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단절구간
쒸에에엑, 콱!
어둠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이 물가의 바위에 박혔다.
그것만 보아도 화살을 쏜 자가 얼마나 심후한 내력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질풍대원이 재빨리 달려가서 화살대에 묶인 서신을 확인했다.
그가 얼른 달려와 모용신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협상에 응하겠답니다!”
“잘됐군.”
모용신의 대답에 남궁천이 바위 위로 훌쩍 올라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초립표가 긴장한 표정으로 불렀다.
“……?”
“조심해라. 미리 언질을 해두었다지만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는 놈들이다. 여차하면 달아날 생각을 해라. 네가 달아난다고 해서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궁천이 초립표를 물끄러미 보았다.
두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다.
이 정도로 걱정해 주는 걸 보면 적어도 맹주에게 물들지 않은 인간일 터.
아마 녀석들의 내통자일 리도 없으리라.
‘하나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은 탓할 것도 같은데?’
남궁천이 희미한 웃음을 띠고는 모용신을 슬쩍 보았다.
모용신은 속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가 적과 내통하는 자인지 어떤지는 모르나, 적어도 남궁천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남궁천이 속내를 갈무리하고는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알겠습니다. 여차하면 빠져나오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조심해라.”
초립표의 당부를 뒤로하고는 남궁천이 훌쩍 몸을 날렸다.
타타탓!
그가 수상비를 펼치면서 물웅덩이를 지나 폭포수 안쪽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초립표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경공 하나만큼은 엄청난 녀석이군. 질풍대에 들어오면 좋을 텐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에 뒤에 서 있던 팽수혁이 코웃음을 쳤다.
“저 녀석이 경공만 뛰어난 줄 아십니까? 솔직히 질풍대에서 썩기엔 아까운 녀석이죠.”
“뭐, 인마? 질풍대에서 썩긴 왜 썩어? 본 대에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인 녀석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린놈이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초립표가 잔뜩 성을 내며 으르렁대자 팽수혁이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고는 돌아섰다.
“저, 저……!”
초립표가 길길이 날뛰는 걸 부대주가 얼른 말렸다.
“진정하시죠, 대주. 뭐, 저 녀석 말대로 남궁천은 본 대가 거두기에는 너무 큰 녀석일지도 모르잖아요.”
“너까지 왜 이래?”
“솔직히 대주님도 느끼시잖습니까? 저 녀석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걸.”
“끄음.”
초립표가 부대주의 눈길을 따라 폭포수 안쪽을 보았다.
확실히 남궁천이 보통은 아니지.
‘저런 녀석이 도대체 어쩌다 용천관 공식 호구라는 별명이 붙은 거야?’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그래서 더 흥미를 끌기도 했다.
자고로 강호 영웅이라면 평범한 이야기를 거부하는 법 아니겠나?
‘그래도…… 이번엔 무리하지 마라. 평범한 이야기라도 좋으니. 내 앞에서 새파란 생도가 죽는 꼴은 못 보겠다.’
초립표가 주먹을 꾹 말아 쥐는데 마침 질풍대원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대주, 비상출구로 보이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 말에 모용신과 생도들이 다가왔다.
주연화가 불쑥 나서며 물었다.
“비상출구라뇨?”
“이곳은 남궁천 말대로 급조해서 만들어진 도피처가 아니다. 한마디로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도피처란 말이지. 그건 곧 또 비상시에 사용할 또 다른 출구가 있다는 뜻과 동일하지.”
“아……!”
주연화는 물론 유현과 팽수혁도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질풍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자는 절대로 스스로를 외통수로 몰아넣지 않는다는 습성에 대해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세 명의 생도는 아직 입맹하진 않았지만, 무림맹 조직의 이런 전문성을 보면서 괜히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초립표가 수하에게 물었다.
“신호탄으로 확인 가능한 곳인가?”
“예, 대주.”
그러자 초립표가 모용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본 대가 비상출구 쪽을 맡겠습니다. 신호탄을 확인하면 진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모용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초립표가 수하들을 이끌고 몸을 날렸다.
