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적은 누구인가?
좌중이 다시 술렁거렸다.
같은 편으로 오인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적랑단주 당예설이 불쑥 물었다.
“그들이 입은 옷을 보았느냐?”
“예, 흑의 경장에 복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몇 명이었느냐?”
“그건 모릅니다. 한 명과 조우했습니다. 다른 한 명의 목소리도 들었지만 직접 보진 못했습니다.”
“너는 지금 입고 있는 옷차림이었을 테고?”
“예.”
“한데도 널 같은 편으로 생각했다?”
“그렇습니다.”
술렁임이 더 커졌다.
이건 자칫하면 무림맹에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옷차림이 전혀 다른데도 같은 편으로 인식했다는 것은 내통자의 존재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하면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들었느냐?”
“목표물 확보. 간다.”
“그게 그들이 나눈 대화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목표물이란 진소홍을 말하는 것이리라.
남궁천의 이야기를 듣던 금왕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그 순간.
쾅!
청랑단주 모용신이 진각으로 바닥을 구르더니 무서운 표정으로 다그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 말은 본 맹에 내통자가 있다는 소리로만 들린다!”
“전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지만, 그렇게 들린다면 제가 그걸 어쩌겠습니까?”
남궁천이 얄밉게 대꾸하자, 모용신이 눈에 힘을 주며 노려보았다.
“하면 어찌 너는 복면을 쓰고 있었던 것이냐?”
“복면이 아니라 독무를 흡입하지 않기 위해 천으로 코와 입을 가렸을 뿐입니다.”
남궁천이 기세에 눌리지 않고 담담히 대꾸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어느 쪽이든 의심과 납득이 가능했다.
이쯤 되자 맹주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
“모용 단주는 흥분하지 말게. 저 아이의 말도 일리가 있네.”
“맹주님! 이 아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 자체가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이 아이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가 내부 분란이라도 일어나면 안 될 것입니다.”
“자네 말도 일리는 있지. 하나…….”
맹주의 시선이 유독 남궁검에게 향했다.
“그 아이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지 않겠나?”
그제야 모용신도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장내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맹주가 침음을 흘리더니 남궁검을 돌아보았다.
“보시다시피 아주 미묘한 문제요. 중요한 증인이기도 하고.”
“확실히.”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맹내에 내통자가 있다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구려.”
맹주의 표정이 흠칫 떨렸으나, 곧 미소를 지었다.
‘그런 식으로 몰아가보시겠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받았다.
“그렇소. 해서 나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 의견을 듣고 싶소. 저 아이는 깨어난 후로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소. 하나 상황이 묘한 만큼 진술 이외에는 증명할 방도가 없는 실정이오. 저 아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다시 좌중이 술렁거렸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맹주를 노려보았다.
‘책임 전가인가?’
확실히 늙은 여우가 따로 없다.
문득 오래전 함께 전장을 누비며 사마외도를 벌하던 시절이 떠올라 씁쓸한 감정이 스며 나온다.
‘자네는 어찌 그리 늙어가는 건가?’
마침 수맹당주(守盟堂主)가 헛기침을 하더니 맹주를 향해 물었다.
“맹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모두가 궁금하던 차였는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맹주를 돌아보았다.
남궁천은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잘 짜여진 경극을 보는 기분이랄까?
‘수맹당주가 맹주의 사람일 가능성이 높군.’
수십 년을 강호 밑바닥에서 구른 인생이다.
이 정도면 저들의 눈짓과 말투만 봐도 대충 감이 온다고나 할까?
그 감은 이어지는 맹주와 수맹당주의 대화에서 더욱 확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궁천은 아직 나이가 한참 어린 생도일세. 그 홀로 무엇을 하겠는가? 다만…… 일각에서는 그리 단순히 보지 않는 시선이 있는 것 같아서 고민일세.”
맹주가 세상 인자한 표정으로 근심을 풀듯 말하자, 수맹당주가 옳거니 하고 받았다.
“혹 남궁천이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사실 때문에 나오는 말들입니까?”
그제야 사람들이 잠시 잊었다는 듯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 두 사람의 대화는 잠시 묻어두고 있던 사실 하나를 확실히 되새기게 해주었다.
누구나 은연중에 생각은 하지만 밖으로 뱉진 않았던 사실.
그런데 그게 한 번 입 밖으로 나오게 되면 다시 머릿속에 각인되어 신경 쓰이게 마련이다.
청랑단주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렇습니다, 당주님. 일각에서는 대살성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강호에 남아 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대살성의 혈육인 남궁천을 후계자로 낙점했다는 우려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지요.”
남궁천은 기가 찼다.
‘나를 추종하는 세력들?’
애초에 내가 살아 있을 때도 그런 놈들은 없었건만.
이것들이 이런 식으로 날 팔아먹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우선은 잠자코 돌아가는 사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무림맹에서 청랑단이 가지는 위치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특히 새외지역에서 대규모 전투에 집중하는 적랑단과 달리 강호 내의 치안을 담당하는 청랑단은 소문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한 편이다.
한마디로 청랑단주 정도가 된다면 없는 소문도 만들어내고, 있는 소문은 무마할 힘이 있다는 뜻.
실제로 대살성 추종 세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청랑단주나 알 터.
‘아주 대놓고 여론몰이를 하는구나!’
아니나 다를까, 귀빈들과 수뇌인사들이 저마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술렁거렸다.
그들은 대살성이 얼마나 많은 강호 영웅들을 죽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는 도랑을 흐린다지만, 대살성은 온 강물을 흐리는 이무기에 가까웠다.
여기저기에서 부정적인 시각이 쏟아진다.
하나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만이 그 시선에 동참하지 않았다.
대신,
쾅!
