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90화 (90/508)

90. 단절구간

무림 공적들이 유사시에 사용하는 도피처에는 두 가지 절대 원칙이 있다.

바로 비상출구를 만들어두는 것과 단절구간을 만들어두는 것.

단절구간이란 말 그대로 손쉽게 도피처를 무너뜨려서 추격자들을 막는 용도로 이용되는데, 지금 남궁천이 허문 기둥이 바로 그 단절구간 장치였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바닥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리는데도 진소홍은 깨어나지 않았다.

꽤나 독한 약을 먹인 모양이었다.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빛 한 줌 들지 않는 동혈 안이었지만, 진소홍의 소매 단추가 은은한 빛을 뿜고 있었기에 대략 주변을 살필 수는 있었다.

‘야명주를 다듬어서 단추로 만든 모양이군. 확실히 부잣집은 다르네.’

남궁천은 우선 묶인 밧줄을 풀어내고는 진소홍의 뺨을 한 대 후려쳤다.

짜악!

“…….”

짜악!

“으음……!”

짝!

“아파……!”

뺨을 세 대씩이나 맞고서야 진소홍이 간신히 의식을 차리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니 약 기운을 쉬이 떨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남궁천이 진소홍을 부축해서 돌려 앉혔다.

“정신 차리고 운공해. 집에 가야지. 아버지 기다리신다.”

“으음…… 졸려…….”

“또 맞고 싶으면 자든가?”

“너…… 두고 봐…….”

진소홍이 비몽사몽 와중에도 남궁천을 흘끔거렸다.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진소홍의 등에 양손을 갖다 댔다.

우우웅.

순간 웅혼한 기운이 남궁천의 손바닥을 타고 진소홍의 등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진소홍도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운기행공에 집중했다.

푸스스스……!

천장에서는 아직도 자잘한 진동이 남아서 흙 부스러기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진소홍이 뿜어낸 기운과 남궁천의 기운이 독맥에서 만나 백회혈을 지나 임맥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대주천을 끝낸 공력은 다시 십이경맥을 타고 흐르며 세맥을 정화해 갔다.

공력이 순조롭게 순환하기 시작하니 날숨에 탁기가 빠져나가고 들숨에 깨끗한 공기가 들어온다.

하나 그리 맑은 공기는 아니다.

이미 이곳이 한쪽 출입로가 막힌 지하 동혈이었기에 완전히 맑은 공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체내의 탁기를 몰아내는 것만으로도 약 기운을 상쇄할 수 있다.

“후우우우!”

긴 숨을 내쉰 진소홍이 마침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눈에 정광이 어렸다.

한참 동안 운기에만 집중하던 남궁천도 두 눈을 뜨고는 손을 거뒀다.

“좀 어때?”

“덕분에 몸이 가벼워졌어.”

진소홍이 슬쩍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벌써 목숨을 빚진 게 두 번째인가?

“고마워.”

“가자.”

남궁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소홍이 그 뒷모습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응.”

그녀는 묻지 않았다.

어째서 남궁천이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아버지가 부탁하셨겠지.’

지금쯤 자신이 납치당한 사실 때문에 무림맹이 발칵 뒤집어졌으리라.

하지만 아버지는 무림맹보다 남궁천을 믿었을 것이다. 이미 아버지가 남궁천을 바라보는 눈빛은 잠룡을 대하는 시선이었으니까.

또 다른 의미로도 아버지의 선택은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무림맹에 의존하셨다면 자신이 무사히 탈출한다 해도, 만금상회가 무림맹에 절대적으로 협조할 수밖에 없다.

빚을 진 이상 반드시 갚는 것이 아버지 성품이시기도 하고.

때문에 앞으로 무림맹이 무엇을 하든 천문학적인 돈을 지원해야만 하리라.

하나 남궁천은 그렇지 않다. 일개 생도일 뿐이다.

물론 딸을 잃은 마당에 아버지가 그런 사실까지 고려하진 않았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경제적인 이득도 취한 셈이다.

‘이 와중에도 이런 계산까지 하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상인의 피를 이었나 봐.’

진소홍은 그렇게 남궁천을 따라 한참을 이동하면서 대략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총 여덟 명의 복면인이 있었고, 그중 두 명이 죽었으며, 밖에는 청랑단과 질풍대가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그런데 어느 순간 뜻밖에도 통로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누가 보더라도 양쪽 갈림길 모두 인공적으로 만든 흔적이 역력했다.

“어디로 가지?”

진소홍이 묻자, 남궁천이 입매를 치켜 올렸다.