그 뒷모습을 보던 모용신이 다시 바위에 올라서서 폭포수 안쪽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 그럼 조금 더 기다려 볼까?’
어딘지 다른 기대를 품은 모용신의 입매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 * *
폭포수를 뚫고 바람처럼 달려든 남궁천은 숨겨져 있던 동혈 입구로 몸을 밀어 넣었다.
후우우웅!
한 차례 내기를 방출하면서 젖은 장삼을 말리자, 곧 전신에서 훈기가 돌면서 옷자락이 뽀송뽀송해졌다.
통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제법 너른 공동에 흑의 복면인들이 모여 있었다.
“정말 왔군.”
대머리 복면인이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뱉었다.
동시에 다른 복면인 둘이 스윽 나타나더니 출입로를 막아 버렸다.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복면인들을 차례로 훑었다.
‘저 애꾸가 두목이군.’
남궁천은 단박에 우두머리를 파악했다.
이 역시 전생의 경험으로 인한 직감이었다. 애꾸가 두목이 아니라면 최소한 가장 경험이 많거나 무공이 심후한 자임은 틀림없다.
추리법은 단순하다.
자신이 들어왔을 때, 복면인들은 모두 동요하는 눈치였다.
정말로 어린 생도가 등장했다는 것에 놀란 반응들이었으니까.
어딘지 안심하는 자들, 가소롭다는 자들, 황당하다는 반응까지.
하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동요도 없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애꾸의 사내.
‘뭐, 눈알이 하나밖에 없어서 티가 덜 나는 걸 수도 있지만.’
뿐만 아니라 갈무리한 기도가 나름 예사롭지 않다.
‘저 대머리가 부두목이겠군.’
남궁천은 짐짓 모른 척하며 애꾸를 무시하곤 대머리를 보며 천진하게 물었다.
“아저씨는 대머리면서 복면을 하셨네요.”
“뭐?”
“아, 왠지 가발도 써야 신분을 확실히 감출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니, 뭐 이런 새끼가…….”
대머리 복면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다른 복면인들이 키들거리며 웃었다.
하나 대머리는 곧 차분한 인상으로 돌아오더니 입매를 말아 올렸다.
“확실히 보통 녀석은 아니구나. 그래, 바깥에 계신 고명한 나리들께선 뭐 하러 너 같은 피라미를 여기에 들여보내셨느냐?”
“아저씨들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오더군요.”
“우리가 원하는 것?”
“예, 돈이든, 무공비서든, 기문병기든…… 뭐 그런 것 아닐까요?”
남궁천이 일부러 더욱 천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복면인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개중에는 남궁천을 딱하게 보는 듯한 시선도 있었다.
대머리가 침음을 흘리고는 중얼거렸다.
“원하는 것이란 말이지…….”
그가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이다가 유난히 체격이 큰 복면인에게 눈짓을 했다.
“네가 저 아이에게 우리가 뭘 원하는지 알려줘라.”
“예, 형님.”
거구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남궁천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꼬마야, 우리가 원하는 건 말이다…….”
거구가 커다란 손으로 남궁천의 어깨를 둘렀다.
“멈춰!”
그 순간 애꾸가 소리쳤지만, 이미 남궁천은 거구의 단전에서 일어나는 한 줄기 공력을 확인했다.
암갈색의 기운.
목계(木系)다.
공력은 거구의 수양명대장경을 따라 치달리기 시작했다.
창졸지간 남궁천은 금계의 기운을 운용하는 것과 동시에 재빨리 상대의 곡지혈(曲池穴)을 엄지로 가격했다.
빡!
“아악!”
팔이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거구의 팔꿈치 아래가 힘을 잃고 덜렁거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복면인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흠칫거렸다.
그러는 사이 남궁천이 거구의 어깨를 꺾어 잡으며 등 뒤로 돌아서더니 가차 없이 벽라검으로 목을 그어 버렸다.
슈칵!
츄아아아아!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상대가 생도라고 방심하던 복면인들은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넋이 나갔다가 곧 치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저 새끼 죽여!”
남궁천이 곧장 거구를 발로 걷어차자, 달려들던 복면인들이 얼른 시체를 받아냈다.
