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금력을 차지하는 자
“넌 그걸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냐?”
모두가 궁금할 질문을 초립표가 물어보았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용천관 공식 호구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습니까? 하루 종일 서고에 처박혀서 책이나 보는 거죠. 그렇게 흥미를 끄는 게 있으면 주야장천 파고들다 보니 이렇게 되던데요?”
“그런…….”
초립표가 입을 척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빨리 알아챈다고?
미심쩍은 부분이 없는 건 아니나,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믿을 수밖에.
거기에 팽수혁이 불쑥 나서서 다그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저기에 지금 금왕의 딸이 사로잡혀 있다면서요? 어서 남궁천 말대로 진짜 출입로부터 확인해야 할 것 아닙니까?”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초립표는 일단 의문을 거두고 질풍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질풍대원들이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남궁천이 지적했던 부분들을 자르거나 옮기는 등 변화를 주었다.
놀랍게도 주변의 지형지물이 변하자 폭포수 주변의 광경 또한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이를 생생하게 지켜본 유현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놀랍구나. 정말 놀라워.”
“그러게요. 착시 현상이 이렇게 극심할 줄은 몰랐어요.”
“만약 여기 제갈기 생도가 있었다면 그 원리까지 다 이해시켜 주었을 것 같은데. 그게 아쉽다.”
“사형은 이 와중에도 배울 생각만 하나요?”
“무인에게 지식이란 곧 목숨 줄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의미에서 남궁천 생도는 정말이지…….”
“어디에다 던져놔도 살아날 사람처럼 보이네요.”
주연화의 말에 유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딱 그대로였다.
아무리 극악한 환경에 빠졌어도 왠지 남궁천만 함께 있다면 길이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진정한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신뢰를 주는 사람.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
보기만 해도 든든한 사람.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역시 강호는 참 넓어.’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폭포수 주변의 경광은 완전히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딘지 이전과 닮았으면서도 마치 다른 장소에 온 듯한 이질감.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폭포수 안쪽에 드러난 또 다른 동굴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처럼 정면에만 동굴이 있는 게 아니라, 우측에 또 다른 동굴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남궁천 생도 말대로 다른 동굴이 나타났습니다.”
초립표의 보고에 모용신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이군. 손도 대지 않고 코 푸는 줄 알았더니.’
그가 남궁천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 말대로 진짜 도피처가 나타났으니 이제 들어갈 생각이 있나?”
“단주님!”
순간 초립표가 놀라서 말렸다.
지금까지는 청랑단주가 그저 생도들에게 겁을 줘서 경거망동하지 못하게만 하려는 줄 알았다.
한데 다시 보니 모용신의 표정에서 진심이 뚝뚝 묻어져 나오는 것 아닌가?
모용신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초립표를 돌아보았다.
“왜?”
“진심이십니까?”
“농담처럼 보였나?”
“단주님, 생도를 보내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자네도 보지 않았나? 남궁천은 예선 일 위를 기록한 생도일세. 여차하면 경공술로 나오면 될 테지. 그렇지 않은가? 남궁천?”
“단주님! 너무 무모합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남궁천이 대답도 하기 전에 초립표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나 모용신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서 뜻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언젠간 실전을 치러야 할 생도들이야. 본인이 기꺼이 따라오겠다고 했어.”
“하지만 놈들은 인질까지 잡고 있는…….”
“가겠습니다.”
순간 남궁천이 나서자, 초립표가 험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너는 물러나 있어라!”
“질풍대주.”
모용신이 딱딱한 음성으로 다그치자, 초립표가 고개를 숙이며 깍듯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단주님. 아무리 그래도 아직은 어린 생도입니다. 좀 더 경험을 쌓은 후에 일을 맡기는 것이…….”
“항명할 생각인가?”
“그럴 리가!”
“하면 잠자코 물러나 있게. 본인이 들어간다고 하지 않나?”
순간 모용신과 눈이 마주친 초립표는 움찔거렸다.
항거할 수 없게 만드는 눈빛과 목소리.
‘설마 모용 단주님은 처음부터 이걸 노리신……? 어째서?’
초립표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모용신과 남궁천을 번갈아 보았다.
모용신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남궁천은 당장 질풍대원으로 발탁되어도 무관할 정도의 재능이 있어. 게다가 지금은 생도의 신분이지. 놈들이 안심하고 협상을 해오기 딱 좋은 신분이란 말일세.”
“아…….”
“물론 그냥 보내진 않을 것이야. 내가 서신 한 통을 안으로 날려 보낼 생각이네. 위험할 수도 있으나, 가장 좋은 효과를 거둘 사람이지.”
‘위험할 수는 있으나, 가장 좋은 효과라.’
초립표가 마지막 말을 곱씹다가 꿈틀거리고는 모용신을 보았다.
모용신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설마…… 남궁천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하고 계신 건가?’
만약 남궁천이 협상을 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사망이라도 하면?
그렇잖아도 최근 무연맹을 통해 신룡의 탄생이라며 주목받는 남궁천이다.
한데 이렇게 어이없게 죽는다면 필시 강호에는 그 추모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지리라.
‘그건 다시 한번 무림맹으로 결속하는 계기가 되겠지.’
명분을 좋아하는 정도 문파에서 이만한 명분이 또 어디에 있겠나?
정말 여기까지 생각한 것이라면…….
‘청랑단주는 정말 무서운 자가 아닌가?’
초립표가 씁쓸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사이, 남궁천이 쐐기를 박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더 이상 말리지 마십시오.”
