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77화 (77/508)

77. 생각을 뒤집어라

후우우웅!

함성이 잦아들자 서늘한 바람이 비무대를 한 번 훑었다.

펄럭, 펄럭!

운경의 도복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를 냈다.

한 차례 돌풍이 지나가자 운경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포권했다.

“종남파에서 온 운경이라고 하오. 잘 부탁드리오.”

“하북팽가 팽수혁이오. 한 수 가르침을 부탁드리겠소.”

팽수혁이 마주 포권하면서 눈을 빛냈다.

‘표정에서 여유가 흘러넘치는군.’

당연하리라.

운경은 유현과 마찬가지로 무맹관에서 명성을 떨치는 생도 중 한 명이었으니까.

모처럼 종남파에서 귀재가 나타났다며 칭송하는 자가 바로 운경이었다.

하나…….

‘여기서 질 수는 없지!’

팽수혁이 어깨 너머로 손을 가져가며 도파를 콱 움켜잡았다.

스르르릉……!

무겁고 커다란 도가 등에 맨 검집에서 뽑혀 나왔다.

“우오오오…….”

관전자들이 저마다 나직한 탄성을 뱉어냈다.

일단 도가 굉장히 컸다.

도집에 들어 있을 때부터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시퍼런 날붙이가 드러나니 도집에 들어 있을 때보다 더 커진 것만 같은 착시 효과가 일어났다.

운경도 입을 모으고는 감탄했다.

“호오. 굉장한 칼입니다.”

“고맙소.”

팽수혁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는 운경의 두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방심하면 안 돼!’

상대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었다. 뿐만 아니라 상대의 무공을 딱 한 번 직접 견식했다.

지난번 무림맹 인근 객잔에서.

그때 운경은 검 한 자루로 남궁천의 벽라검을 막아냈다.

꽤 힘겨워 보이긴 했지만 정확한 찰나에 막았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렇게 반응할 수 있었을까?

‘쉽지 않은 상대가 되겠지.’

하나 여기서 질 수는 없다.

‘이 몸은 반드시 남궁천과 겨뤄서 녀석을 꺾어야 하니까!’

팽수혁이 다시 한번 도파를 콱 움켜쥐면서 기수식을 취했다.

운경도 옆구리로 손을 가져가 검파를 잡았다.

스르르릉.

매끄러운 소리와 함께 제법 굵직한 검신이 빠져나왔다.

“아아……!”

다시 한번 관전자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운경의 검 역시 묵직하다.

넓이나 길이로 보면 팽수혁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도 왠지 모를 무게감이 느껴진다.

구우우우……!

동시에 운경의 전신에서 묵직한 기운이 소용돌이치듯 일어나기 시작했다.

태을신공(太乙神功).

종남파가 자랑하는 독문심법!

이에 질세라 팽수혁도 단전에서부터 내공을 끌어 올려 전신에 일주천시켰다.

후우우웅!

하북팽가의 독문심법인 건곤미허신공이(乾坤彌虛神功)이 전신을 휘감으며 팽팽한 긴장을 다져갔다.

두 사람의 준비가 끝나자 장내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용신이 뒤로 물러나며 손을 들어 올렸다.

“시작하라.”

팟!

타닷!

찰나지간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부딪쳐 갔다.

쩌어엉!

두 사람의 합이 이루어지자 도검 사이에서 기풍이 사방으로 훅 불어나갔다.

후우우웅!

“우오옷! 대단하다!”

“둘의 기세가 거의 박빙이잖아!”

검을 맞댄 팽수혁이 슬쩍 눈을 치뜨는데,

‘웃어……?’

놀랍게도 운경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태연히 말까지 뱉는다.

“과연…… 훌륭하오.”

“……!”

“이 정도일 줄이야.”

“지금…… 누가 누굴…… 평가하는…… 거냐!”

촤아아앙!

도를 크게 휘둘러 튕겨낸 팽수혁이 곧장 어기신풍을 펼쳤다.

파바바밧!

검을 휘두르며 갈지자로 뻗어가는 팽수혁은 그야말로 죽음의 사자가 칼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깡! 깡! 까강! 깡!

연신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뻗어 막아내는 운경은 매 순간이 다급해 보였다.

관전자들 모두 가슴을 졸이며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운경의 열세처럼 보였기에 용천관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응원했다.

