. 놈들은 남궁천만 제거했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실수로 진소홍까지 죽였고…….”
“일이 틀어졌으니 우리가 살인멸구할 것이라는 걸 알고서 동귀어진을 택했다는 것이군.”
“그렇습니다.”
“남궁천을 협상가로 보낸 것은 자네 선택이었을 테지.”
“죄송합니다.”
“아니. 그건 훌륭한 방법이었네. 자네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어. 다만 그 아이가 생각보다 더 까다로웠던 게지.”
“…….”
“이 모든 상황은 남궁천 때문이로군. 원인이 정해졌으니 이제 대책을 생각해야겠지.”
“명만 내리시면…….”
모용신의 말을 막으며 맹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가 할 일은 끝났네. 진소홍을 구하지 못한 것은 뼈아픈 일이나, 이미 지나간 일. 사상자들부터 챙기고 수습을 해야겠지.”
“…….”
모용신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차라리 맹주가 호통을 치고 화를 내주길 바랐다.
하나 맹주는 내내 침착하고 차분했다.
그래서 더욱 불편했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맹주를 더 경외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간 말없이 서 있던 맹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돌아섰다.
어둠이 내려선 후원에 맹주의 눈빛만이 뱀처럼 빛났다.
“남궁천의 호승심이 문제가 된 게지. 남궁천은 영웅이 되고 싶어 했고, 자네의 지시를 어기고 혼자 힘으로 진소홍을 구하려고 했네. 그 서툰 과정에서 놈들은 두 생도 모두 죽여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게지. 협상의 여지가 사라진 놈들은 자네들과 동귀어진을 각오했을 터. 그 바람에 청랑단 전체의 삼 할 정도나 사상자가 발생했지. 그렇지 않은가?”
교묘한 말이었다.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하나 거짓은 가려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다. 때문에 모든 것이 사실처럼 들린다.
그리고 맹주라는 신분은 이를 사실로 강요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눈치 빠른 모용신이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놈들의 행태에 본 맹은 분개할 수밖에 없네. 남궁천이야 어린 마음에 호승심을 부리는 실수를 했다지만, 애초에 모든 원흉은 적들에게 있었으니. 본 맹은 졸지에 신룡과 금왕의 영애를 잃은 처참한 상황에 놓인 걸세. 이에 본 맹은 만인 앞에서 천명할 수밖에 없지. 두 후기지수의 복수를 말일세. 사마외도를 박멸하기 위해 다시 한번 칼을 날카롭게 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옳은 말씀이십니다.”
비록 진소홍을 잃은 것이 계획과 달라졌지만, 이 그림대로라면 무림맹은 원하는 걸 모두 움켜쥘 수도 있을 터였다.
복수에 눈이 먼 아비가 맹을 지원하는 건 결코 이상한 그림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당연한 그림이었으니까.
모용신은 내심 감탄했다.
‘역시 맹주님이시다. 아마도 최악의 경우 진소홍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까지 계산을 하신 거구나.’
그랬다.
어쩌면 애초부터 이 은밀한 계획에는 위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나 성공만 보장된다.
그래서 살인멸구가 중요했으리라.
자신이 맹을 떠나기 전 맹주가 굳이 살인멸구를 확인한 것은 그 때문이리라.
확실히 맹주는 무서운 자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는다.
하나 그 목표는 언제나 정의 수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
악랄함은 더한 악랄함으로 누를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이 맹주의 철학이리라.
맹주는 진심으로 울분을 느끼기라도 하는 듯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뺨까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나는 내일 치러질 비무 대회에서 모두에게 공표하겠다. 우리는 남궁천이라는 신룡과 금왕의 영애를 모두 잃었노라고. 뿐만 아니라 우수한 청랑단원들 다수를 잃었노라고. 그리하여 본 맹은 그들의 배후를 철저하게 파헤치고 피의 복수를 다짐하겠노라고.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칼을 갈겠노라고! 본 맹이 존재하는 이유와 본 맹의 무서움을 확실히 각인시키겠노라고! 그리 말할 것이다!”
맹주는 마치 그 자리에서 연설이라도 하듯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대단한 울림이었다.
말 그대로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었다.
심지어 모용신마저 이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능력!
그것은 맹주가 가진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다.
어느덧 모용신도 맹주의 말을 신앙처럼 받들며 포권했다.
“그 피의 복수에 신이 앞장서겠습니다!”
맹주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모용신을 보았다.
“고맙네. 반드시 복수를 이뤄서 어린 후기지수들이 안심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세.”
“명심하겠습니다.”
“금왕에게는 아직 전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나는 끝까지 남궁천을 기다릴 걸세.”
“……?”
“본 맹이 돌아오지 않을 신룡을 마지막 순간까지 믿고 기다렸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지 않겠나?”
“아…….”
모용신이 나직이 감탄했다.
나쁘게 말하면 정말이지 간악하기가 짝이 없지만, 대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연기였다.
맹주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겠는가? 사람들은 진실에 별로 관심이 없다네. 진실처럼 보이는 행동에만 관심을 가질 뿐.”
맹주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걸렸다.
* * *
계곡 옆 자갈밭에서 유충을 쪼던 곤줄박이가 어느 순간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자갈밭에 온몸이 잔뜩 젖은 두 사람이 비척거리면서 걸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 남자가 한 여인을 부축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털썩!