“말릴 사람 없다. 단, 내가 서신을 보낸 후에 들어가도록 해라. 무작정 들어가는 것보단 그 편이 훨씬 안전할 테니.”
모용신의 냉랭한 대답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네가 할 일은 아주 간단하다. 놈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오도록. 그거면 된다. 정말 영웅 행세할 생각은 말고.”
“그러지요.”
남궁천의 대답에 모용신이 초립표를 힐끔 보았다.
초립표도 더 이상은 말릴 수 없었다.
모용신이 휘적휘적 걸어가더니 한쪽 구석에서 부단주가 가져다 준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이후 종이를 차곡차곡 접어 화살에 매단 후 바위 위로 성큼 올라서더니 시위를 당겼다.
패애앵!
쒸이이익!
순간 서신을 매단 화살이 어둠 속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폭포수를 뚫은 화살은 그대로 우측의 동굴 출입로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모용신이 돌아서며 희미하게 웃었다.
“우선 답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 * *
대머리 사내가 어둑한 동혈 통로를 따라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가 걷는 통로는 마치 천연동굴처럼 자연스럽게 보였다.
하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분명히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곳곳에 드러났다.
그 인위적인 흔적이 점점 강해져서 나중에는 천연동굴의 느낌이 거의 사라졌을 때, 남자가 통로 옆으로 난 철문 앞에 멈춰 섰다.
끼이익, 철컹!
철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그 안에 밧줄에 꽁꽁 묶인 여인이 몸부림을 쳤다.
당장에라도 대머리를 죽이겠다는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온몸이 묶인 그녀로서는 아무런 수도 쓸 수 없었다.
대머리가 다가가서 여인의 재갈을 풀자, 주근깨가 빼곡한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그녀는 바로 진소홍이었다.
“마셔라.”
대머리가 무뚝뚝한 음성으로 수통을 내밀자, 진소홍이 차갑게 노려보더니 수통 주둥이로 입을 가져가 꿀꺽꿀꺽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대머리가 입매를 살짝 비틀었다.
“똑똑하구나. 그래, 괜히 성질 부려봐야 득 될 게 없지. 이성적으로 행동해야지.”
“당신들 누구야? 원하는 게 뭐지?”
대머리가 진소홍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매를 틀었다.
“마치 말만 하면 뭐든 다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어떨지 얘기는 해봐야 하지 않을까?”
“후후. 누가 금왕의 딸이 아니랄까 봐. 제법 협상의 기질이 있다는 건가?”
대머리의 반응에 진소홍이 흠칫거렸다.
내가 금왕의 딸이라는 걸 안다고?
뭐, 무연회 기간에 눈치를 챈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특히 눈썰미 좋은 무인들이라면.
문제는 그걸 알고도 이토록 과감한 짓을 했다는 거다.
둘 중 하나.
이들이 천지분간 못하는 멍청이들이거나, 정말 크고 무서운 배후가 있거나.
‘어느 쪽이든 좋지 않아.’
최악의 상황.
한데 대머리의 태도로 봐서는 멍청이 같지만은 않다.
대머리가 어딘지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을 것 같겠지만, 금왕도 뭐든 다 이룰 수가 없는 법. 당장 지금 제 자식조차 찾지 못하는 것처럼.”
“웃긴 소리. 내게 물까지 주면서 살려두는 이유는 결국 내 신분을 이용할 생각일 텐데?”
“과연 똑똑하구나. 확실히 영민해.”
“그럼 말해봐. 너희가 원하는…….”
짜악!
순간 진소홍의 뺨이 휙 돌아갔다.
대머리가 진소홍의 머리채를 콱 움켜쥐었다.
“하나 건방지군. 말했다시피 네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건 없어.”
말을 마친 대머리가 다시 진소홍의 입에 재갈을 물리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진소홍이 신음과 함께 몸부림을 쳤지만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공력을 사용해도 끊기가 힘든 특수 제작된 밧줄임이 틀림없으리라.
대머리가 철문을 나서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좋은 꿈 꾸도록.”
“……!”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소홍이 흠칫거리더니 이내 눈을 스르르 감으며 잠들어 버렸다.
대머리가 철문을 닫아걸고는 다시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점점 천연동굴 느낌이 나면서 제법 너른 공동에 도착하자, 그와 마찬가지로 흑의 경장 차림 무인들이 꽤 여럿 모여 있었다.
그를 포함해 모두 여덟 명.
그중 한쪽 구석에서 검을 갈던 애꾸의 사내가 대머리를 힐끔 보며 물었다.
“마시더냐?”
“예.”
“똑똑한 아이군.”
애꾸가 더는 말하지 않고 다시 검을 갈기 시작했다.
스르릉. 스르릉.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매끄럽게 갈리는 검신만이 나직한 울음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묵묵히 검을 갈았을까?
쒸에에엑!
순간 허공을 가르며 화살 한 자루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슈칵!
순식간에 허공으로 솟구친 애꾸의 검이 화살을 그대로 두 동강 내버렸다.
화살촉 부위는 천장으로 솟구쳐서 박혔고, 꼬리 쪽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마침 천장에 박힌 화살대에서 서신 한 장이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아래로 툭 떨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서신으로 향했다.
애꾸는 놀란 눈치도 없이 서신을 꺼내 펼쳐 들었다.
한동안 글을 읽은 그가 피식 냉소를 짓더니 삼매진화의 수법으로 서신을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마침 대머리가 다가오며 물었다.
“뭐랍니까?”
애꾸의 표정이 묘하게 비틀렸다.
“꼬맹이 하나가 들어오면 죽여 버리라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