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적은 누구인가?
또로로롱.
찻잔을 채우는 맑은 찻물 소리.
시녀가 물러가자 실내에는 싸늘한 침묵만 자리했다.
열린 창문으로 밤바람이 소슬하니 불어온다.
제법 날이 차지만 남궁검은 창문을 닫을 생각도 없이 눈앞에 앉은 남궁천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옆에서 지켜보는 남궁화가 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누가 이 자리를 보고 조손지간의 대화 자리로 여기겠는가?
남궁화는 찻잔을 잡으려다가 남궁검이 아직 찻잔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손을 무릎 위로 옮겼다.
그러길 몇 차례.
얼음장 같은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남궁검이었다.
“할 말이 없느냐?”
북해에 부는 칼바람처럼 무미건조한 음성.
이에 남궁천도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있어야 합니까?”
남궁화는 자칫 가슴을 두드릴 뻔했다.
정말이지 저런 건 외조부를 닮지 않아도 되건만!
‘도대체 어쩌자고 저리 뻣뻣한 자세인 건지…….’
죽음을 겪은 후로 남궁천의 태도가 변했다는 건 진작 느꼈지만, 너무 다른 사람이 되지 않았나?
이왕 고분고분 웃으며 대답하면 좀 좋을까? 아니, 그럼 아버지가 좋아하긴 하실까?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자 남궁화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남궁검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남궁검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해명은 해야 할 터다.”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무슨 해명을 해야 합니까?”
남궁검이 미간을 좁히더니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다 큰 것처럼 굴지만 여전히 어리구나.”
이 영감이 진짜…….
남궁천이 내심 발끈했지만 속내를 다스리며 물었다.
“제가 잘못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있다.”
“뭡니까?”
“스스로 깨우치지 못할 정도로 미련한 것이더냐?”
“회의장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그저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섰을 뿐입니다. 그걸 무림맹이 제멋대로 오인하여 절 뇌옥에 가둔 것이지요.”
“쯧. 아직 멀었군. 그러고도 네가 소가주가 되려는 것이더냐?”
“……!”
그제야 남궁천은 남궁검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책임감에 대한 말이리라.
분명 일개 생도의 행동으로만 본다면 잘못이 아니라 칭찬을 받아 마땅할 일이다.
하나 미래에 가문을 이끌어갈 소가주라면?
일신의 안위를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위치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다.
남궁검이 하는 말의 요지는 거기에 있으리라.
“앞으론 좀 더 신중을 기하겠습니다.”
의외로 빠른 수긍에 이번엔 남궁검도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따끔하게 한마디 지적을 하려고 벼르더라도 이럴 땐 또 제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물러나니 더 할 말이 없다.
영악한 건지, 미꾸라지 같은 것인지…….
결국 남궁검도 더는 말을 잇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가서 쉬어라.”
“예, 가주님.”
남궁천이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화가 배웅을 해주기 위해 일어나는데, 남궁천이 문을 나서다 말고 돌아보았다.
“감사합니다.”
“……?”
“맹주님이 아닌, 저를 믿어주셔서.”
남궁검이 혀를 차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겠느냐? 피가 물보다 진한 것을.”
“…….”
남궁천이 흠칫거렸다가 몸을 돌렸다.
‘하여튼 영감이 꼭 막판에 감동을 먹인다니까.’
두 사람이 방을 나서자, 남궁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휘영청 떠오른 달을 보았다.
유난히 밝은 보름달이 세상을 향해 교교히 달빛을 뿌리고 있었다.
“맹주. 나는 여전히 자네 생각을 모르겠군.”
문득 떠오른 기억에 남궁검의 의식이 수십 년 전의 과거로 달려갔다.
남궁검이 적랑단을 이끌고, 맹주가 청랑단을 이끌던 그 시절로.
‘그날도 이렇게 달이 밝았지.’