“이런 경우 한쪽은 비상출구로 사용되지. 여긴 보다시피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된 도피처야. 한마디로 도망치면서 급하게 만든 장소가 아니란 뜻이지.”

“응. 그건 알겠어.”

“무림맹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할 자들이 여기저기 안가를 마련하듯이 누군가 급할 때 숨으려고 만든 장소야. 보통 두꺼비집이라고도 부르고.”

“그렇구나.”

그런데 넌 이런 걸 왜 그렇게 잘 아는 건데?

진소홍이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남궁천은 계속 말을 이었다.

“두꺼비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언제든 허물 수 있기 때문. 그리고 무림 공적들 사이에선 두꺼비집에 반드시 출입로를 두 곳 이상 뚫어둔다는 게 불문율이야. 까딱하다간 외통수로 몰려 자멸할 수도 있으니.”

“그래서 한쪽이 비상출구란 말이네. 그럼 저쪽은? 함정이야?”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두꺼비집에 함정 따위를 만들 이유는 없어. 그럴 정성이면 한 걸음이라도 더 달아날 생각을 해야지. 도망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몇 놈 죽여 봐야 또 몇 놈이 보충되어서 따라붙을 뿐이니까.”

“그럼 뭐야?”

“탈출구.”

남궁천이 눈을 빛냈다.

여길 만든 녀석이 누군지는 몰라도 꽤나 치밀한 성격임이 분명했다.

진소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출구가 두 곳이란 말이야? 그럼?”

“그래. 하지만 한 곳은 진짜 탈출구고, 다른 한 곳은 비상 출입로라고 봐야 해.”

“출입로라면…… 밖에서도 들어올 수 있단 말이네.”

“그래.”

“다른 한 곳은 오로지 나갈 수만 있고.”

“그렇지. 이해가 빠르구나. 오랜 경험으로 봤을 때, 왼쪽이 출입로, 오른쪽이 탈출구다.”

오랜 경험이라기에는 네 나이가 좀 적다고 생각하지 않니?

하나 진소홍은 남궁천의 말뜻을 곧 이해할 수 있었다.

왼쪽 통로에 비해 오른쪽은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아예 없었기에.

진소홍이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왼쪽으로 가야겠네.”

“아니. 오른쪽으로 간다.”

“응? 왜? 출입로로 가야지 질풍대나 청랑단이 우릴 맞이하거나 도와줄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죽 쒀서 개 주기 싫어서.”

“뭘 쒀서…… 누굴…… 줘?”

“아무튼 그런 게 있어.”

말을 마친 남궁천이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소홍이 얼떨결에 따라가니 남궁천이 곧 갈림길 모퉁이에 설치된 나무 기둥을 벽라검으로 잘라냈다.

슈컥!

쿠그그그그긍!

아니나 다를까,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서 통로가 완전히 매몰됐다.

그 모습을 보니 진소홍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아무리 남궁천을 믿는다지만 막상 눈앞에서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길이 막히니 은근히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다.

“정말 탈출구가 있는 거지?”

“십중팔구.”

“그럼 십중일이는 없단 말이잖아?”

“상인답게 확률이 큰 쪽으로 운명을 걸어 봐. 이미 무너진 천장을 다시 돌릴 수도 없으니 말이야.”

남궁천이 태연히 말을 뱉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진소홍이 두 눈만 끔뻑이며 그런 남궁천의 등을 보았다.

‘아니, 무슨 애가 수십 년 도망만 다녀본 사람처럼 굴어?’

* * *

모용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부단주의 표정도 흠칫 떨렸고, 기감이 예민한 청랑단원들 역시 미간을 좁히고는 폭포수 안쪽을 돌아보았다.

생도들 중에서는 유현이 유일하게 반응을 보였다.

“방금…….”

유현이 폭포수 쪽을 돌아보자, 노심초사 기다리던 팽수혁이 얼른 다가왔다.

“왜? 뭐냐? 남궁천이냐? 어디? 안 보이는데?”

“무슨 소리가…….”

“무슨 소리가? 폭포 소리밖에 안 들리는데.”

확실히 폭포 주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리는 폭포 소리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하나 유현은 분명히 들었다.

그가 바위 위에 선 모용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단주님, 방금 폭음이 들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모용신은 대답 대신 미간을 좁힌 채 폭포수 안쪽만 빤히 보았다.

그도 분명히 들었다.

폭음은 아니지만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

‘설마 동혈이 무너질 리는 없을 텐데. 질풍대가 진입했나?’

