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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검제-92화 (92/508)

92. 호구(虎口)

남궁천이 건네준 수통의 마지막 물 한 방울까지 털어 마신 진소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출구가 나오는 거지?”

“나와.”

“그런데 왜 이렇게 멀어?”

“산 하나를 관통해서 오직 나갈 수밖에 없는 길을 만든 거야. 들어오진 못하는 곳. 그 길이 탄탄대로일 리는 없지. 넌 모르겠지만 땅굴 파는 게 보통 힘든 일도 아니고.”

“꼭 땅굴 좀 파본 사람처럼 말하네.”

파 봤다. 아주 많이.

틈만 나면 땅굴 파서 도피처를 만들고, 여기저기 안가 만드는 게 일종의 취미였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취미처럼 땅을 파는 인간, 그게 바로 전생의 남궁천이었다.

진소홍이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해도 들키는 경우가 있겠지?”

“당연히.”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피처를 열 군데 정도 만들어 두면 다섯 군데는 쓸모없어진다.

폭우에 저절로 무너지는 경우도 있고, 땅꾼들에게 발견되어 무용지물이 되기도 하니까.

물론 여기처럼 견고하고 잘 갖춰진 구조라면 또 다르지만.

대부분의 도피처는 이보다 조악하게 마련이다.

진소홍은 궁금한 게 많은지 어깨를 으쓱이고는 물었다.

“만약 도피처에 있다가 발각되면? 지금처럼 탈출구도 사용할 수 없고 청랑단이 노리는 중이라면?”

“대개의 도망자들은 독한 구석이 있어. 그러니 홀로 죽을 바엔 다 같이 죽으려고 할 테지.”

“어떻게?”

“네가 갇혀 있던 방에서 뭘 본 거 없어?”

“글쎄…… 너무 어두워서…… 좀 퀴퀴한 냄새가 났는데, 그건 지하라서 그런 것 같고…… 한쪽에 나무 상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그 나무 상자에 뭐가 들었을까?”

“뭐가 들었는데? 넌 알아?”

“네 말대로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다 같이 죽으려면 뭐가 있어야겠어?”

잠시 생각하던 진소홍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눈치챘으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겠지?”

“응! 어서 가자!”

진소홍이 벌떡 일어나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남궁천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쯤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겠군. 청랑단주, 내가 당하지만은 않는다는 걸 알았어야지.’

어딘지 냉소를 지은 남궁천이 다시 몸을 돌리고는 진소홍의 뒤를 따라갔다.

* * *

나무 상자의 덮개를 연 수하가 비장한 표정으로 애꾸를 돌아보았다.

“벽력탄(霹靂彈) 네 개입니다.”

“준비해.”

“존명!”

수하들이 벽력탄을 조심스럽게 옮기기 시작했다.

애꾸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읊조렸다.

“이제 지옥을 만들 차례군. 부단주를 끌고 와. 남궁천과 진소홍이 죽었다고 말해줘야지.”

* * *

해가 떴다.

모용신은 바위 위에 우뚝 서서 그대로 돌이 되었다.

팽수혁은 그 아래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했다.

참다못한 팽수혁이 모용신을 올려다보며 버럭 소리쳤다.

“아니, 언제까지 기다리기만 하실 겁니까! 제가 들어가겠다니까요!”

하나 모용신은 대답이 없다.

마치 귀를 막고 입을 닫은 석상이 된 것 같다.

하나 그의 흔들리는 눈빛은 복잡한 생각에 빠져 헤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단주가 들어간 지 벌써 한 시진이 훌쩍 지났다.

돌아오고도 남았어야 할 일이다.

남궁천이 죽었으며 진소홍이 사로잡혀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왔어야 했다.

한데 돌아오지 않는다.

한 번 떠난 이가 아무런 소식이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은 강호에서만큼은 통용되지 않는다.

강호에서 무소식은 곧 죽음을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결국 성질 급한 팽수혁이 바위 위로 훌쩍 올라섰다.

“제길! 갑니다! 말리지 마십쇼!”