“잘한다! 팽수혁!”

“용천관, 이겨라!”

무맹관 생도들 역시 불안한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뭐야? 이러다가 운경이 지는 것 아냐?”

“젠장, 오늘도 승룡절이 되면 안 되는데!”

반면 용천관 생도들은 한껏 고무된 표정으로 팽수혁을 응원했다.

“팽수혁! 하북팽가의 위력을 보여줘라!”

“너도 우리 용천관의 자랑이다! 그렇게만 밀고 나가라!”

하지만 생도들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서서 보는 비량은 다른 생각이었다.

‘말리고 있군.’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운경이 월등하구나.’

다만…….

팽수혁의 신법이 많이 개선된 건 사실이었다. 일전에는 무겁고 정직했다면, 지금은 좀 더 가볍고 변화무쌍하다.

어느 순간 화살처럼 날아가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바위처럼 굳건해진다.

그럴 때마다 칼의 무게가 커지고 공격에 힘이 실린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너무 정직해.’

진정 변화무쌍해지려면 발이 가벼우면서도 손이 무거워질 수 있어야 하고, 손이 가벼우면서도 발이 무거워질 수 있어야 한다.

한데 그 엇박을 해내기에는 아직 무리인 모양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저기까지 생각해낸 것만으로도 고무적이긴 하다만.’

과연 혼자 어떤 깨달음을 얻어 생각해낸 것일까?

대게 가전무공이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서 어지간하면 새로운 시도를 생각지도 못한다.

한데 팽수혁은 공력의 흐름에 변화를 준 것이다.

대대로 내려오는 원칙을 스스로 깬 것이다.

최근 남궁천과 어울려 다니면서 뭔가 깨우친 게 있거나…….

‘아니면 남궁천이 직접……?’

에이, 설마.

남궁천이 요즘 놀라운 행보를 보이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리라. 그래, 그 정도는…….

아니…… 그 정도인가?

비량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맞은편 관람석 끄트머리에 팔짱을 끼고 선 남궁천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용천혈로만 공력을 발출하면서 철혈적성도의 철혈파벽(鐵血破壁)을 펼칠 수 있게 되면 네 무공은 한 단계 상승할 거다.”

어젯밤 남궁천이 한 말을 떠올리면서 팽수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제길! 말은 쉽게 하네!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뭐? 철혈파벽? 하!’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솟는다.

철혈파벽은 철혈적성도법에서도 가장 무거운 초식이었다.

때문에 철혈파벽을 사용할 때만큼은 어기신풍을 정석대로 펼쳐야 한다. 그러니 용천혈과 연곡혈에서 동시에 공력을 발출할 수밖에 없다.

만약 연곡혈에서 공력을 발출하지 않고 용천혈에만 집중하면 발은 가벼워지겠지만 결국 균형을 잃고 쓰러질 수밖에 없기에.

결국 남궁천의 말은 앞에 벽이 있는데도 멈추지 말고 냅다 달리라는 소리와 똑같은 것.

‘무시하자! 무시해!’

어젯밤 남궁천을 찾아간 게 잘못이다.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찾아갔더니 그딴 개소리만 듣고 돌아오게 될 줄이야.

그나저나…….

‘이 새끼는 왜 끄떡도 없는 거야?’

부우우웅!

쩌어엉!

마침내 혼신의 힘을 가한 일격이 운경의 검에 맞물리며 멈췄다.

운경이 마치 무당의 태극검처럼 부드럽게 받아냈기 때문에 반동이 생기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팽수혁이 도를 거두려고 하면 똑같은 힘으로 내밀었기에 마치 두 사람의 도검이 자석처럼 달라붙은 듯했다.

‘뭐, 뭐야? 이 새끼! 장난해?’

잔뜩 약이 오른 팽수혁이 왼손을 뻗으면서 일장을 날렸다.

하북팽가가 자랑하는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에 기반한 혼원벽력장(混元霹靂掌)!

제정신이라면 혼원벽력장에 맞서지 않고 몸을 돌려 피하리라.

그럼 그 순간을 이용해서 도를 횡으로 후려쳐 옆구리를 베어 버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쉬이이잇!

‘이 미친……! 마주쳐 와?’

