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금력을 차지하는 자
“자네가 내 딸을 구해주게.”
순간 남궁천의 눈동자가 커졌다.
남궁천은 지금 들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뭐지? 나보고 딸을 구해 오라고?’
사실 못할 건 없다.
아니, 상황을 봐가면서 그러려던 참이었다.
금왕의 금력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조금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 기회에 진소홍을 구해서 그의 금력을 어느 정도 활용해 볼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한데 금왕이 자신에게 직접 부탁을 해올 줄이야.
그래 봐야 한낱 생도가 아니던가?
아무리 이번 비무 대회에서 주목을 받는 생도라지만, 이런 부탁은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웬만한 고수도 아니고, 한낱 생도에게 딸의 구출을 맡긴다?
물론, 현재 금왕의 입장이 좀 애매하긴 하다.
맹주가 발 벗고 나서겠다며 약속을 한 상황이다.
여기에서 금왕이 따로 고수를 고용하거나 수하들을 부리게 된다면 맹을 불신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때문에 마냥 감정적으로만 대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도대체 이 인간은 내 능력을 얼마나 높게 보는 거지?’
처음에는 농담인가 싶었다.
하나 딸을 잃은 아비가 농담할 정신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정신이 완전히 나가 버린 것은 아닐까도 생각했다.
하나 지금 자신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는 금왕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했다.
남궁천이 생각에 빠져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자, 금왕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상인일세. 때론 엉뚱한 결정을 내려서 운명을 걸기도 하지. 그리고 지금 내 결정이 다른 이에겐 다소 의아할지 모르겠으나…….”
“운명을 걸 만큼 신중하게 내린 결정이란 말씀입니까?”
“그렇네.”
“저는 생도일 뿐입니다. 소홍이라면 맹주님이 무사히…….”
“맹보다 자네가 먼저 구해야 하네.”
“……!”
“상인의 직감일세. 자네가 그래야만 할 거라는. 그것이 자네와 나 모두에게 득이 될 일일세. 이는 오랜 세월 이 바닥에서 구를 만큼 구른 자의 육감으로 봐도 좋네.”
육감이라.
남궁천이 속으로 웃었다.
마음에 드는 단어다.
평범한 인생만 살아온 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
하나 어느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자라면 대충이나마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단어.
그게 바로 육감이다.
도망자의 정점을 찍은 자신이 이따금씩 육감을 맹신하는 것도 같은 선상이다.
때론 생존본능에 따른 무의식적 경고가 냉철한 이성보다 도움될 때가 많으니까.
금왕은 상인으로서 정점을 찍은 자.
아마도 그의 무의식에서 이뤄진 계산이 맹주가 아닌 자신을 택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박수를 쳐주고 싶다.
맹주 그 늙은 구렁이가 얼마나 속이 시커먼 인간인지 대략이나마 짐작한다는 뜻일 테니.
뭐, 그게 아니더라도 맹주보다는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강남 제일 부자인 금왕이!
그의 금력은 천하를 호령한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된 것이든 맹주가 진소홍을 구하겠다는 뜻만큼은 진심인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한데 금왕이 따로 조용히 자신에게 부탁한 것이다.
한낱 생도일 뿐인 자신에게.
범인이라면 상상도 못할 결정을 내린 것이다.
대회의장에서 그 짧은 시간에 맹주와 자신이 묘한 대척 관계에 있다는 것을 판단한 것이리라.
‘과연 금왕이군. 냉철한 상황 분석과 신속한 판단력. 거기에 정점을 찍은 자의 육감! 아주 칭찬해.’
속내를 갈무리한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 역시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이번 대회를 통해 소홍과 부쩍 친해졌으니까요.”
남궁천이 조금은 낯간지러운 말을 던지자 금왕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지. 뜻이 있다는 걸 높이 살 뿐.”
“……!”
확실히 만만한 자가 아니다.
남궁천이 오직 친분 때문에 나서는 게 아니라는 걸 짐작한다는 말투다.
금왕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하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말해줄 수 있네. 나는 은원만큼은 확실히 가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한시가 급한 문제이니 그럼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부탁하네.”
“그럼.”
남궁천이 깍듯한 자세로 포권을 취하고는 방을 나왔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상황.
조금 있으면 동녘이 밝아올 터였다.
* * *
무림맹보다 먼저 진소홍을 구출해야 한다.
금왕의 바람이기도 했지만, 남궁천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정보력에서 밀린다.