퍽!

모용신이 돌아보지도 않고 휘두른 주먹에 팽수혁이 이마를 얻어맞고 그대로 바위 아래로 쿵 떨어졌다.

“크윽! 젠장, 어쩌자는 겁니까? 도대체! 부단주님도 안 돌아오고, 남궁천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판에!”

“시끄럽다.”

마침내 모용신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바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북풍한설을 품고 있었다. 그 위압감에 팽수혁이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는 눈에 힘만 주었다.

그때였다.

“단주님!”

누군가 외친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팔…… 팔입니다!”

궁수들을 이끄는 사 대주가 물웅덩이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다시 모든 이의 시선이 수면에 둥둥 떠내려 오는 무언가로 향했다.

벌건 핏물이 번진 복판에 떠 있는 것은 누군가의 팔뚝이었다.

모용신이 얼른 몸을 날려 그것을 건져왔다.

일 대주가 날렵하게 다가와 물었다.

“부단주님 아닙니까?”

모용신은 대답 대신 굳은 표정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잘린 팔만 봐서는 부단주의 것인지 아닌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하나 저들이 동료의 팔을 잘라서 던지진 않았을 터.

게다가 잘린 팔에는 글씨까지 새겨둔 상태.

-문제가 생겼으니 협상을 다시 하겠소. 단주가 직접 오시길.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단주!”

어느새 다가온 사 대주가 글귀를 읽어보고는 말했다.

일 대주와 이 대주도 동의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저놈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기 전에는 움직여선 안 됩니다!”

수하들의 만류에 모용신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폭포수를 바라보다 물었다.

“하면 달리 방법이 있는가?”

“부단주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합니다. 이 팔 역시 부단주님이 틀림없습니다. 차라리 폭약으로 동혈을 무너뜨려서 놈들을 매몰시키신다면…….”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립니까!”

순간 불쑥 튀어나온 고함 소리에 의견을 내던 사 대주가 인상을 쓰고 돌아보았다.

“뭐라고?”

“저 안에 남궁천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팔이 부단주님 것이 아닐 수도 있고요! 진소홍은요?”

“그렇다고 해도 단주님이 저 안으로 들어가시는 건 위험한 일이다! 호구(虎口)에 머리를 들이밀 수는 없는 법이다!”

“이미 호구에 머리를 넣은 남궁천은요? 그 녀석은 역시 청랑단에서도 호구라서 호구에 머리를 집어넣은 거군요?”

“이놈……!”

팽수혁이 빈정거리자, 사 대주가 노호성을 터뜨렸다.

하나 곧 모용신이 손을 들어 제지하는 바람에 이만 뿌득뿌득 갈았다.

“내가 가겠다.”

“단주!”

“진소홍을 구출하지 않은 채로 매몰은 절대 안 된다.”

“하지만……!”

“우선 사정을 알아봐야지. 달리 방법이 있나?”

“…….”

사 대주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못하자, 일 대주가 얼른 나섰다.

“하면 일 대가 호위를 하겠습니다!”

“안 돼. 너무 많다.”

“하지만……!”

“만약 너희들 말대로 이게 함정이라면? 쉰 명이 위험에 빠진다.”

“하면 절반만 가겠습니다!”

일 대주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자, 모용신이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고 대꾸했다.

“열 명. 그 이상은 안 돼.”

“……알겠습니다.”

모용신의 표정에서 꺾을 수 없는 고집을 읽었기에 일 대주가 순순히 물러났다.

동혈에 진입할 대원이 추려지자 모용신이 바위 위로 올라섰다.

“사 대주.”

“예, 단주!”

“계속해서 예의 주시하다가 혹여 적들이 나타나면 말살하도록. 그리고 이상현상이 생기면 신호탄을 쏘아서 질풍대의 진입을 허가하라.”

“존명!”

“일 대주.”

“예, 단주!”

“협상의 단계는 지나갔다. 진입 후에 보이는 적은 모조리 죽여도 좋다. 첫째, 목표는 진소홍 생도를 구출하는 것. 확보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져나오도록.”

