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76화 (76/508)

76. 운인가, 실력인가?

광활할 정도로 넓은 대연무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만 끔뻑거리면서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디선가 신음처럼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뭐지? 끝난…… 건가?”

“설마…… 저렇게 끝?”

“단 일격에?”

“정말…… 저 남궁천이 모용강을 이겼다고?”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아직 확신이 들지 않는지, 사람들은 그저 수군거리기만 했다.

남궁검 역시 눈을 부릅뜨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하나 그는 알고 있었다.

모용강이 일어설 수 없을 것임을.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분명 남궁천은 일격을 피하면서 최악의 수를 두었다.

십중팔구 단전이 폐쇄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정도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한데 거짓말처럼 모용강이 실수를 저질렀다.

‘어째서 마지막 순간에 흔들림이 있었던 것인가?’

남궁검이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후의 일격이 되리라 확신했건만.

이 경우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혹, 잔인한 손속에 망설임을 가졌던 건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모용강은 아직 어리고, 강호 경험이 일천한 생도다. 제 딴에는 독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작정하고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인다는 건 또 다른 문제일 테니까.

더구나 이런 공식 비무 대회에서는 더욱 망설임이 생길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망설인 결과가 이것이라면…….

‘저 아이에게 운이 따르는 건가?’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는데, 마침 남궁천이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남궁천이 입을 벌리더니 뭐라고 모양을 만들어냈다.

남궁검이 남궁화에게 물었다.

“저 아이가 지금…… 뭐라고 하는 것이냐?”

남궁화가 얼굴을 붉히고는 머뭇거렸다.

남궁검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돌아보았다.

“말해보거라.”

“그게…… 저어…….”

“괜찮다. 말해라.”

“‘압도적이죠?’라고 하네요.”

“…….”

남궁검이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헛바람을 뱉었다.

압도적이라.

비무 시작한 지 반각도 지나지 않아서 결과가 나왔으니 압도적이라면 압도적이다.

한데 이걸 실력이라고 봐야 할지, 운이라고 해야 할지.

물론 강호에서는 운도 실력이 되는 법이라지만 이 정도로 소가주를 운운하기에는 좀…….

‘아직은 비무가 좀 더 남았으니.’

서둘러 판단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우승을 전제로 소가주 자리를 생각해 보겠다는 것이니까.

생각해 보겠다는 건 말 그대로 고려해 본다는 취지일 뿐, 소가주 자리를 확정하겠다는 게 아니다.

게다가 준결승에 진출해도 우승을 하기까지는 두 번의 비무가 남은 상황.

‘지켜볼 일이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던 남궁검은 스스로 조금 놀랐다.

언제부턴가 남궁천이 우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학관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괜히 또 한심한 짓이나 할까 봐 우려했더니, 이젠 무연회 우승을 대비하고 있다.

‘참으로 모를 녀석이군.’

저 아이를 그간 모르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저 아이가 죽음을 계기로 기연을 얻은 건가?

그런 남궁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궁천이 속없는 사람처럼 씨익 웃었다.

‘좋아, 일단 영감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군.’

확실히 이 환술은 좋은 방법이다.

상대가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비교적 적은 공력으로 빈틈을 만들어낼 수 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어디까지나 환술을 통해 의도한 부분이니 곧바로 그 틈을 공략할 수 있다.

게다가 여느 무공과 달리 사용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

이렇게 좋은 선물을 내게 안겨주다니. 백무극, 이 예쁜 녀석!

그나저나…….

‘저 녀석은 뭐 하는 거야? 아주 그냥 넋이 나가셨군.’

남궁천이 혀를 차고는 모용신을 불렀다.

“저기요.”

“…….”

하지만 모용신은 남궁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저 충격에 잠긴 표정으로 꿈쩍도 하지 못했다.

모용신은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동생을 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졌다고?

‘도대체 왜 마지막 순간 치지 못했던 것이냐!’

모용신은 동생에 대한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는 분명히 보았다.

모용강이 마지막 순간에 멈칫거리는 것을.

사실 모용강은 남궁천을 곧장 치려고 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남궁천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흐려지며 흔들렸다.

찰나지간 놀란 모용강이 얼른 공력을 비틀었고, 그 바람에 보법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런 속사정은 모용강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 남궁천의 목소리가 못처럼 날아들어 귀에 박혔다.

“저기요!”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모용신이 차가운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왜 불렀지?”

“예?”

“왜 부른 것이냐?”

“하! 뭐 하십니까? 지금.”

“뭐?”

“선언 안 하세요?”

그제야 모용신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퍼뜩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전자들이 웅성거리면서 비무대를 보고 있었다.

귀빈석의 맹주 역시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고.

그 옆에 선 당예설은 어딘지 모를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남궁천…… 승리다.”

마침내 모용신의 입에서 무거운 선언이 떨어지자, 대연무장에 벼락같은 함성이 차올랐다.

“우와아아아아앗!”

“또 이겼다! 남궁천! 너는 천재다!”

“남궁처어어언!”

“남궁천! 남궁천! 남궁천!”

대연무장이 들썩인다.

관전자들이 저마다 남궁천을 연호하면서 갈채를 보내왔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 주목받는 기분도 나쁘진 않네.

평생을 쫓겨 살았던 기억 때문인지 아직은 어색하다.

하나 앞으로는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전생의 그림자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이젠 뭐든 바꿔 나가야 할 테니까.