하북팽가가 도법에 능하다지만, 권장법도 황보세가 못지않게 뛰어난 곳이다.

해서 어지간하면 권장법으로 맞설 곳이 없는데…….

퍼어어엉!

운경과 팽수혁의 장이 맞부딪치면서 폭음이 터졌다.

“크읏!”

“……!”

두 사람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터졌다.

팽수혁이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고는 운경을 노려보았다.

운경이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대단하오.”

“……!”

순간 팽수혁은 자신이 공력에서 밀린다는 것을 자각했다.

다시금 어젯밤 남궁천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 * *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남궁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보자, 팽수혁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입술을 우물거리며 망설였다.

남궁천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야! 잠깐!”

“뭐냐고.”

“네, 네 생각은 어떠냐?”

“그러니까 뭐가?”

남궁천의 목소리에 약간의 짜증이 스며들었다.

결국 팽수혁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젠장! 누가 이길 것 같냐고! 그놈과 나 중에!”

“흐음. 내일 비무 말하는 거지?”

“그, 그래.”

“솔직하게 말해줘?”

“당연히! 솔직한 내 의견을 듣고 싶다. 넌 그놈과 한 차례 검을 섞어봤으니까.”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짱을 꼈다.

팽수혁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된다.

과연 남궁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동시에 자신이 왜 이런 질문을 남궁천에게 던진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단지 본능적으로 떠오른 의문이다.

마침내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내일 비무에서는 네가…….”

* * *

카가가각, 따앙!

마찰을 일으키며 휘두른 도가 바닥에 박혔다.

파바밧!

튕기듯 멀어진 운경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멈춰 섰다.

운경의 표정에 살짝 놀라움이 스쳤다.

“과연 실전형이오. 하북팽가는 수많은 전투를 통해서 갈고닦아진 도법이라더니.”

“뭘 감탄하고 자빠진 거냐!”

파바바박!

생각처럼 풀리지 않자, 팽수혁이 거친 말을 쏟아내며 매섭게 달려들었다.

카가가가가앙!

바닥에 끌리면서 불꽃을 터뜨린 대도가 한 마리 거룡이 되어 솟구쳐 올랐다.

부우우웅!

쩌엉!

하나, 거룡은 완전히 승천하지 못했다.

또 다른 용이 하늘에서부터 찍어 눌렀기에.

“종남파의 천하삼십육검(天下三十六劍) 중, 제이초요.”

운경이 담담하게 말을 뱉으며 싱긋 웃었다. 여유 있는 표정과 달리 찍어 누른 검에서는 막강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풀풀 피어올랐다.

“하북팽가의 도법이 패도적이긴 하나, 역시 본 문의 중검을 넘어서진 못하는 것 같소.”

“노오오오옴!”

순간 팽수혁이 두 손으로 도파를 쥐더니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키기기기긱……!

맞물려 있던 도검이 서서히 위로 떠오르더니 마침내,

차아앙!

거룡이 중검을 뿌리치며 승천했다.

운경이 눈을 크게 뜨고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 팽수혁이 어기신풍을 펼쳤다.

쉬파앗!

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빨라졌다.

“헛!”

운경이 헛바람을 삼키면서 재빨리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러는 사이 바짝 다가선 팽수혁이 그대로 대도를 사선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철혈파벼어억!”

쒸아아앙!

승천한 거룡이 몸을 뒤집더니 허공을 찢어발기며 떨어진다!

파공성이 마치 거룡의 포효처럼 들린다.

‘염병할, 내가 초식명을 외치면서 칼 휘두르는 날이 올 줄이야…….’

하나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미친 짓을 감히 실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하늘로 솟구쳤던 거룡은 이제 눈앞의 모든 것을 찢어 버릴 기세다.

운경의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이런……!’

피츗!

쉬따아아앙!

마침내 도신이 운경의 귓바퀴를 살짝 베어내고는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팽수혁의 눈빛에 절망이 어렸다.

‘젠장……!’

그는 곧이어 자신의 옆구리로 날아드는 운경의 검을 보았다.

쒸이이잇!

촤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팽수혁의 비명이 날카롭게 솟구쳐 올랐다.

“끄아아아악!”

몸을 비틀며 쓰러지는 팽수혁은 어젯밤 남궁천이 했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내일 비무에서는 네가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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