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적은 누구인가?
꿈을 꿨다.
남궁천은 전생으로 돌아가 다시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름도 모를 어느 마을에서 이름도 모를 허름한 객잔에 앉아 국수 한 젓가락을 막 들 때였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스쳐 가는 바람결에서, 주문을 받는 점소이에게서, 옆 탁자에 앉은 손님에게서.
후각으로 맡아지는 냄새가 아니라, 본능으로 느끼는 냄새.
‘니미럴, 왜 추격자들은 항상 밥 처먹기 직전에만 나타나는 거지?’
꼭 이런 식이다.
며칠간 도망을 다니느라 주린 배를 달래며 겨우 한 끼 때우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다.
가끔은 이것들이 일부러 이러나 싶을 때도 있다.
어쨌거나 지금은 국수나 처먹고 있을 때가 아니었기에 남궁천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움직임이 보인다.
스쳐 가는 바람결에서도 긴장이 느껴진다.
때론 육감이 논리적인 이성보다도 정확하다.
수십 년간 도망을 다니면서 쌓인 초월적 감각이다.
생존본능.
한데 점소이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더니 주변을 살피다가 남궁천에게 다가왔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기에 남궁천은 잠자코 기다렸다.
뭐, 어쩌라고?
점소이를 노려보는데, 녀석이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더니 뜻 모를 말을 지껄인다.
“왜 그러세요? 뭐 나타났어요?”
“뭔 개소리야?”
“아니, 왜 같은 편끼리 날을 세우고 그러시남?”
“같은 편은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를…….”
“거참, 좋게 넘어가자니까.”
갑자기 점소이의 표정이 확 변하더니 어느새 늙은 맹주가 됐다.
파바밧!
순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으면서 손님들과 지나가던 행인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 들고는 덤벼들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남궁천은 얼른 품을 뒤적여서 비상시에 사용하는 연막탄을 꺼냈다. 대체로 독이 섞여 있는 연막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수면독이 든 연막탄을 꺼냈다.
‘이렇게 된 이상 맹주를 인질로 잡으면 포위망을 뚫기가 수월할 지도!’
남궁천이 수면독이 든 연막탄을 터뜨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주변으로 자욱한 연무가 피어났다.
퍼퍼퍼펑!
달려들던 놈들이 그 자리에서 비실비실 신음을 흘리며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어떠냐? 이 개 같은 것들아! 내가 맹독을 풀지 않은 걸 고맙게 여겨라! 음? 그런데 나도 졸리네…… 아차…… 피독주를 먹었어야 하는 건데…….”
뒤늦은 실수에 남궁천이 비실비실 신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아……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전생에 나는 남궁천이 아니라 진천랑이지 않았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조금씩 의식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연막탄과 수면독이라…….
그러고 보니 내가 수면독에 당했던 것 같은데…….
‘아! 기억난다.’
진소홍의 비무 중에 누군가 암기를 던져서 연막탄이 터졌지. 그래서 사람들이 독무인 줄 알고 난리가 났고…….
‘맞아. 내가 유현을 구했지.’
보나마나 지금쯤 또 사람들이 영웅이네 뭐네 하면서 떠받들고 있을 터. 아마 보정각의 침상에 누워서 극진한 간호를 받는 중이리라.
그런데 어째 바닥이 좀…….
차다?
그런 위화감 속에서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불렀다.
“어이, 신입! 안 일어나?”
“아따, 고놈. 꿀잠 자네. 어지간하면 깰 때도 됐겠구먼.”
어수선한 목소리에 남궁천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턱수염과 머리카락이 치렁치렁 늘어진 헐벗은 사내가 험악한 인상을 쓰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는 남궁천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긴 어디지?”
새파란 생도의 말에 헐벗은 사내와 코에 점이 박힌 사내가 서로 마주 보더니 낄낄거렸다.
“어디긴 어디냐? 뇌옥이지.”
“형님, 저 애송이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모양입니다요.”
남궁천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되물었다.
“뇌옥이라니? 어디?”
“어디긴 어디야? 무림맹 뇌옥이지!”
“어이, 신입! 무슨 죄를 저질러서 들어왔누?”
점박이가 던진 질문에 남궁천이 마지막 기억을 다시 꼼꼼히 점검했다.
분명 유현을 구하고 나오려다가…….
‘아, 그 적아를 구분 못 하던 멍청이들과 조우했지.’
그러고 보니 적아를 구분 못 하던 것은 그 복면인들도 똑같지 않았던가?
꿈속의 점소이처럼.
남궁천의 머릿속에서 점소이와 수면독, 염라단이 마구 뒤섞여서 떠다녔다.
“이봐! 애송이! 형님들이 묻잖냐? 무슨 죄를 짓고 들어온……!”
퍽! 퍽!
순간 남궁천의 주먹이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가면서 헐벗은 사내와 점박이의 턱을 갈겼다.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고꾸라져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남궁천이 앉은 채로 고심을 거듭했다.
‘생각해 보자. 놈들이 수면독을 쓴 이유는 하나다. 꿈에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 대신 이용하겠다는 거지. 하면 처음부터 진소홍을 납치하는 게 목적이란 말인데…….’
* * *
“회의실에 귀빈들과 수뇌인사가 모두 모였습니다.”
총관의 보고에 맹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왕은 어쩌고 계신가?”
“근심이 깊어 보였습니다.”
“그렇겠지. 딸의 행방이 묘연해졌으니.”
내뱉는 말과 달리 맹주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총관이 허리를 숙이며 말을 덧붙였다.
“질풍대가 추격 중이고, 청랑단이 준비를 마쳤습니다.”
“청랑단주는?”
“회복해서 회의실로 오는 중입니다.”
“걱정을 끼쳤으니 이젠 해결을 해드려야겠지.”