* * *
남궁검의 벽라검이 시린 달빛을 받아내며 묵천악의 목 언저리를 겨누었다. 단 일 푼의 힘이라도 가한다면 벽라검은 가차 없이 묵천악의 목을 뚫을 기세였다.
남궁검이 북풍한설처럼 차디찬 목소리로 물었다.
“다시 묻겠네. 방금 뭐라고 했나?”
“마교의 잔당 삼 할 정도를 일부러 놔주었다고 했네.”
“갈!”
순간 남궁검이 사자후를 터뜨리자 멀찍이 물려두었던 적랑단원들과 청랑단원들이 움찔거리며 서로를 경계했다.
때마침 밤바람이 전장 복판으로 세차게 휘몰아쳤다.
휘우우웅!
남궁검과 묵천악의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렸다.
남궁검이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며 소리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겐가! 오늘이야말로 마교의 잔당을 완전히 뿌리 뽑을 절호의 기회였거늘!”
적랑단주 남궁검은 수하들을 이끌고 북으로 몰아쳤고, 청랑단주 묵천악은 수하들과 함께 남으로 달려갔다.
한데 묵천악이 예상보다도 일찍 돌아와서 한다는 말이 적의 삼 할을 놔주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일부러!
묵천악이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자네는 진정한 적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뭐?”
“혹시나 오해하진 말고 듣게. 자네 생각을 알고 싶은 것일 뿐이니.”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 상황에 그런 이야기나 나눌 때인가! 당장에라도 놈들을 쫓아가서……!”
“중요한 문제일세.”
“듣기 싫네! 자네는 맹주께서 마교주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잊었나? 내 숙부께서도 맹주님과 운명을 같이했다는 사실을 잊은 건가? 본 단 제일대주는 마교의 잔당에게 가슴이 갈라져 죽었어! 자네가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 감히 내 앞에서 어찌 그런 망발을 뱉는단 말인가!”
휘이이이잉!
다시 한번 칼바람이 불었다.
하나 이건 자연의 바람이 아니다.
남궁검이 내뿜는 살기였다.
때문에 적들의 시체만 가득했던 전장에서 적랑단과 청랑단이 대립하는 묘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묵천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졸지에 적이 된 모양새군.”
“자네가 자초한 일.”
“적을 놓친 게 이 정도로 미움 살 일인가?”
“놓친 것과 놓아준 건 엄연히 다르네!”
“자네가 이 자리에서 내 목을 치고 적들을 쫓으러 가겠다면 말리지 않겠네. 하나 조금이라도 내 생각이 궁금하다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겠나?”
“도대체 자네는…….”
남궁검이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지금 쫓아가 봐야 늦었으리라.
남궁검이 얼음처럼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변명을 하려거든 제법 그럴싸해야 할 걸세. 내 검은 인정에 얽매이지 않으니.”
“그렇지. 자네의 검은 늘 그랬지. 그래서 믿음이 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우리가 참으로 긴 세월을 맹에서 함께해 왔지. 한데 지금은 서로를 적처럼 여기고 있군.”
“그건 전부 자네가……!”
“상황에 따라 적아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걸세.”
“……?”
“마교의 잔당을 소탕하면? 그 후에는 어찌 되는가?”
“총군사께서 맹을 정비하실 걸세.”
맹주는 이미 마교주와 동귀어진했기에 자리가 공석이었다.
현 무림맹 특성상 부맹주를 추대하지 않았으므로 총군사가 전권을 쥐고 맹을 정비할 터였다.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그럴 테지. 그 다음에는?”
“차기 맹주를 선출하겠지.”
“누구를?”
“그건…….”
남궁검이 미간을 모은 채 말을 아꼈다.
과연 누가 차기 맹주가 될까?
벌써부터 무림맹 내부에서는 그 일로 시끄러운 상태였다.
아마 맹의 수뇌부와 강호명숙들의 치열한 밥그릇 싸움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
묵천악이 피식 웃고는 던지듯 물었다.