그 틈을 타서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리더니 대머리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꾸라지 같은 노오옴!”
대머리가 격정적으로 칼을 휘둘렀지만, 남궁천이 몸을 낮게 숙이며 피했다.
슈캉!
허공을 가른 칼이 통로 벽에 박혀들자, 남궁천이 팔꿈치로 대머리의 명치를 찍었다.
퍽!
“끄억!”
파밧!
순식간에 대머리 뒤로 돌아선 남궁천이 벽라검을 목 언저리에 가져갔다.
“다들 동작 그만.”
남궁천에게 달려들던 복면인들이 멈칫하고는 눈을 이글거렸다.
“이 쥐새끼 같은 놈……!”
대머리가 으르렁거렸지만, 차가운 검신이 목을 더 바짝 조여올 뿐이었다.
“쉿. 말은 내가 한다.”
“……!”
“내 친구 어디 있어?”
남궁천의 질문에 애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법이군. 놀라워. 생도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실력이야. 한데 이래 봐야 좋을 게 없어. 네 친구를 찾아도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겠나?”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고.”
“그 여자아이라면 저기 안쪽에 있다.”
애꾸가 턱짓으로 남궁천 뒤쪽 통로를 가리켰다.
남궁천이 대머리에게 검을 겨눈 채로 천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럼 가지. 친구 찾으러.”
“그러지.”
애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애새끼를 보낸다더니…… 웬 괴물을 집어 던졌군.’
서신 탓을 했지만 자신의 명백한 실수다.
애초에 상대가 너무 어린 생도라 방심한 탓이다.
게다가…….
‘내가 수장이라는 걸 알고 있군.’
놀랍다.
강호 경험이라곤 거의 없을 텐데, 재빨리 위기를 타파하더니 이젠 인질을 잡고 자신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처음부터 알면서도 천진한 척 굴었다는 증거다.
‘여기까지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행동만 봐도 놀랄 일인데, 여기서 더 영민하게 군다면…….
일이 조금 꼬여 버릴지도.
불안감을 억누르고 차근차근 걸음을 옮기다 보니 마침내 진소홍이 갇힌 문 앞까지 다다랐다.
“거기다.”
애꾸가 턱짓으로 철문을 가리키자, 남궁천이 어림없다는 듯 웃으며 턱짓했다.
“그럼 가서 데려와야지.”
확실히 영민한 아이다. 아니, 영악하다.
적어도 자신들이 그 여자아이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사정이라는 걸 잘 이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애꾸가 고갯짓을 하자 수하 하나가 영 못마땅한 표정으로 철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진소홍을 끌고 나왔다.
몸이 축 늘어져 있는 걸로 보아서는 의식이 없는 듯했다.
남궁천이 턱짓을 했다.
“이쪽으로.”
애꾸가 다시 고갯짓을 하자, 수하가 진소홍을 던지듯 보내주었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에 진소홍이 그대로 남궁천 앞에 고꾸라졌다.
이걸로 남궁천은 깨달았다.
“역시 모용 단주가 내통자였나?”
찰나 애꾸의 한쪽 눈알이 거칠게 흔들렸다. 내내 차분한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듯했다. 그 반응이 남궁천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애꾸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소홍을 순순히 건네준 건, 역시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날 죽이겠다는 심산이겠지. 안 그랬으면 고분고분 보내줄 리가 없으니 말이야.”
“……!”
“그런데 이거 어쩌나? 내가 이런 도피처 구조를 빠삭하게 알고 있거든. 여기에 단절구간이 있다는 것도.”
“너……!”
찰나, 남궁천이 벽라검으로 대머리의 목을 그어 버리고는 발로 걷어찼다.
“커억!”
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뿌리는 대머리가 앞으로 엎어지자, 애꾸를 비롯한 복면인들이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죽엇!”
하나 남궁천은 한쪽 입매를 비틀며 측벽에 세워진 나무 기둥을 검기로 잘라냈다.
쿠그그그긍! 쾅쾅!
그 순간 거짓말처럼 천장이 무너지면서, 커다란 바윗덩이가 통로를 메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