‘역시 그 방법밖엔 없나?’
벽라검을 챙긴 남궁검이 마음을 다잡고 숙소에서 나섰다.
한데 몇 걸음을 옮기기 전에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봐.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딱 걸렸어.”
“……?”
돌아보니 팽수혁이 대도로 제 어깨를 툭툭 치며 걸어왔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넌 탈진 상태로 쓰러진 것 아니었나?”
“시, 시끄럽다! 탈진은 무슨! 그냥 좀 쉬고 싶어서 꾀병 부린 거지! 날 봐라! 어디 다친 곳 하나 있는가?”
“그러니까 탈진…….”
“닥쳐! 넌 생도 주제에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냐?”
“만물이 생동하는 아침이다만.”
“그래, 남들 다 밥 먹는 시간에 어딜 가느냐고 묻는 거지!”
말해서 무엇하랴.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걸음을 옮기려는데, 팽수혁이 얼른 달려와 길을 가로막았다.
남궁천이 쳐다보자 팽수혁이 한쪽 입매를 치켜 올리면서 짝다리를 짚었다.
“어딜 혼자 가시려고. 너 혼자 영웅이 되려는 꼴은 죽어도 못 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진소홍 구하러 가려는 거지?”
갑자기 훅 들어오는 바람에 남궁천도 조금 놀랐다.
‘흐음. 원래 무식한 것들이 육감이 더 좋은 건가?’
한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자가 아니라, 무식한 자의 특기라면…… 이거 육감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지도.
남궁천이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지 마라. 다친다.”
“오냐, 그건 제발 좀 도와달란 소리구나.”
“장난이 아니다.”
“그래, 실전이지. 실전하면 하북팽가고.”
남궁천이 잠깐 멍한 표정으로 팽수혁을 돌아보았다.
팽수혁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마주 보았다.
결국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뒈져도 남 탓하지 마라.”
“너야말로. 형님이 너까지 지켜주기엔…….”
“확, 씨.”
파바밧!
순간 다람쥐처럼 튕겨 나간 팽수혁이 머쓱한 표정이 되어서는 소리쳤다.
“봤지? 내가 이 정도로 반사 신경이 좋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네게 경고를 내린 거다.”
결국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걸어가려는데, 이번에는 모퉁이에서 유현과 주연화가 불쑥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같이 가요!”
주연화의 표정은 이미 결의로 다져진 듯 단호해 보였다.
아마도 모퉁이 너머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모양이었다.
남궁천이 유현에게 좀 말리라는 듯 시선을 옮기니, 오히려 유현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도 함께 돕겠습니다. 남궁 소협이 절 구하려다가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당연히 도와야지요. 게다가 진 소저는 저와 비무를 치르던 중이었으니,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고요.”
아니, 그쪽이 왜 책임감을 느껴?
하여튼 뼛속까지 도가인 놈들은 속내가 이해 안 된다.
다행히 팽수혁이 나서며 짐짓 근엄한 척 말했다.
“어딜. 따라오지 마시오. 다칠 수 있소.”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어허, 이건 장난이 아니오. 실전이란 말이오.”
“그러니 더욱 동료가 필요하겠지요.”
“하면 뒈져도 남 탓은…….”
팽수혁의 말을 남궁천이 가로질렀다.
“정 그렇다면 갑시다. 시간 없으니.”
그렇게 세 사람이 걸음을 옮기자, 팽수혁이 얼른 뒤따르며 소리쳤다.
“잠, 잠깐 내 말이 아직……! 뒈져도 남 탓하기 없기! 각자도생…… 젠장! 같이 가자고!”
* * *
질풍대주 초립표는 목란산을 올려다보며 이를 빠득 갈았다.
“맹에서는?”
“대기하라는 지시입니다.”
부대주의 대답에 초립표가 진각을 쾅 밟았다.
인근의 새떼가 후드득 날아올랐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적들이 인질까지 잡아간 마당에!”
늘 이런 식이다.
질풍대가 추격해서 사냥감을 궁지로 몰아넣으면, 청랑단이 와서 숟가락만 얹는다.
‘그리고 모든 공은 가로채지!’
한마디로 밥상 차리는 놈들 따로 있고, 맛있게 퍼 먹는 놈들 따로 있다.
하지만 어쩌겠나?
조직 체계가 그러하니 따를 수밖에.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 수하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이쪽으로 빠르게 접근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청랑단주가 벌써 왔나?”
