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진짜 이변
새파랗게 질린 사람들이 우왕좌왕 했다.
“독무? 지금 독무라고 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으아아악! 비켜! 비켜!”
“헉! 제길! 사파 놈들인가? 어서 여길 벗어나야 해!”
양민들은 물론 무공 한 자락 익혔다는 무인들조차 사색이 되어서는 앞다투어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한꺼번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가니 제대로 이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으악! 비, 비키라고!”
“밀지 마! 여기 사람이 넘어졌……! 우아악!”
“사, 사람 살려!”
밀려서 넘어진 사람들, 그 사람에게 걸려 다시 넘어지는 사람들. 아랑곳하지 않고 밟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어른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그야말로 난장이 따로 없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금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홍아!”
하나 그의 호신위가 귀신처럼 나타나더니 급히 말했다.
“주군! 일단 대피하셔야겠습니다!”
“이대로 갈 수는 없다! 내 딸이 저기에 있다! 어서 그 아이부터……!”
“주군! 수하를 보낼 테니 먼저 피하시지요!”
“아니다! 홍이를 먼저 구해라!”
금왕이 호신위를 떠밀고는 직접 경공을 펼쳐 비무대까지 날아가려고 하자 남궁검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내 참견할 일은 아니나 이게 독무라면 여길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소.”
“제 딸이 저기에 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수하를 보내도록 하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어찌 아비 된 자로서 자식을 버리고 먼저 몸을 사린단 말입니까? 말리지 마십시오! 죽어도 같이 죽……!”
탁탁!
순간 남궁검이 손을 뻗어 훈혈을 점하자 금왕이 스르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주군!”
호신위가 당황해서 소리치자, 남궁검이 특유의 냉랭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당황할 필요 없네. 잠시 재운 것일 뿐이니. 먼저 자네 주군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게.”
“……알겠습니다.”
호신위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금왕을 부축해 몸을 날렸다.
“아버지, 천이는요?”
“이미 정체 모를 연기가 사방으로 퍼진 상황이다. 최대한 호흡을 참고 일단 피해라.”
“그래도 천이는요!”
“여기서 그 아이를 찾을 순 없다.”
남궁검이 냉정하게 말하자 남궁화가 입술을 질끈 씹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버지 말대로 남궁천을 이 상황에서 찾을 수가 없다는 것.
“화야. 가자.”
결국 남궁화도 어쩔 수 없이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사람들이 출구로 몰려들고 있을 때, 소맷자락을 찢어 코와 입을 가린 남궁천이 관전석 난간에 훌쩍 몸을 날렸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살폈다.
뿌옇게 번진 연기 때문에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든 실정.
그저 사방에서 들려오는 난잡한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가 상황을 대신 알려주고 있었다.
‘역시 기분 탓이 아니었어!’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관전석에서 어깨를 부딪친 정체불명의 사내가 이 일과 관계가 있으리라.
일단 호흡을 참고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은 대략 반각이다.
만약 누군가 소리친 대로 대연무장을 자욱하게 매운 이 연기가 독무라면 그 안에 벗어나야 한다.
‘서둘러야겠군!’
생각을 마친 남궁천이 경공을 펼쳐 단숨에 비무대 위로 날아갔다.
파라라라!
허공을 가르며 떨어진 남궁천이 얼른 비무대 가장자리를 살폈다.
바닥에 꽂힌 비수가 보였다.
일부분이 깨져 있고 속이 비어 있다.
연무가 발생한 곳이 바로 그 비수인 것만은 틀림없으리라.
“소홍!”
남궁천이 소리쳐 이름을 불렀다.
이걸로 호흡이 조금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
파바밧!
남궁천이 재빨리 몸을 날려 상대의 뒤를 쫓았다.
탁!
마침내 어깨를 잡고 돌려세우자, 흑의 복면인이 휙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직도를 후려쳐왔다.
쒸에에엑!
