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금력을 차지하는 자
남궁천이 청랑단에 합류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드넓은 목란산에서 진소홍을 찾는 일이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때문에 추격 전문가로 구성된 질풍대가 입수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이었다.
확실히 질풍대의 추격 솜씨는 남달랐다.
나뭇가지가 꺾인 방향, 미세하게 남은 발자국이나 칼자국, 동물들의 흔적까지 유추해서 목표물의 행적을 알아낸다.
남궁천은 그들의 추격 솜씨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면서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러니 내가 전생에 그리 죽어라 도망쳐도 악착같이 따라붙었지.’
정말이지 징글징글한 놈들이다.
짐승의 흔적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 또한 단서다.
오죽하면 질풍대에게는 스치는 바람조차 단서라는 말이 나올까?
특정 장소에서 잠시만 멈춰도 수십 가지의 단서를 찾아내어 대화하는 이들이었다.
“목란산에 머물고 있는 건 확실한가?”
“예, 천라단(天羅團)이 목란산을 포위했으니 틀림없습니다.”
초립표의 대답에 모용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팽수혁이 혀를 내둘렀다.
“천라단까지 나섰다니. 이거 생각보다 규모가 큰 실전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더욱 민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화야, 너도 신중히 움직이도록 해라.”
“네, 사형.”
유현과 주연화가 다부진 표정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질풍대가 무림맹 대표 추격대라면, 천라단은 적을 가두거나 감시하는 전문 집단이었다. 그들이 펼치는 천라지망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말이 떠돈다.
‘물론, 이 몸은 몇 번 빠져나간 적 있지만.’
하나 남궁천 역시 전생에 천라지망을 몸 성히 빠져나간 적이 없다.
“그나저나 천라단까지 나설 줄이야. 무림맹도 꽤나 진심이네. 생도 하나 납치당한 건 신경도 안 쓸 줄 알았는데.”
“평범한 생도가 아니니까.”
남궁천의 말에 팽수혁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다.
“엉? 평범하지 않으면? 세상에 진소홍처럼 평범함의 대명사가 또 있어?”
“외모를 평범하게 꾸미긴 했어도 역시 금왕의 딸이라는 신분은 결코 평범하지 않지.”
“…….”
순간 팽수혁이 돌처럼 굳었다. 옆에 선 주연화도 입을 딱 벌린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마치 두 사람이 합창을 하듯 크게 소리쳤다.
“뭐라고오옷!”
“뭐라고요옷!”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꽤나 떨어져서 사태를 관망하던 청랑단원들도 인상을 찌푸리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두 사람이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는 남궁천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금왕의 딸이라니! 누가? 설마 진소홍이 금왕의 딸이라고? 강남제일부자 금왕? 만금진인 금왕?”
“정말인가요? 그 언니가 만금상회주 딸이라고요? 진짜요?”
오히려 남궁천이 황당한 표정으로 보자, 주연화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유현을 돌아보았다.
“사형! 사형은 왜 안 놀라요?”
“음? 그게 놀랄 일인가? 다들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에엑! 어째서요?”
“금왕이 아무 연고도 없는데 무연회에 참관할 일이 없지 않느냐? 게다가 지금까지 모든 비무를 다 관찰했고. 하루면 모르겠지만.”
“그, 그래도!”
“귀빈석도 아닌 일반석에서 일부러 관람을 했다는 건 역시 지켜보고 싶은 생도가 있다는 뜻일 테고, 그게 누군지 정도는 금왕의 표정만 잘 살펴도 보이지 않느냐?”
“그, 그럴 수가. 나는 뭘 본 거지? 왜 그냥 금왕이 구경 온 줄만 알았던 거지?”
“하하, 금왕이 너처럼 할 일 없는 사람이더냐?”
주연화가 왠지 모를 자괴감에 머리를 감싸 쥐자, 유현이 어깨를 다독였다.
“화야, 사람을 잘 관찰하는 것도 무인에겐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그리 둔해서야…… 쯧쯧.”
“치이, 사형 너무해요. 저만 모른 것도 아닌걸요. 안 그래요? 팽 소협?”
“나는 이미 알고 있었소. 주 소저.”
팽수혁이 더없이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온갖 근엄을 다 끌어모아 말을 이었다.