맹주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나서려는데, 총관이 뒤따르며 한마디 덧붙였다.
“회의실에…… 남궁검 가주도 와 있습니다.”
“남궁검 가주가?”
“예.”
맹주가 차갑게 웃었다.
“내놓은 자식이니 뭐니 해도 혈육이라는 건가?”
회랑을 걸어간 맹주가 곧 대회의실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미 모여 있던 수뇌인사들과 귀빈들이 목소리를 낮추고는 맹주에게 시선을 던졌다.
맹주는 한쪽에 앉은 금왕을 힐끔 보았다.
과연 총관의 말대로 시름이 깊은 표정이었다.
왜 아니겠나?
금왕의 딸 사랑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인데.
오죽하면 진소홍이 신분을 숨긴 건 금왕이 딸을 지키기 위해 먼저 생각한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
어쨌거나 진소홍이 금왕의 유일한 약점인 것만은 명백한 사실.
그런 딸이 납치당했으니…….
‘반드시 찾아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짧은 순간 맹주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그가 상석에 앉자 귀빈들과 수뇌인사들이 오히려 입을 다물고는 침묵을 유지했다.
맹주가 좌중을 둘러보고는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소.”
“그게 어찌 맹주님 탓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지금은 잘잘못을 가리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흉수를 찾아야겠지요.”
“그렇잖아도 지금 질풍대가 추격 중이니 곧 소식이 올 것이오.”
“오…… 질풍대라면 믿을 수 있지요.”
몇몇 귀빈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남궁검이 불쑥 끼어들면서 물었다.
“남궁천을 잡아두었다고 들었소만.”
그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좌중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맹주가 남궁검에게 시선을 돌리고는 무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소만.”
그렇소만?
남궁검의 눈자위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지금 남의 손자를 잡아두고서 ‘그렇소만?’이라니.
그게 할 말인가? 가타부타 전후 사정을 말해야 옳지 않은가!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아이를 뇌옥에 가두셨다고.”
“그렇소.”
“이유가 있소?”
이제 좌중의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두 사람의 대화에만 집중했다.
맹주는 어차피 한 번은 짚고 넘어갈 문제라 여긴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독무가 퍼졌을 때 모두 대연무장을 벗어나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소. 한데 염라단이 진입했을 때, 그 아이는 비무대 복판에서 유현을 들쳐 메고 있었다더군. 이 일에 대해 조사가 필요했을 뿐이오.”
“지금 그 아이를 의심한다는 뜻이오?”
남궁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무거웠지만 칼바람처럼 싸늘했다. 때문에 지켜보던 귀빈들과 수뇌인사들은 절로 긴장이 됐다.
하나 맹주는 노련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의심까지는 아니고. 그저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에.”
“하면 뇌옥이 아니라 보정각으로…….”
남궁검이 말을 맺기도 전에 맹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지금 그 아이를 불렀소. 모두가 보는 이 자리에서 간단한 질의응답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떨까 해서.”
“……!”
남궁검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맹주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말을 순화해서 질의응답이라고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심문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마침 문밖에서 수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맹주님, 청랑단주와 남궁천 생도가 도착했습니다.”
“들라하라.”
곧 문이 열리고 청랑단주 모용신과 남궁천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
모용신이 먼저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청랑단주가 맹주님과 여러 강호 선배님들께 인사드립니다. 본 대회의 심사를 맡은 입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유감입니다. 조속히 조치를 취해서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용천관 생도 남궁천입니다.”
남궁천도 인사를 올리자, 맹주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먼저, 남궁천.”
“말씀하시지요.”
“자네는 독무가 퍼졌다는 소리를 듣고도 비무대로 뛰어들었다고 들었네. 이유가 무엇인가?”
“진소홍은 평소 저와 절친한 동기였습니다.”
“그게 이유의 전부인가?”
맹주가 눈살을 슬쩍 구기자, 남궁천이 맹주를 빤히 보았다. 그러다가 한쪽에 앉은 남궁검과 금왕을 한 차례 보고는 말을 이었다.
“절친한 동기가 위험에 처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든 게 전부입니다. 더 이상의 이유가 있어야만 합니까?”
“독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한데 피독주를 복용하지 않고도 뛰어들었지. 참으로 대단하군. 그 용단은 어디에서 나온 건가?”
얼핏 칭찬처럼 하는 말이지만, 여지없는 의심이다.
“호흡만 참으면 된다 생각했습니다.”
“독에 따라 피부에 닿기만 해도 치명적일 수 있을 텐데?”
“독이 퍼져 나가는 속도와 대피한 사람들을 보면서 그 정도의 맹독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현을 들쳐 메고 있었던 이유는?”
“혹시 모르니 구할 생각이었습니다.”
“납치할 생각은 아니었고?”
“맹주!”
순간 남궁검이 싸늘하게 소리쳤다.
맹주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농담이오.”
하나 이 자리의 누구도 맹주가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맹주가 남궁천을 의심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의심할 여지는 충분하지 않은가?
모두가 대피하던 그 상황에서 홀로 독무 안으로 들어가다니.
게다가…….
“어째서 그들이 널 가만두었지?”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더니 잠시 답을 망설였다.
이 부분은 맹주로서도 의외였다.
그는 당연히 남궁천이 흉수들과 마주치지 못했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한데 쉬이 대답을 하지 않고 우물쭈물하니 오히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알고 있나?’
때마침 청랑단주가 다그쳤다.
“뭘 하느냐? 어서 고하지 않고.”
그럼에도 남궁천이 망설이는 듯하더니 어렵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 말씀을 여기서 해도 될지…….”
“말해라.”
맹주가 말하자, 남궁천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그들이 절 같은 편이라고 오인하는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