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생각을 뒤집어라
네 개의 기적 중 하나가 끝났다.
관전자들은 차가운 비무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팽수혁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보았다.
“아아…….”
“팽수혁이…….”
“용천관의 기적 중 하나가…….”
물론 도박에서 돈을 딴 몇몇은 환호했다.
“드디어! 제대로 된 결과가 나왔구나!”
“으하하하! 잘했다! 운경!”
모용신이 손을 들며 선언했다.
“운경, 승!”
그러자 관전자들 사이에서 갈채가 터져 나왔다.
짝짝짝짝……!
팽수혁에게 돈을 걸었다가 잃은 이들도 원망을 쏟아내진 않았다.
오히려 모두들 위로의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팽수혁! 졌지만 잘 싸웠다!”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잘 했다!”
“마지막까지 박진감 넘치는 비무였다! 앞으로 더 날아올라라! 용천관 승승장구해라!”
격려의 함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비무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원들이 빠른 속도로 올라왔다.
타다다닷!
그들 중 연륜이 가장 지긋한 의원이 얼른 상처를 살피고는 팽수혁의 맥을 짚었다.
모용신이 다가와 물었다.
“좀 어떻소?”
그러자 함성을 내지르던 관전자들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들도 이들의 대화를 듣고 싶었기에.
의원이 일부러 모두가 들으라는 듯 조금 큰소리로 대꾸했다.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네.”
“다행이군.”
모용신의 대답과 동시에 다시 한번 박수가 쏟아졌다.
의원은 팽수혁의 상처 부위에 얼른 소독 용액을 부었다.
“흡……!”
팽수혁이 입술을 꽉 다물고는 참자, 의원이 내심 감탄했다.
‘고통이 꽤 심할 터인데 꽤나 잘 참는구나.’
의원이 얼른 혈자리를 찾아 침을 놓기 시작했다.
일단 몸의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마비 침이었다.
거기에 상처 부위에 마비 독을 발라서 통증을 최대한 차단시켰다.
“일단 상처부터 봉합하겠네.”
말을 마친 의원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찢어진 옆구리 상처를 봉합해 나갔다.
이후에는 약통을 꺼내 진흙처럼 생긴 연고를 상처 부위에 질척질척 바르고 일어났다.
“일단 응급처치는 끝냈네. 나머지는 보정각(保情閣)에서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하네.”
모용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팽수혁이 엉거주춤 일어나려고 하자, 의생들이 얼른 달려와 그를 부축해주었다.
그 모습을 운경이 가만히 지켜보다가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단하군. 저 지경이 되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움직이다니.’
어찌 보면 제 몸을 생각지도 않고 마구 굴리는 것이 무식해 보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저 패기 하나만큼은 배울 점이 되리라.
게다가…….
‘마지막 그 도격은…….’
다시 한번 떠올리니 머리끝이 쭈뼛 선다.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쳐 오른다.
정말 위험했다.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다가선 팽수혁이 눈 깜빡할 사이에 도신을 베어 올 때는 꼼짝없이 죽는 줄만 알았으니까.
태어나서 진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뭐였더라?
철혈파벽?
만약 그게 머리로 떨어졌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상대는 하북팽가다.
그 흉물스러운 대도가 머리로 떨어진다고 해서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전장에서 구르고 구르면서 다져진 도법이 아니던가?
그들의 도법이 패도적이고 실전형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
‘하지만 역시 이상하군. 지금껏 듣고 보던 하북팽가의 도법과는 좀 다르달까?’
물론 자신이 많은 경험을 겪진 않았지만, 지난 사흘간은 하북팽가의 도법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한데 그 초식을 이런 식으로 쓸 줄이야.
‘당장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곳이 강호라더니…….’
운경이 피식 웃고는 포권을 취했다.
“팽 형! 한 수 잘 배웠소. 치료 잘 받으시길 바라겠소.”
비아냥은 아니다.
진심으로 전한 말이었다.
팽수혁도 피식 웃고는 포권을 취했다.
“나 역시 한 수 배웠소. 하나, 다음에는 내가 이길 거요.”
“……!”
운경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이내 웃었다.
“좋소. 언제든 다시 붙읍시다.”
“기꺼이.”
운경이 인사를 마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운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팽수혁은 그대로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의생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다가 팽수혁을 불렀다.
“안 내려갈 거요?”
“…….”
하지만 팽수혁은 눈을 부릅뜬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몸이 안 움직이잖아……! 쪽팔리게……!’
하지만 속사정을 모르는 의생이 다시 부추겼다.
“팽 소협?”
“끄응…… 몸이…… 안 움직이오.”
“아……!”
그제야 사정을 파악한 의생들이 얼른 들것을 가지고 와서 팽수혁을 옮겨 실었다.
관전자들은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젠장, 들것에 실려 나가는 신세라니…….’
팽수혁이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대연무장의 동문을 통해 빠져나가려는데, 마침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졌네.”
목소리만 들어도 남궁천이라는 걸 알 수 있었기에 팽수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이 놀리듯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우냐?”
“익……!”
“이 새끼, 이거 울보네.”
“시, 시끄럽다! 내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다!”
“어쨌든 울보네.”
“닥쳐라!”
“근데 진 게 기쁘냐? 하긴 안 그랬으면 다음 비무에서 나한테 얻어터졌을 테니…….”
“이런 썅! 시끄럽다고 했……! 크읍!”
팽수혁이 벌떡 일어나다가 옆구리를 쥐고는 인상을 구겼다.
의생들이 얼른 그를 만류했다.
“환자가 이렇게 무리해서 움직이면 어쩌오? 얌전히 좀 있으시오!”
“쳇!”