“단지 주 소저 혼자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면 너무 민망할까 봐…… 뭐 그런…… 반응을 보인 거라오.”
“아, 네에. 네에.”
“정말이오!”
“그렇다고 하죠.”
주연화가 깊은 배신감을 느끼며 얼버무리는데, 마침 먼발치에서 질풍대원 한 명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그가 곧 초립표와 모용신 앞으로 날아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위치를 좁혔습니다!”
“어디냐?”
“북동쪽으로 십이 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곳입니다.”
“앞장서라.”
“존명!”
곧 질풍대원들과 청랑단원들이 일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주연화가 어딘지 멍한 팽수혁을 불렀다.
“팽 소협? 뭐 해요? 안 움직이고.”
“아? 아, 갈 거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팽수혁이 일행의 뒤를 쫓았다.
그는 여전히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맙소사, 진소홍이 금왕의 딸이었다니…… 이거 생각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잖아?”
그나저나 진소홍을 다시 보면 예전처럼 평범하게 대할 수는 있을까?
‘아니, 근데 왜 금왕의 딸이 용천관에 들어온 거지? 얼마든지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의문만 자꾸 커져가는 팽수혁이었다.
* * *
“흔적이 여기서부터 끊어졌습니다.”
질풍대원의 보고에 초립표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느 추격대가 도망자의 흔적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난관에 봉착했다는 뜻이다.
하나 질풍대의 경우는 다르다.
더 이상 흔적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곧 마지막 흔적으로부터 반경 백여 장 이내에 적이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질풍대가 찾지 못할 흔적이란 없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는 것이다.
“의심되는 곳은?”
“북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시면 폭포가 있습니다.”
“가지.”
질풍대와 청랑단이 이동한 곳에는 과연 폭포 한 줄기가 절벽에서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는데, 물웅덩이 주변으로는 거의 절벽처럼 둘러져 있어서 접근하기가 꽤 까다로운 지형이었다.
“저기군.”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선 청랑단주 모용신이 폭포를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어두운 밤인 데다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때문에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폭포수 안쪽으로 시커먼 동혈이 힐끔 드러나 보였다.
모용신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청랑단원들이 일제히 폭포를 포위하듯 위치를 잡으며 경계를 강화했다.
그중에서도 청랑단 제사대는 석궁에 화살을 재워 당장에라도 쏴 버릴 듯 기도를 날카롭게 다듬었다.
청랑단은 모두 네 개의 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사대가 궁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제법 흐르자 지켜만 보던 팽수혁이 답답해서 불쑥 나섰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켜만 볼 겁니까? 그 쥐새끼 같은 놈들이 숨은 곳을 알아냈으니 당장 덮쳐야지요!”
“모르는 소리. 상대는 인질을 잡고 있다. 놈들을 잡는 것보다 인질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모용신의 냉랭한 대답에 팽수혁이 씨근거리며 대꾸했다.
“그건 그렇지만 마냥 이렇게 죽치고 기다릴 순 없지 않습니까?”
“흐음…….”
모용신이 침음을 흘리더니 한쪽 구석에 선 남궁천에게 힐끔 시선을 던졌다.
남궁천은 주변의 지형지물을 찬찬히 살피는 중이었다.
모용신이 입매를 슬쩍 말아 올리더니 남궁천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어떤가? 자네가 들어가 보겠나?”
남궁천이 고개를 돌리고 모용신을 보았다.
그러자 팽수혁이 발끈해서 나섰다.
“아니, 왜 말을 꺼낸 건 전데 기회는 저 녀석에게 가는 겁니까?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놈들이 어쩌고 있는지! 아니, 들어간 김에 모조리 잡아오겠습니다!”
“나는 지금 예선전에서 압도적으로 일 위를 기록한 남궁천 생도에게 말하고 있는 걸세.”
모용신이 어딘지 살벌한 시선을 보내자, 팽수혁도 더는 대들지 못하고 혀를 찼다.
자존심이 팍 상하는 말이지만, 남궁천이 예선전에서 압도적 일 위를 기록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모용신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어떤가? 그리 영웅이 되고 싶어 했으니, 내가 기회를 만들어주지. 자네가 들어가 보겠나?”
“왜 제게?”