“자네가 해볼 생각은 없나?”
“허튼소리.”
“어째서 그리 생각하나? 난 자네가 차기 맹주로 오른다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할 생각이네.”
“적을 놓아주는 무인은 필요 없네만.”
“이런.”
묵천악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행동에 조금 환기가 된 것인지 남궁검도 더는 벽라검을 겨누지 않고 거두었다.
“나는 가문을 이어야 하네.”
“하긴.”
묵천악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얘기가 진행되니 남궁검은 조금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묵천악이 생각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자네는 당장 사마외도가 평정되고 나면 내부 분란이 일어날까 염려하는 것인가?”
“그렇네.”
“하나, 본 맹은 정도를 추구하는 무인 집단일세. 다소 불협화음이 일어날 수 있으나 상식선에서 해결될 걸세.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여 적을 놔준다는 건 내 상식선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걱정 말게나. 삼 할도 채 남기지 않았어. 그 잔당들이 남아봐야 뭘 하겠는가? 다만 맹을 정비할 때까지 시간을 좀 벌어줄 만큼만 살려두었을 뿐이야. 그들의 존재가 본 맹의 내부 결속에 도움이 될 걸세.”
“정의를 수호하고자 악을 이용하겠단 말인가? 그것이 또 다른 악이 된다면 어쩌겠나?”
“그래도…… 최소한 그 또 다른 악의 목적은 정의 수호가 아닌가? 방식이 조금 다를 뿐.”
“……!”
“외부의 위협이 없다면…… 조직은 내부에서 곪아갈 수밖에 없네. 자네는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이 너무 강해서 탈이야. 모두가 자네 같진 않아.”
“그렇다고 후에 어찌될지도 모를 불의의 씨앗을 남겨둔단 말인가!”
“전부 다스릴 수 있는 범위에서 남겨두었네. 그저 이용하는 것이지.”
이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건 교교히 빛나는 보름달뿐이었다.
* * *
뒷짐을 지고 달을 올려다보던 맹주 묵천악이 속으로 뇌까렸다.
‘남궁 가주. 나는 그날의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네.’
잠시 회상에 잠겼던 맹주는 곧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섰다.
맹주전 후원으로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청랑단주 모용신이었다.
“질풍대가 목란산까지 추격했다고 합니다.”
“코앞이군.”
“명을 내리시면 구출하겠습니다.”
“이번 사안은 결코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야.”
“물론입니다.”
“금왕은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자야. 게다가 은원을 분명히 가리는 성격으로 유명하지.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겠지만, 또 자칫하다간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네.”
“명심하겠습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만에 하나는 없습니다.”
맹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도 만에 하나 잘못 된다면 최소한 시체가 떠들어대는 일은 없어야 할 걸세.”
모용신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확실히 살인멸구하란 명이다.
모용신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해했습니다.”
“가게. 가서 진소홍을 구하라.”
“존명!”
깍듯하게 대답한 모용신이 곧 몸을 돌리고는 후원을 빠져나갔다.
맹주가 다시 뒷짐을 지고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만에 하나는 없어야겠지. 절대로. 하나…….”
왜 이런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날 달 밝은 밤에 내렸던 그 결정이 뜻밖의 결과로 이어졌던 그때처럼.
그 바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궁검에게 빚을 지게 된 그때처럼.
자꾸만 생각과 달리 흐를 것 같은 이 기분은 무엇인가?
오랜만에 남궁검을 만나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지난 오랜 세월 강호에서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본능이 내리는 경고인가?
자꾸만 만에 하나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길함이 떠오른다.
* * *
남궁천이 미간을 좁히고는 금왕을 보았다.
그가 금왕을 굳이 찾아온 이유는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무림맹 뇌옥에 갇히지 않은 것은 그의 영향력이 큰 탓이었으니까.
한데 금왕에게 이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남궁천이 다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금왕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로 남궁천을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자네가 내 딸을 구해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