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단절구간
청랑단 부단주는 지금쯤 남궁천의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조금 전 들렸던 소리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우려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단적으로 지금까지 남궁천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녀석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는 증거가 아니겠나?
‘쯧…… 나름 재능은 출중했으나, 아깝게 됐군.’
그러게 남궁천은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녀석은 타고난 운명을 받아들였어야 했다.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낙인이 찍힌 이상 최대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아갔어야 했다.
그 대단했던 남궁세가조차 수년 만에 몰락시킨 게 바로 대살성의 악명이 아니던가?
튀어나온 돌이 정을 맞는 건 세상 당연한 이치. 바짝 웅크리고 숨어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더 튀어나온 돌이 되다니.
‘우리를 너무 원망하진 말거라. 모든 이들에겐 저마다의 사정과 각자의 정의가 있는 법이니.’
원래 이 세상이 모두에게 공평할 순 없는 법 아니겠는가?
다수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한 법.
자신이 청랑단주를 따르는 이유는 그러한 사상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 무림맹주와 청랑단주가 막강한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 역시 그러한 사상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올바른 사상에는 그만한 힘이 따르는 법이지.’
그리고 자신은 그 올바른 사상에 힘입어 앞으로 청랑단주를 거쳐 운이 좋으면 무림맹주의 자리까지 오를 수도 있으리라.
어떤 의미로 남궁천의 희생은 결국 그러한 결과를 만들기 위해 거쳐야 할 필연적 과정이리라.
‘이번 일만 잘 해결되면 본 맹은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셈이다.’
대살성에 대한 후환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고, 만금상회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게 될 테니.
타앗.
폭포수를 뚫고 날아든 부단주가 측면에 난 동혈 입구로 들어섰다.
천연동굴 느낌의 입구로 들어서서 울퉁불퉁한 통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저만치 앞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공동으로 들어서니 여섯 명의 무인이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애꾸가 한쪽 입매를 치켜 올리면서 말을 건넸다.
부단주는 싸늘한 표정으로 흑의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
필요악에 의해 손을 잡고는 있지만 역시 얼굴을 맞대고 웃을 상대는 아니었다.
부단주가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소홍 생도는?”
“무탈하오.”
“남궁천은?”
부단주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대충 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흑의 무인들 중 몇몇의 무복에 진득한 피가 묻어 있었기에. 게다가 바닥에도 핏물이 좀 고여 있었고.
남궁천이 죽으면서 남긴 혈흔이리라.
“부탁대로 처리했소.”
부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군.”
“이제 어떻게 풀어나갈 거요?”
“비상출구 쪽으로 질풍대가 갔다. 단주님이 적당한 핑계를 대서 그들을 물릴 테니, 신호를 보내면 비상출구를 이용해서 빠져나가도록.”
“과연 질풍대군. 비상출구까지 찾아내고. 아니면…… 누가 알려준 건가?”
“뭐?”
공이걸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자, 애꾸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럼 슬슬 이야기를 풀어갑시다.”
“그 전에. 진소홍 생도를 확인해야겠다. 남궁천의 시체도.”
그러자 흑의 무인 하나가 미간을 팍 구기며 나섰다.
“우리를 못 믿는 거요?”
“뭐?”
부단주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애꾸가 손을 들어 수하를 제지하고는 말했다.
“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수하들이 좀 예민한 상태요. 갑시다. 안내해 드리겠소.”
부단주가 애꾸를 빤히 바라보다가 좀 전에 나섰던 수하를 노려보았다.
“너희들을 못 믿냐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너희들도 본 맹을 전적으로 믿진 않을 텐데? 서로가 필요에 의해서 이용하는 것일 뿐 아니던가? 애초에 이득이 없다면 신뢰도 없는 관계지.”
그러자 흑의 무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낀 부단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아무것도 아니오. 그 새파란 애송이는 생각보다 한 수가 있던 놈이라 좀 거칠게 대했소. 해서 시체가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오.”
“상관없어.”
“그럼 갑시다.”
애꾸가 통로 안쪽으로 턱짓을 하자, 부단주가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연 동굴의 느낌이 나던 통로가 조금씩 인위적으로 변하더니 이젠 완전히 사람의 손을 탄 복도로 바뀌었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어가니 저만치 천장이 무너져 내려 막혀 버린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는 시체 한 구가 널브러져 있었다.
‘남궁천인가……?’
눈을 가늘게 여민 부단주가 시신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건…… 남궁천이 아니잖아?’
대머리인 데다 체격부터가 다르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부단주가 애꾸를 돌아보았다.
“사상자가 있었나? 통로는 왜 막힌 거지? 이러면 비상출구로 갈 수는 있나? 그 전에 진소홍과 남궁천은?”
“하나씩 질문합시다.”
“진소홍과 남궁천!”
부단주가 일단 급한 문제부터 따져 물었다.
애꾸가 옆의 철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거기 안에.”
부단주가 급히 철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듣기 싫은 마찰음에 이어 철문 안쪽이 훤히 드러났다.
한데 그곳에 널브러져 있는 건 또 다른 흑의 무인뿐이었다.
“뭐야! 진소홍과 남궁……!”
부단주가 짜증스럽게 외치며 휙 돌아서는데 느닷없이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퍼억!
쿠당탕!
그대로 튕겨 날아간 공이걸이 벽에 부딪치면서 울컥 피를 토하는 순간,
파밧!
애꾸가 귀신처럼 날아들더니 검을 수직으로 베어 올렸다.
슈칵!
“끄아아아악!”
한 줄기 빛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비명이 차올랐다. 그리고 공이걸의 오른팔도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애꾸는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팔꿈치로 부단주의 뒷목을 찍었다.