그렇다면 이례적으로 빨리 온 것이긴 하다.
하긴. 인질이 다름 아닌 금왕의 딸이 아니던가?
무림맹이 서두르는 게 이상할 건 없다.
한데 또 다른 수하가 달려와서 올린 보고에 그의 생각이 깨지고 말았다.
“접근자는 생도들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제일 앞장서서 달리는 자는 남궁천 생도 같습니다.”
“뭐야? 남궁천이 여긴 왜?”
“그건 잘…….”
수하가 얼버무리는 사이, 남궁천 일행은 초립표가 확인할 수도 있을 만큼 지척에 다가왔다.
언덕에 올라섰던 초립표는 질풍처럼 달려오는 남궁천을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아니, 뭔 애새끼가 저렇게 빨라?”
물론 무연회 첫 시험에서 그의 경공을 확인한 바 있었다. 한데 그 짧은 사이 남궁천은 훨씬 빨라진 듯했다.
뿐만 아니라 저만치 뒤따르는 다른 생도들 역시 기량이 훌쩍 향상된 것만 같았다.
“끄응. 슬슬 은퇴해야 할까 봐요.”
옆에 선 부대주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저것들 잡아.”
“예, 대주님.”
부대주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수하들과 함께 몸을 날렸다.
과연 질풍대답게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새떼처럼 민첩했다.
바람처럼 달려오던 남궁천은 질풍대의 포위를 받고 가까스로 멈춰 섰다. 다른 생도들도 하나둘 도착하고 나서야 부대주가 남궁천 일행을 끌고 왔다.
초립표가 생도들을 보며 물었다.
“너희들 뭐냐?”
“친구를 구하러 왔습니다!”
팽수혁이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친구? 진소홍 생도?”
“그렇습니다!”
“용기와 결단은 가상하다만 여기까지다. 생도들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이건 실전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꺼져. 너희들 친구는 맹에서 구한다.”
그러자 이번엔 남궁천이 한 걸음 나섰다.
“구출 작전에 참여시켜 주십시오. 적어도 방해는 하지 않을 겁니다.”
“안 되는 건 안…….”
그때였다.
수하 하나가 또 달려와서 보고했다.
“대주님, 청랑단이 오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긴 하군.”
애새끼들보다 늦었지만.
이제 막 도착한 청랑단주 모용신이 남궁천 일행을 보고는 눈썹을 구겼다.
“저것들은 뭐지?”
“진소홍을 구하려고 왔답니다.”
초립표의 대답에 모용신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생도들을 보았다.
모용신이 생도들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지금 상황이 장난으로 보이나?”
팽수혁이 발끈해서 나서려는데, 남궁천이 먼저 차분히 대꾸했다.
“장난으로 보이면 안 왔죠.”
“죽고 싶나?”
“에이,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럼 꺼져라.”
“저희도 구출 작전에 함께하겠습니다.”
“너흰 청랑단원이 아냐.”
“알고 있습니다. 그냥 따라만 다니겠습니다.”
“네놈들이 정녕 죽고 싶어서 환장을……!”
모용신이 칼바람처럼 매섭게 몰아치다가 문득 미간을 좁히고는 생각에 잠겼다.
가만…… 이거 어쩌면……?
그의 한쪽 입매가 묘하게 뒤틀린다.
그래, 이건 죽을 수도 있는 실전.
누구 하나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실전이 아닌가? 그렇게나 영웅이 되고 싶다면야.
그런 모용신을 보며 남궁천이 속으로 뇌까렸다.
‘물어라. 물어라. 물어라. 물어라. 물어라. 물어라, 물어라……!’
마침내 모용신이 고개를 들고는 싸늘하게 말했다.
“대단한 고집이로군. 후회는 하지 말도록.”
“단주!”
초립표가 얼른 나서서 말렸지만, 모용신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생도들을 보았다.
“단, 본 단은 어디까지나 진소홍 구출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위험을 알려줘도 뭣도 모르고 설치는 천둥벌거숭이까지 보호할 여력이 없단 뜻이다. 알아들었나?”
“물론이죠! 각자도생은 이미 각오……! 어? 단주님?”
호기롭게 대꾸하는 팽수혁을 뒤로한 채 모용신은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돌아선 모용신과 그 뒷모습을 보는 남궁천의 얼굴에 비슷한 냉소가 스몄다.
둘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마저도.
‘차라리 잘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