남궁천이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리니 사람들이 하늘이 흔들릴 정도로 함성을 내지르며 갈채를 보냈다.

이걸로 우승을 향한 팔부 능선을 넘은 셈.

남궁천의 우승은 여러모로 의미하는 바가 컸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사람들은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겠지만, 이 고비를 넘은 이상 ‘이러다가 혹시?’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희망은 더욱 짙어지고 포기를 경계하게 되는 단계.

기적을 이룬 사내를 진정한 영웅으로 보게 되는 순간!

남궁천이 돌아서서 여전히 고꾸라져 있는 모용강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모용 소협에게 한 수 자아아알 배웠소.”

* * *

“두 분이 부쩍 친해지셨군요.”

문득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남궁검과 금왕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어느새 남궁천이 다가와 있었다.

남궁화가 반색하며 일어났다.

“천아! 몸은 좀 어떠니? 참, 비무는 잘 봤어. 네가 이렇게까지 해낼 줄은 몰랐는데. 하늘에 계신 네 엄마가 무척 기뻐할 거야.”

남궁화는 눈시울까지 붉히며 감격에 차 있었다.

남궁천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선이…… 기뻐해 줄까?’

모르겠다.

어쩌면 더 잘할 수는 없었냐며 질책을 할지도.

사실 누구보다 사랑한 그녀였지만, 누구보다 자주 싸운 여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그리운지도…….’

남궁천이 희미하게 한숨을 쉬고는 하늘을 보았다.

‘보고 있어? 당신은…… 지금 기쁠까? 우리 아들 녀석은 좀 어떤가? 속이 좀 후련하다던가?’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 공허하게 가슴속에서 메아리친다.

그때 금왕의 목소리가 남궁천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자네가 내 딸에게 큰 도움이 됐다는 소리를 들어 이렇게라도 감사 인사를 드린 것일세. 그러고 보니 정작 자네에게는 고맙다는 말조차 전하지 못했군. 이 자리를 빌어 우리 홍이를 도와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네.”

금왕이 포권까지 하며 말하자, 남궁천이 마주 인사하며 겸양을 갖췄다.

“저야말로 따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허허, 그리 겸손하지 않아도 될 일인 것을. 참, 준결승 진출을 축하드리네.”

그러자 지켜만 보던 남궁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쉬지 않고.”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하여튼 이 영감은 말을 참 예쁘게 한다니까. 축하 한마디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하지만 남궁천 역시 축하 인사나 받자고 온 것은 아니기에 애써 무시하며 대꾸했다.

“제가 드린 말씀을 잘 기억하고 계신지 확인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내가 원체 사람 말을 잘 못 믿어서 말이지.

“확인?”

“소가주 건 말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나오자 남궁화가 다시 안절부절못하는 심정으로 남궁검의 눈치를 살폈다.

남궁검이 코웃음을 쳤다.

“운 좋게 이기고서 아주 기고만장했구나.”

“역시.”

“역시라니?”

남궁검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자, 남궁천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 뜻은 없습니다. 그저 제 예상대로 운으로 이겼다고 여기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면 운이 아니다?”

“운도 실력 아니겠습니까?”

“네 말이 맞다. 하나 그것은 패자가 새길 말이다. 승자는 운을 운으로 여겨야 한다.”

“운이 아니라면요?”

“무공은 세 치 혀로 떠들어대는 것이 아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하면 준결승전에서는 확실히 보여 드리죠. 제 실력을. 그리고 결승전에서는……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게냐?”

남궁천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결승전에서는 가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 순간 대연무장에 다시 함성이 차올랐다.

다음 비무를 위해 종남파 출신인 무맹관의 운경과 용천관 팽수혁이 비무대로 등장한 것이다.

그 바람에 남궁천의 이어지는 목소리가 소음에 파묻혀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천은 말을 끝까지 이었고, 남궁검은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손자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다만 내공이 그리 깊지 않은 금왕은 남궁천의 목소리를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대신 남궁검이 놀란 표정을 짓는 것만큼은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놀란 표정은 곧 어딘지 노기 서린 얼굴로 변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들었기에……?’

비무대에서는 오늘의 두 번째 비무가 시작되기 직전이었지만, 금왕의 관심은 오로지 이 두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마침내 남궁검이 다시 소음 속에서 뭐라고 입을 열었다.

물론 금왕은 알아듣지 못했다.

한데 놀랍게도 남궁천이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공교롭게도 그제야 함성이 조금씩 잦아들면서 남궁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

남궁천의 고분고분한 대답에 남궁검은 오히려 더욱 화가 난 표정이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을 나눴기에?’

남궁화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긴 한 것인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남궁천을 말렸다.

“천아, 그리 가벼이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떠니?”

“아뇨. 제가 먼저 제안을 드린 것이니 말씀하신 대로 해보지요.”

“천아!”

“놔둬라.”

남궁검이 불쑥 끼어들면서 차갑게 말하자, 남궁화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남궁검이 남궁천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두고 보면 알겠지. 네 말에 스스로 책임지길 바라마.”

“물론입니다. 그럼 즐거운 관람이 되시길.”

남궁천이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미련 없이 몸을 돌리고선 관람석을 벗어났다.

남궁검이 어딘지 화난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인 것과 달리, 남궁천의 표정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동시에 다부진 결의도 함께.

‘됐다. 이걸로 소가주 자리는 확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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