퍽!
쿠당!
거친 소리와 함께 부단주가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꼬박꼬박 반말이야. 무림맹은 강호 예법 따윈 가르쳐 주지 않던가?”
시큰둥한 애꾸의 중얼거림에 이어 수하 한 명이 다가왔다.
“아무래도 놈들은 남궁천 생도를 정말 죽이길 바랐던 것 같군요. 이 상황이 놈들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진소홍을 빼간 것은 남궁천이라는 녀석의 독단 행동 같은데…… 확실히 청랑단주가 배신한 건 아닌 모양입니다.”
애꾸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똑같다. 우린 진소홍을 잃었고, 남궁천을 죽이지 못했다. 먼저 배신하진 않았으나, 지금부터는 배신을 하려고 할 터. 청랑단주는 필시 살인멸구를 시도할 것이다.”
“칫, 개 같은 것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 부단주 새끼를 인질로 잡아서 여길 빠져나가는 건 어떻습니까?”
애꾸가 피식 웃었다.
“우리 여섯 명이 부단주 하나를 인질로 잡고서 청랑단을 뚫는다? 질풍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천라지망까지 헤쳐 나가서?”
“……죄송합니다.”
수하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고 여겼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암담한 상황이다.
애꾸의 눈빛이 어둠 속으로 깊이 잠겨들었다. 그가 수하들 한 명 한 명을 돌아보았다.
“선택해라. 살고자 할 것인지, 죽을 것인지. 전자의 경우 운이 아주 좋다면 하나 정도는 희망이 있을 지도.”
수하들의 표정도 어둠에 잠겨들었다.
말이 좋아 하나 정도의 희망이지, 백중백 죽는다고 봐야 한다.
한마디로 헛된 희망에 가깝다.
마침 수하 하나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치며 비장하게 말했다.
“저는 혼자 살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수하들이 너도나도 죽음을 각오했다.
애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죽음은 정해진 운명. 목표는 청랑단주, 아니면 최대한의 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존명!”
수하들의 대답을 들으며 애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 * *
쉬이이잇! 쉬익!
검신이 허공을 누빈다.
일검에 공간이 갈라지고, 다시 뻗는 일검에 공기가 잘려 나간다.
짜르르릉! 꽝!
잘려 나간 공기가 치를 떨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휙! 휙휙, 샤아아악!
무림맹주 묵천악은 맹주전 후원에서 그렇게 바람이 되고, 벽력이 되고, 구름이 되는가 하면, 폭풍우가 되고, 태풍이 되었다.
언뜻 거칠어 보이지만 세심한 계산이 있었고, 난잡해 보였으나 정교했다.
그의 전신에서는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강맹한 기운이 흘러넘쳤다.
그가 익힌 파천진결(破天眞訣)의 특징이었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수고 쪼갤 것만 같은 검초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외감이 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파천진결을 기반으로 한 단천검법(斷天劍法)의 위력이다.
그렇게 얼마나 현기가 담긴 검초를 펼쳤을까?
변초나 허초가 비교적 적은 단천검법임에도 갖가지 상황에 맞게 응용하여 펼치다 보니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칠흑같은 어둠이 조금씩 물러나면서 동녘이 서서히 밝아왔다.
쉬이이이잇!
구름을 밟듯이 날아간 맹주가 어느 순간 후원 바위에 우뚝 서면서 동상처럼 멈춰 버렸다.
“후우우…….”
그가 긴 숨을 내쉬고는 검을 갈무리하더니 허공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천천히 내려왔다.
“오셨는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부름에 전각 쪽에서 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걸어왔다.
“이른 새벽부터 수련 중이셨군요.”
무림맹 총관이었다.
“나이가 드니 잠이 없어져.”
“아직 정정하십니다.”
“거 아부하고는. 그냥 나오지 그랬나?”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급한 일은 아닌 모양이로군.”
총관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남궁천 생도가 청랑단에 합류했다는 소식입니다.”
“남궁천이?”
“예. 그 외에 몇 생도가 더 있습니다만, 가장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그래서 어찌 되었나?”
“청랑단주가 근심하시지 않도록 조치하겠답니다.”
맹주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모용신이 그렇게 말했다는 건 생각해 둔 수가 있다는 뜻이리라.
이거 어쩌면 앓던 이가 저절로 빠질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번 일만 잘 해결이 된다면…….
“앓던 이를 뽑고 금니를 심겠구나.”
진소홍이 만금상회주의 딸이라는 걸 알고 나서 계획한 일들이었다.
이상적으로 해결된다면 무림맹은 앞으로 수십 년간 재정 걱정 없이 여유롭게 운영할 수 있을 터였다.
총관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잘 해결되겠지요. 모용 단주니까요.”
“그럴 테지. 일 하나는 확실히 하니.”
“그리고 무연회 일정에 관한 일입니다만.”
“말하게.”
“내일 비무 대회가 치러지는 날입니다. 어떻게 진행하는 게 좋을지 여쭙고자 합니다.”
“예정대로 진행하게.”
“예정대로…… 말입니까?”
맹주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총관이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 맹이 사파 나부랭이들의 술수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을 테지. 팔두마차가 돌부리에 걸렸다고 한들 넘지 못하겠는가? 이번 사건이 본 맹에는 그저 작은 돌부리에 지나지 않다는 걸 보여주어야 할 터.”
“알겠습니다. 하면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한 생도는…….”
“규정대로 하게.”
맹주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규정대로라면 실격이다.
행여나 남궁천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온다 해도 내일 비무 시간까지 도착하지 못한다면 그 명성도 불꽃처럼 사그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