직도가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순간, 남궁천이 그대로 상체를 일으키며 팔꿈치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따앙!
“크읍!”
상대가 놀랐는지 눈을 부릅뜨고는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어째서……!”
흑의 복면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정체불명의 연무를 막기 위해 천을 두른 것이 복면의 효과를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야?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건가?’
하나 그러기엔 자신의 복장이나 급히 찢어서 만든 복면이 어설플 텐데.
그때 연무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목표물 확인! 간다!”
흑의 복면인이 움찔거리고는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남궁천이 그만큼 한 걸음 내디뎠다.
‘어이, 이대로 그냥 가면 서운하잖아.’
놈들의 목표물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짐작컨대 진소홍일 가능성이 높다.
산에 처박혀서 도나 닦는 놈들의 제자를 납치할 이유는 없을 테고, 굳이 따지자면 가진 게 돈 뿐인 자의 딸이 좋을 테지.
그렇다곤 해도…….
“역시 이해가 안 되는군.”
남궁천이 중얼거린 말에 흑의 복면인이 흠칫거리고는 노려보았다.
“이쪽이야말로.”
흑의 복면인이 꺼낸 말에 남궁천이 눈썹을 구기며 되물었다.
“뭐가?”
“…….”
흑의 복면인은 뭔가 이상하다고 판단했는지 더 이상은 말을 뱉지 않았다.
남궁천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뭔지 모를 위화감.
‘돈을 노린 인질극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림맹 공식 행사 중에 이런 짓을 벌여?’
이건 정말이지…….
“간이 너무 큰 것 아니냐?”
“…….”
흑의 복면인은 역시나 대답이 없다.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이상하단 말이지. 내가 도망자 시절에는 무림맹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
“역시 이런 간 큰 짓을 벌일 정도면 규모가 꽤 된다는 뜻이겠지?”
“뭔 개소리를 하려는 거냐?”
이번에는 흑의 복면인도 참지 못하겠는지 으르렁거렸다.
남궁천이 미간을 모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 그렇잖아. 이건 좀 너무 무모하잖아?”
“미친……!”
그때였다.
다시 연무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간다!”
파밧!
찰나, 흑의 복면인이 몸을 돌리더니 그대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어딜!”
남궁천이 재빨리 그 뒤를 쫓아가며 벽라검을 뻗었다.
한데 그 순간 발에 무언가가 걸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말았다.
“엇!”
얼른 바닥을 딛고 균형을 잡는데, 흑의 복면인이 매섭게 직도를 후려쳐왔다.
까아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번쩍 일어났다.
남궁천이 반동을 이용해서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벽라검을 횡으로 후려쳤다.
쒸아아앙!
허공을 벤 검이 그대로 사선으로 올라가더니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쩌엉!
직도와 벽라검이 부딪치면서 다시 한 번 불꽃이 터졌다.
그제야 연무 너머에서 재촉하던 다른 괴한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는지 암기를 날려 왔다.
“칫!”
남궁천이 얼른 물러나면서 벽라검을 휘두르자 암기 두 자루가 그대로 튕겨 날아갔다.
따다앙!
그 틈을 이용해 흑의 복면인이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타다닷!
“넌 내가 찍었다니까!”
남궁천이 얼른 그 뒤를 쫓으려는데 다시 눈앞에 쓰러진 뭔가가 보였다.
‘유현?’
얼른 발을 옮겨 디디자, 연무 너머에서 다시 비수 네 자루가 날아들었다.
쒸쒸쒸쒸에엣!
“엉뚱한 곳에서 발목을 잡는구나, 유현!”
따다당! 땅!
다시 네 자루의 비수가 튕겨 나갔다.
연무 너머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를 쫓으려던 남궁천은 바닥에 쓰러진 유현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미 늦었나?’
손을 섞어 보니 확실히 알겠다.
관전석에서 어깨를 부딪쳤던 그 녀석과 같은 무리라는 것을.