“존명!”

“그럼 가자.”

파밧!

순간 모용신이 바람처럼 몸을 날리자, 그 뒤를 열 명의 무인이 새처럼 뒤따랐다.

그 모습을 긴장한 채로 쳐다보던 팽수혁이 유현을 힐끔 돌아보았다.

“소도장은 최악의 경우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

유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아끼자, 주연화가 거들었다.

“사형, 저도 궁금해요.”

“글쎄……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남궁 소협과 진 소저가 이미 죽은 경우겠지. 그땐 저들이 동귀어진으로 폭약을 쓸 수도 있을 테니.”

“……!”

팽수혁과 주연화가 깜짝 놀라서 서로를 보았다.

폭약까지는 생각지 못한 탓이다.

팽수혁이 얼른 물었다.

“만약 저놈들이 폭약을 쓰는 거라면…… 모용 단주와 일대원들은…….”

“말 그대로 호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격이겠지요.”

“그래서 단 열 명만…….”

“저들은 청랑단입니다. 숱한 훈련과 실전을 겪었을 겁니다. 아마 제가 생각한 정도의 상황은 어느 정도 대비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피해가 없지는 않겠지만…….

유현이 마지막에 떠오른 말은 가슴으로 삼키고서 동혈 안쪽으로 사라지는 청랑단원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모용신은 수하들과 함께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천연동굴 안에서 이동했다.

마침내 비교적 너른 공동이 나타났는데, 한쪽 구석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모용신이 수신호를 하자 일 대주가 횃불을 들고 얼른 이동했다.

과연 공동 한쪽 구석에 만신창이가 된 무인이 쓰러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부단주였다.

“부단주!”

일 대주가 부단주의 몸을 돌려 앉혔다. 부단주는 숨만 겨우 붙은 상태였다.

모용신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남궁천과 진소홍은?”

“둘…… 다…… 죽었…… 습니다. 어서 여길…… 피하셔…… 야…….”

모용신의 눈자위가 떨렸다.

두 사람이 죽었다고? 어쩌다가?

하나 지금 그걸 따져 물을 때가 아니었다.

부단주가 여길 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모용신이 몸을 휙 돌리자, 놀랍게도 입구 쪽에서 흑의 무인 하나가 새처럼 날아드는 게 아닌가?

‘어째서 입구에서……!’

모용신이 놀랄 겨를도 없는 사이에 흑의 무인이 비명 같은 고함 소리를 터뜨렸다.

“뒈져라앗! 청랑단주우웃!”

“폭약이다! 막아앗!”

일 대주의 외침대로 흑의 무인은 가슴에 벽력탄 하나를 매달고 있었다.

순간 청랑단원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흑의 무인에게 덤벼들었다.

쉬컥!

“크아악!”

흑의 무인이 휘두른 칼에 청랑단원 하나가 몸을 뒤집으며 쓰러졌다.

하나 청랑단원 중 일 대에 속한 이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정예 중 정예였다.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자 흑의 무인도 더는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단주님! 피하십시오!”

일 대주가 소리쳤다.

흑의 무인이 가슴에 품고 있는 벽력탄은 동혈 하나쯤은 거뜬하게 무너뜨릴 수 있을 터였다.

수하를 사지에 두고 몸을 빼내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어영부영하다가는 그야말로 개죽음이 될 뿐이었다.

모용신이 혀를 차고는 재빨리 동혈 밖으로 달렸다.

일 대주가 얼른 흑의 무인을 몸으로 덮으며 소리쳤다.

“너희들도 어서 나가!”

“대, 대주님은……!”

“어서엇!”

일 대주의 명령에 단원들이 저마다 몸을 빼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동혈 안에 흑의 무인의 앙청광소가 쩌렁쩌렁 울렸다.

“크하하하! 이 개새끼들아! 너희들은 다 죽었다아아앗!”

비명 같은 외침 끝에 폭약이 터졌다.

꽈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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