손바닥으로 탁자를 내리친 남궁검이 먹구름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청랑단주. 구체적으로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신변 보호를 위해섭니다.”
그러자 남궁검이 차갑게 웃었다.
“그 말은 내가 곧 대살성을 추종하는 무리와 뜻을 같이한다는 것인가?”
“그럴 리가요.”
모용신이 담담하게 대꾸하자, 남궁검이 코웃음을 치고는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아니면 혹 자네가 없는 이야기를 조장한 것인가?”
“당치 않습니다.”
“하면 왜 말을 못 하나? 그도 아니면 이 자리에 대살성을 추종하는 세력과 손잡은 누군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인가?”
어느새 자기 무덤을 판 꼴이 된 모용신이 말을 아끼는 사이, 맹주가 구원의 손길을 뻗어왔다.
“남궁 가주, 고정하시오. 청랑단주는 그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요약해 전달했을 뿐이외다.”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인지, 떠돌 이야기인지 알 수 없는 것 아니겠소?”
“허어, 사람 참…….”
맹주가 혀를 끌끌 차더니 다른 사람들도 들으라는 듯 말했다.
“나는 세상 사람이 무어라 한들 신경 쓰지 않소. 저 아이가 대살성의 사생아든 아니든 상관없소. 어찌 아비가 저지른 죄를 자식에게 묻겠소? 그러니 여러분도 그 부분은 의식하지 말고 의견들 내어주시오.”
겉으로는 인자한 척 말했으나, 기실 판은 다 깔린 셈이었다. 이미 사람들의 뇌리에는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단어가 깊이 각인된 상황.
누구도 쉽게 의견을 내놓지 못하자, 종남파 장로가 나서며 말했다.
“이번 사달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 바로 만금진인 아니겠습니까? 저 아이의 처분은 만금진인의 의견도 들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게 좋다는 생각입니다.”
누군가 동의하자 맹주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왕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동안 넋이 나가 있던 금왕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상황을 인지했다.
맹주가 금왕을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만금진인께서는 너무 염려치 마시오. 내 반드시 따님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소.”
“감사합니다.”
금왕이 어딘지 쉰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 아이의 처분을 결정해 달라는 것인가?’
금왕은 상인답게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금방 눈치챘다.
‘이 와중에 줄을 잡으라는 것이구나.’
평소라면 망설일 것도 없이 맹주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조금 전 맹주가 보여준 믿음직스러운 미소는 그야말로 만사 제치고 의지하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한데 딸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남궁천을 잠룡이라며 눈을 빛내던 그 얼굴이.
‘남궁천…… 네가 정말 잠룡이더냐?’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마주했다.
잠룡이라.
분명 잠룡이다.
한데 너무 위험한 잠룡이다.
심지어 맹주가 잠룡을 사냥하려고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대살성의 사생아이기 때문에?
아니면 정말로 저 아이가 소홍을 납치한 자들과 한통속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이건 상인의 직감이다. 만약 자신의 자금을 노린 것이라면 너무 무모하다. 더구나 딸과 저 아이는 관계도 원만하고, 오히려 좋은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얼마 전에도 값비싼 토시를 전해준 걸로 아는데. 그걸 윤종승이 차고 나왔을 때는 다소 의외였지만.
하면 역시 대살성의 사생아여서 그러나?
무심히 맹주를 쳐다보니, 맹주 역시 남궁천을 빤히 보고 있었다.
순간 금왕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흠칫거렸다.
‘그렇구나. 어쩌면 맹주도……!’
저 아이가 잠룡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것일지도!
하면 사냥할 이유는 충분하다.
역시 낭중지추(囊中之錐)라던가?
아니, 딱히 주머니 속에 감춰둔 송곳이라 할 수도 없다.
스스로 알아서 튀어나온 돌이 됐다.
이번 비무 대회를 통해서.
마치 누가 자신을 때리는지 지켜보자는 듯이.
그리고 자신을 때리는 자가 맹주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했다.
이러한 추측을 인정이라도 하듯 남궁천이 시선을 돌려 맹주를 똑바로 응시했다. 맹주와 남궁천의 시선이 허공에서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맹주와 잠룡이다!
금왕이 가만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오래전 딸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버지, 정말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땐 어떻게 해요?”
“정답을 모르면 오답을 먼저 가려라.”
“오답도 모르면요?”
“그나마 계산이 단순해지는 걸 잡아라. 셈이 복잡해지면 분명 착오가 생기니.”
계산이 단순한 것.
비록 심증이긴 하나 남궁천이 소홍을 납치할 이유가 없다. 납치할 가능성을 만들려면 너무나 많은 가설을 내세워야 한다. 즉, 셈이 복잡해진다.
하나 맹주의 속은 알기 어렵다. 그를 지지함으로서 얻는 것이 있을지, 남궁천을 구제함으로써 불이익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고 복잡하지.’
마침내 계산을 끝낸 금왕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 아이는 제 딸과 친분이 깊습니다. 그냥 풀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금왕의 말에 좌중이 다시 술렁였다. 모두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딸을 잃은 마당이니, 사람의 심리상 누구든 원망의 대상으로 삼으리라 여긴 것이다.
하나 이 지경이 되어서도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한다는 것은 과연 금왕답다는 생각이 들게도 만들었다.
맹주 역시 의외라는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곧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대꾸했다.
“알겠소. 나 역시 금왕과 같은 생각이었소. 괜한 소문과 억측으로 억울함이 생겨서는 안 되겠지. 남궁천 생도를 풀어주도록.”
“예, 맹주님.”
수하 하나가 깍듯하게 대답하자, 맹주가 금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따님의 일은 염려 마시오. 내 반드시 무사히 구출하리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사합니다, 맹주님.”
고개를 끄덕이며 금왕을 바라보는 맹주의 눈빛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