“그야 자네가 생도들 중 경공도 가장 뛰어나지 않은가? 초 대주에게 듣기론 경공 하나만큼은 웬만한 질풍대원들보다도 빠르다던데. 여차하면 달아나기도 좋고 말일세.”
한데 남궁천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싫어요.”
“음? 어째서?”
당연히 가겠다고 나설 줄 알았던 모용신이 미간을 좁혔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죽기 싫어서죠.”
“죽기 싫다? 저길 들어가면 죽을까 봐 겁이 나는 건가?”
“하하. 모르셨나 본데 이 녀석이 원래 이렇습니다. 그러니 잠입 임무는 제게 맡기시지요. 어차피 우르르 몰려 들어가면 들키기도 쉬우니 한 명만 보내시려는 것 아닙니까? 저도 경공이 나름 향상되어서…….”
팽수혁이 열심히 떠들었지만, 모용신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당연히 함정이니까요.”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팽수혁이 움찔거렸다.
“함정……? 함정이라고?”
“왜 함정이라고 생각하느냐?”
다시 모용신이 묻자, 남궁천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도망자 인생이 몇십 년인데 이런 단순한 속임수에 넘어갈까?
폭포수에 출입로가 가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어두워서 그렇고 낮엔 비교적 잘 보이는 위치다.
이런 경우 대체로 저런 동굴은 진짜 도피처가 아니라 함정으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적을 잡겠다며 우르르 달려 들어갔다간 뒤통수를 얻어맞기 딱 좋단 말이다.
‘대신 진짜 도피처로 만든 동굴은 따로 있지.’
음지에서 생활하는 자들의 특징이 항상 대비책을 세워놓는다는 점이다.
남궁천은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딘지 자연스럽지 못한 광경.
언뜻 알기 힘들지만 묘하게 자연의 어그러짐.
육감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이건 숱한 경험을 쌓아 자연히 습득하게 된 관찰력에 더 가깝다.
“저기.”
남궁천이 불쑥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폭포수가 흐르는 왼편으로 기울어진 나무였다.
“폭포 쪽으로 뻗은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죠?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주 미묘한 차이.
많이 부러진 것은 아니다. 정말 가느다란 잔가지 몇 개가 부러져 있었는데, 어지간한 안력으로는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
초립표가 고개를 저었다.
“훌륭한 관찰력이다. 하나 본대가 그걸 확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저 잔가지가 부러진 것은 이미…….”
“오래전에 부러진 것이겠죠. 그 정도는 파악했다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끄음. 그래서 네가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이냐?”
“간단합니다. 꽤 오래전부터 기문둔갑술을 이용한 진법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는 겁니다.”
“진법?”
“물론 질풍대도 시간만 충분하면 그 진법을 알아봤을 겁니다. 하나 추격 전문이지 진법을 파훼하는 전문은 아닐 테니까요.”
“계속해 봐라.”
초립표가 얼른 나서서 말하자, 남궁천이 말을 이었다.
“저곳의 잔가지를 모두 쳐내시고, 저기.”
이번에 남궁천이 가리킨 방향은 정 반대편의 절벽 위였다. 거기에 바위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대략 쌀가마니 정도의 크기였다.
“저 바위를 치워야 합니다. 물에 빠트리든 옆으로 굴리든. 아무튼 치워야 합니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쓰러진 고목도 걷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남궁천은 그 외에도 몇 가지를 더 지시했다.
기문둔갑술에 의한 진법이라는 것이 때론 몹시 단순해서 지형지물을 이용한 착시 현상에 가까울 때가 많다.
지금이 딱 그런 경우였다.
모든 지시를 내린 남궁천이 모용신과 초립표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런 것들을 처리하면 또 다른 동굴이 보일 겁니다. 거기가 진짜 도피처일 확률이 높죠. 그때도 제가 들어가길 원하신다면 뜻대로 하지요.”
“…….”
모용신과 초립표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물론 유현과 주연화, 팽수혁도 마찬가지. 그들 모두 입을 딱 벌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특히 팽수혁은 눈썹을 사정없이 꿈틀대며 남궁천이 들었다간 깜짝 놀랄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렸다.
‘이 새끼는…… 이런 걸 어떻게 다 아는 거야? 설마 전생에 사람 피해서 도망만 다니던 놈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