하나 곧 고개를 저었다.

질풍대가 미치지 않고서야 독단 행동을 할 리가.

“알아볼 필요가 있겠군.”

모용신이 조용히 뇌까리자, 팽수혁이 얼른 나섰다.

“그럼 이번엔 절 보내주십시오! 제가 사정을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아니. 이번엔 부단주가 다녀오도록.”

“존명!”

그러자 팽수혁이 발끈해서 나섰다.

“아니, 왜 저는 안 됩니까? 남궁천은 보내셨잖아요!”

“네가 남궁천과 같나?”

“그런……!”

자존심이 팍 상하는 말에 팽수혁이 이맛살을 왕창 구겼다.

하나 모용신의 입장에서는 맹주에게 눈엣가시 같았던 남궁천만 제거하면 될 일이었다.

굳이 팽수혁까지 들여보내서 일이 커지도록 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거나 남궁천이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나쁘지 않은 징조다.

처리는 확실히 됐다는 뜻일 터.

“부단주,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진소홍이 무사한지 확인하도록. 가능하다면 진소홍을 구출하도록 하고.”

“존명!”

가장 좋은 상황은 놈들이 남궁천을 제거하고 진소홍만 남겨둔 채 도피처를 탈출하는 것이다.

물론 비상출구에는 질풍대가 있으니 탈출이 쉽진 않겠지만 그들을 물릴 핑계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굳이 살인멸구를 하는 것보단 그쪽이 서로 계산이 깔끔하겠지.’

폭포수를 바라보는 모용신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

* * *

“젠장!”

복면인 하나가 주먹으로 벽을 때리자, 쿵 소리와 함께 흙 부스러기가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애꾸는 한쪽 눈을 꿈틀거리며 막힌 벽을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지만, 대책부터 떠올려야 했다.

잡고 있어야 할 인질은 사라졌고, 죽여야 할 대상은 살아서 달아났다.

수하 하나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송이 녀석, 애초에 출구가 안쪽에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배신당한 것 같습니다!”

“생도라더니 사실은 청랑단원 아닐까요?”

그건 아니다.

애꾸는 남궁천을 알고 있었다.

이번 무연회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후기지수.

벌써 무한에서는 남궁천을 가리켜 신룡이라며 칭송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나 아무리 신룡이라도…….

‘그 급박한 상황에서 그토록 기민하면서 침착하게 대처한다고?’

무인은 타고난 자질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경험이다.

한데 남궁천은 강호 밑바닥을 수십 년 굴러본 사람처럼 행동했다.

단박에 자신을 수장으로 알아보았고, 단절구간과 비상출구까지 간파했다. 인질을 거래할 줄도 알았고, 자신들이 어떻게 대응할지도 알았다.

명문세가를 등에 업고 겉멋만 부리는 무인이 아니라, 정말 온갖 험난한 일을 다 겪어본 실전 고수 같았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그럴 리가!

무림맹에서 특훈을 받지 않고서야.

‘이 개 같은 것들이…… 감히 우리를 배신해?’

예정에 없던 생도 투입에서 낌새를 알아챘어야 했다.

갑자기 생도 하나를 죽여달라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야 했건만.

수하 하나가 애꾸에게 다가와 말했다.

“놈들이 우릴 살인멸구하려는 수작이 분명합니다. 진소홍은 되찾았으니, 더 이상 우릴 살려둘 이유가 없을 겁니다.”

애꾸의 눈이 번뜩였다.

“살인멸구? 감히 누굴 살인멸구 한단 말인가? 놈들이…….”

그때 또 다른 수하 하나가 달려와 서신을 내밀었다.

“청랑단이 보낸 겁니다.”

애꾸가 빼앗듯이 받아 든 서신에는 부단주가 협상을 위해 들어오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애꾸의 한쪽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이게 뭔 개수작이지?”

“혹시 녀석들도 이 상황을 짐작 못 한 건 아닐까요?”

“생도가 독단으로 저지른 짓이다?”

“좀…… 억측일까요?”

애꾸가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똑같다. 우리가 진소홍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되면 놈들은 살인멸구를 시도할 것이다.”

“……!”

“그러니 우린 여전히 진소홍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알겠습니다.”

“그리고 청랑단 부단주가 들어오면…… 우리가 고분고분 죽어주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야겠지.”

애꾸의 한쪽 눈이 모종의 독기를 뿜자, 다른 수하들도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꾸가 스산한 음성을 흘렸다.

“먼 길을 갈수록 길동무는 많을수록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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