팽수혁이 혀를 차고는 옆에서 나란히 걷는 남궁천을 힐끔거렸다.
“내가 기쁜 이유는…… 다음엔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렇군.”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남궁천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팽수혁은 그 반응을 남궁천도 인정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하긴, 이 녀석도 내가 마지막에 조언을 받아들였다는 걸 알겠지.’
마지막 순간 남궁천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발은 가볍지만 팔은 무겁게 움직였다.
막상 해보니까 수련만 더 한다면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북팽가의 도법은 패도적이나 무식하다는 오명도 벗어던질 수 있을 듯했다.
마치 패도적인 도법에 유연성을 더한 느낌이랄까?
‘그렇다곤 해도…….’
역시 몸은 이해했지만, 머리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그게 된 거지?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한 가지 실마리를 주자면, 역설적이게도 빠른 만큼 무거워지는 법이다.”
말을 곱씹던 팽수혁이 이맛살을 푹 찡그렸다.
“썅…… 그게 말이 돼?”
“손바닥 펴봐.”
“이렇게 말이냐?”
팽수혁이 손바닥을 쫙 펼치자, 남궁천이 천천히 주먹을 내려 손바닥을 눌렀다가 들어 올렸다.
“무겁냐?”
“전혀. 힘만 주면 버티지.”
“그럼 힘 줘.”
찰나, 남궁천이 빠르게 주먹을 내리쳤다.
퍽!
“아윽!”
“엇! 환자분! 아니, 환자에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의생이 기가 막혀서 남궁천을 타박했다.
팽수혁도 발끈해서 소리쳤다.
“너 이 새끼! 죽고 싶어?”
“어때?”
“뭐가? 이 새끼야!”
“아까보다 무겁지?”
“그야 당연히 빠르게 내리쳤으니 순간적으로 무게가 가중…… 아!”
팽수혁이 입을 딱 벌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빠를수록 무거워진다. 즉, 손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 발을 느리게만 움직여 한다는 편견을 깨라. 생각을 뒤집어. 경공을 더 끌어 올려라.”
“……!”
팽수혁의 눈동자가 커졌다.
뭔가 잡힐 듯 말 듯한 깨달음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만 같다.
이런 경우에는 폐관수련을 해야 하는데……!
어쩌면 보정각에서 집중 치료하는 게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참에 보정각에 처박혀서 지금 얻은 깨달음을 계속해서 정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남궁천이 팽수혁의 어깨를 툭 쳤다.
“크읍!”
“거참, 이보세요!”
다시 의생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치자, 남궁천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 미안. 습관이라.”
“나참…….”
“팽수혁, 마지막 일격의 감각을 잘 되새겨봐. 그럼 치료 잘하고.”
“남궁천.”
걸음을 막 돌리려던 남궁천이 힐끔 돌아보았다.
“왜?”
“준결승전에서 반드시 저놈 이겨라. 네가 저놈한테 지면, 이젠 나한테도 지는 거야. 그러니 반드시 이겨. 그래야 내가 널 꺾을 맛이 나지.”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곧 죽어도 자존심은.
* * *
“역시 대종남파입니다.”
“장로님, 감축드립니다.”
귀빈석에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종남파에서 온 장로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몇몇은 하북팽가주인 팽적호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아쉽게 됐습니다, 가주님.”
“그래도 정말 대단한 비무였습니다.”
팽적호 역시 그들이 빈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 팽수혁은 진짜 잘 싸웠다.
마지막 일격은 정말이지 아까웠다. 만약 그 공격이 먹혔다면…….
‘하긴 그랬다간 일이 더 커졌겠군.’
그 공격이 제대로 들어갔다간 운경의 머리통이 제자리에 붙어 있지 않을 테니까.
일도에 머리를 쪼개고, 일도에 가슴을 갈라 버리는 것이 하북팽가의 도법이다.
‘그나저나…… 마지막 그 일도는 뭐였을까?’
가주인 자신도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철혈파벽 초식인데, 움직임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래, 어기신풍부터 어색했지.’
하나 결과적으로 그 어색함들 때문에 그만큼 위협적일 수 있었다.
굳이 철혈파벽 초식을 외친 것은…….
‘마치 억지로라도 그 초식을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비친 것만 같았다.’
“흐음…….”
팽적호가 턱을 괴고는 생각에 잠겼다.
뭘까?
어째서 아들은 그런 이상한 초식을 구현한 걸까?
‘만약 녀석이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이라면…….’
두근!
혹시 기울어진 하북팽가가 아들을 통해 다시 일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아직은 망상에 가깝다.
하나, 이번 비무 대회를 통해 아들의 성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왠지 모르지만 앞으로 더 성장할 것처럼 보였다.
‘혁아,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 아비는 너를 믿어보마!’
팽적호가 입을 꾹 다물고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한편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윤첨산은 도무지 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다.
바로 다음에 이어질 비무가 아들 차례였기에.
“드디어 아드님 차례군요.”
“예? 아, 예…….”
“이 비무에서 이기면 준결승에 진출이군요. 무운을 빌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윤첨산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준결승이라니…… 우리 아들이 무연회 준결승이라니?’
걱정이 한가득이면서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건 힘들겠지.’
갑자기 현실을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아니다. 한숨 쉴 게 뭔가?
여기까지 온 것만도 대견하지 않은가?
한편 그 모습을 보며 차갑게 비웃는 이가 있었으니…….
“다음이 백무극인가?”
“그렇습니다.”
맹주의 무감한 목소리에 옆에 선 총관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금방 끝나겠군.”
때마침 대연무장에 다시 함성이 차올랐다.
비무대로 윤종승과 백무극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