하면 이제 뒤쫓아 가도 추격하기는 어려우리라.
게다가…….
‘만약 이게 맹독이라면 지금이라도…….’
남궁천이 바닥에 쓰러진 유현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특별한 이상은 없어 보였다.
‘그저 잠이 든 건가?’
하면 강력한 수면독?
한결 마음이 놓이긴 하지만 의문은 여전하다.
어쨌거나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유현은 옮겨 놓는 게 좋을 테니…….
‘여러모로 짐이구나!’
하지만 이 또한 훗날을 위해 씨를 뿌려두는 거라고 생각하자.
전생과 달리 현생에서는 배경 든든한 아군을 많이 만들어 놓는 게 좋을 테니.
‘내가 이렇게 생각이 깊단 말이지.’
남궁천이 유현을 들쳐 메고 막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마침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무인들 한 무리가 달려왔다.
“멈춰라!”
가까이에 다가온 무인들의 제복을 살펴보니 무림맹을 방호하는 염라단(閻羅團)인 듯했다.
“일찍도 오셨네. 다들 피독주 한 알씩 깨물고 오시느라 늦으셨나?”
“닥쳐라! 인질 내려놓고 엎드렷!”
“인질……?”
남궁천이 어이가 없어서 되묻자, 염라단주가 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수신호를 내렸다.
순간, 염라단원들이 일제히 남궁천을 향해 몸을 날려 왔다.
“아니, 뭐 이래? 적아도 구분 못하고!”
남궁천이 재빨리 벽라검을 휘두르며 방어하자 염라단원들이 멈칫거리며 거리를 좁혀왔다.
하지만 시간은 남궁천 편이 아니었다.
“제길…… 반각이……!”
이미 반각은 훌쩍 지난 상태.
그래도 최대한 참으면서 버티고 있었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맹독이 아니라 수면독이라는 점이랄까?
눈이 가물가물 흐려져 간다.
그 와중에도 염라단은 차분히 포위한 채 섣부른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
곧 남궁천이 한쪽 무릎을 털썩 꿇고는 유현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젠장…… 난 여기 생도라고……!”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린 남궁천이 마침내 바닥에 쿵 쓰러졌다.
곧이어 그는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 *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맹주가 엄한 표정으로 호통을 치자 총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상황 파악 중에 있습니다. 수맹당에서 염라단을 급히 투입하여 최대한 사상자가 없도록 조치 중에 있습니다.”
“허어!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감히 본 맹의 공식 대회에서 이딴 난동이라니!”
“최대한 빨리 수습하겠습니다.”
총관이 거듭 머리를 조아리자, 맹주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귀빈석의 강호명숙들이 성난 표정으로 외쳐댔다.
“필시 사파 놈들의 짓일 겁니다! 맹주, 배후를 철저히 밝혀야 합니다!”
“옳은 말이외다! 배후가 누가 됐든 발본색원하여 다시는 무림맹을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해야 할 거외다!”
“비열하게 독무라니!”
“이것들이 잠자는 범의 코털을 건드리는구려!”
맹주가 그들을 향해 포권하며 사죄했다.
“이런 난동이 일어난 것에 대해 맹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리오. 여러분의 고견을 받들어 반드시 이번 일의 흉수를 밝히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도록 하겠소이다.”
“맹주,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씀 주십시오. 본 문이 물심양면으로 돕겠습니다.”
“본 가 또한 맹을 위해 발 벗고 나설 것입니다!”
강호명숙들이 다시 한번 결의를 다졌다.
맹주가 감동한 표정으로 그들을 둘러보는데, 마침 수하 하나가 달려와 보고했다.
“맹주님! 염라단에서 비무대에 쓰러진 생도 한 명을 구출했습니다!”
“다행이군! 누구더냐?”
“무맹관 유현 생도입니다.”
“하면 진소홍 생도는?”
“그게 아직…….”
“허어……!”
“한데…… 그곳에 남궁천 생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뭣이?”
맹주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