쓰러지듯 바닥에 드러누운 두 사람은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한 채 동녘이 밝아져 오는 하늘을 보았다.
“헉, 헉, 헉……!”
“후우, 후우……!”
마침내 여인이 기운을 차린 건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바로 진소홍이었다.
“정말 길이 그것밖에 없었던 거야?”
“아니. 다른 출구도 있다고 했잖아.”
남궁천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진소홍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럼 거기로 나가면 되잖아. 왜 하필 그…….”
아,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그 절벽에서 까마득한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은 정말이지…….
몸서리를 친 진소홍이 심호흡을 하고는 물었다.
“혹시 놈들의 배후가 비상출구에 있을까 봐?”
“아니.”
“그럼?”
“거기엔 질풍대가 대기하고 있었겠지. 질풍대 정도면 비상출구를 찾아냈을 테니까.”
“그럼 당연히 거기로 가면 되잖아! 왜 굳이…… 아, 말로 꺼내기도 싫어.”
“말했다시피 죽 쒀서 개 주기 싫었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하기엔 시간이 없어. 이제 기운 차린 것 같으니 그만 가자.”
“어딜?”
“어디긴. 맹으로 돌아가야지. 오늘 비무 치르는 날이니까.”
“이런 일을 겪고 곧장 가서 비무를 치르겠다는 거야?”
“왜? 안 돼?”
“그야…….”
뭐라 말하지? 피곤하니까?
그런데 남궁천을 보면 전혀 안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아, 모르겠다.
남궁천과 같이 있다 보면 세상을 다 알 것 같다가도 갑자기 바보가 된 것만 같달까?
남궁천이 몸을 일으키더니 휘적휘적 걸어간다.
“야, 같이 가.”
“서둘러. 늦으면 실격이야.”
“난 그냥 기권할래.”
“잘 생각했어. 큰일을 겪었으니 좀 쉬어야지. 그 나이에 무리하면 탈난다.”
너도 같은 나이거든요?
진소홍이 어이가 없어서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남궁천은 왠지 한참이나 어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으니.
“그런데 정말 시간 내에 갈 수 있을까? 벌써 해가 뜨는데.”
“가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 안 될 것 같으면 먼저 가. 난 천천히 뒤따라갈게.”
“그건 안 돼. 네가 정 힘들면 업고서라도 간다. 안 그랬다간 또 죽 쒀서 개 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
“그러니까 어제부터 계속…… 뭘 쒀서 누굴 준다는 거야?”
“그런 게 있어.”
남궁천이 대충 대답하자, 진소홍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 * *
“준비는 됐는가?”
대연무장 귀빈석으로 들어선 맹주가 총관을 보며 물었다.
총관이 공손히 읍소하며 답했다.
“예, 맹주님. 오늘 역시 만석입니다.”
“잘됐군. 그럼 시작하지.”
맹주가 착석하자 총관이 비무대에 오른 모용신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에 모용신이 비무를 시작하겠다고 알리자, 대연무장 가득 함성이 차올랐다.
“우와아아아!”
“드디어 준결승이구나! 기대한다!”
“용천관 이겨라!”
“무슨 소리! 무맹관이 이겨야 한다!”
관전석에서 열화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지만, 금왕의 표정만큼은 밝지 못했다.
‘홍아…….’
아직까지 딸의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맹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고, 남궁천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비무 대회를 예정대로 치르겠다고 하니, 혹시나 이곳에서 어떤 소식이라도 알게 될까 싶어서 왔다.
하나 역시 딸은 보이지 않는다.
남궁천도 마찬가지.
아직도 추적 중일까? 아니면…….
‘아니다. 부정한 생각은 떠올리지도 말자.’
곁에 앉은 남궁검은 시종 냉랭한 표정이니 말을 붙이기도 어렵다. 아니, 지금 같아선 말을 붙일 기력도 없다.
그러는 사이 종남파의 제자인 운경이 비무대에 올라섰다.
함성이 잦아들고 시선이 비무대에 고정된 지 한참이 지나도 맞서야 할 상대인 남궁천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남궁천 생도가 왜 안 나타나지?”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냐?”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여생도 하나가 납치됐다던데. 그 여생도는 되찾은 건가?”
“비무 대회를 예정대로 치른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웅성임이 커진다.
이를 지켜보던 맹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쯤에서 나서야겠군.’
그가 아주 잠깐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께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소. 남궁천 생도는 오늘 오지 못할 것 같소.”
“……?”
사람들이 의문을 품은 시선으로 맹주를 보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못 오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웅성임이 잦아들 때쯤 맹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나는 마지막까지 우리의 신룡이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기대하고 싶었소. 그래서 희망을 놓지 않고 기다렸으나…… 역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소.”
말을 다시 끊은 맹주가 잠시 격정을 다스리려는 듯 심호흡을 했다.
그가 관전석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의 두 눈은 당장 피눈물이라도 흐를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평소와 다른 맹주의 모습에 관전자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마침내 맹주의 입에서 경악할 만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우리의 신룡, 본 맹의 희망이자, 정파의 후기지수. 그 남궁천 생도가 불의에 맞서 싸우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순간 드넓은 대연무장에 얼음장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