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74화 (74/508)

74. 모든 것엔 대가가 있다.

식사를 마친 금왕이 일어나려다 말고는 품을 뒤적이더니 손바닥보다는 조금 더 큰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비단결이 무척 고운 걸로 봐서는 꽤나 소중한 것이 담겨 있는 듯했다.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고.

물론 금왕이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고귀하지만, 유독 비단 주머니 자체에 정성이 들어간 것 같달까?

마치 선물 포장처럼.

진소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그게 뭐예요?”

금왕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가슴을 폈다.

“너에게 줄 선물이란다. 이번엔 아주 기뻐할 거다.”

“또 이상한 걸 주시는 건 아니겠죠?”

“이상한 거라니…… 그간 이 아비가 준 선물이 그렇게 별로였니?”

“딸에게 뱀 쓸개를 선물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유일할 거예요.”

“허허, 그건 그저 뱀의 쓸개가 아니야. 백룡담(白龍膽)이라는 아주 귀한 것이거늘. 남들은 없어서 못 구하는…….”

“네에, 네. 희귀하지만 확실히 받아서 기쁜 선물은 아니죠. 그게 내공을 증진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만 백룡담을 술로 담그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아버지.”

“커험, 험. 미안하구나. 이 아비가 잠시 흥분했다.”

금왕이 멋쩍게 기침을 하고는 비단 주머니를 다시 내밀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네 마음에 쏙 들 거다.”

“포장이 예쁘네요.”

“그렇지?”

모처럼 딸의 칭찬에 금왕의 표정이 밝아졌다.

금왕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딸을 지켜보는 사이, 진소홍은 비단주머니를 풀어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그건 바로 누런 금덩어리였는데, 곰을 조각한 것이었다.

금왕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어떠냐? 네가 좋아하던 금곰이다.”

“아버지…… 마음은 감사한데…… 이런 걸 제게 주시면 보관하기가…….”

예상외로 반응이 떨떠름하자 금왕의 표정이 대번 시무룩해졌다.

“이번에도 아닌 게야?”

“죄송하지만 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아버지.”

“이 아비에게는 언제까지나 아이로만 보이는걸.”

“마음만은 감사히 받을게요. 대신 이 비단 주머니는 마음에 드니까 제가 가질게요.”

“그래. 아쉽지만 그래도 절반의 성공이구나.”

“그만 일어날까요?”

“그러자꾸나.”

금왕과 진소홍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자, 묵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잠깐. 계산은 하셔야지.”

어딘지 위협적인 목소리에 금왕이 돌아서니, 귀왕이 눈을 부라리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것들이 부녀가 쌍으로 먹튀를 하려고?’

그 모습에 금왕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 제 딸이 용천관 생도입니다.”

“그래서?”

“예? 지금 무한은 용천관 생도에게 공짜로 식사를 제공하는 행사 중이라고 들었는데…….”

귀왕이 목을 우두둑 꺾더니 말했다.

“왜 그런 짓을 하지? 다들 미쳐 돌았나?”

“예……?”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우린 남들이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배웠으니까. 무엇보다 밥을 먹었으면 당연히 밥값을 내야 할 것 아닌가?”

“아…… 그렇지요.”

“이보쇼, 거기 아버님이 세상 물정에 어두워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내 진심어린 조언을 해드리겠소. 기분 나쁘게는 듣지 마시오.”

“말씀하시지요.”

“세상엔 공짜가 없소. 모든 것엔 대가가 있는 법. 지금 무한에서 용천관 생도들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한다고? 그게 마냥 공짜일 것 같소? 결국 그 또한 노리는 게 있는 상술이란 말이오. 여기서 노리는 것이 무엇이냐? 그건…… 음…… 복잡한 문제니까 어차피 말해도 모를 거요. 넘어가고. 아무튼 공짜 욕심을 부리다간 나중에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거요. 우리는 정직하게 장사하고 있소. 음식값이 뭐 좀 비싸긴 하지만, 그만큼 정성을 쏟아붓고 있지. 내 말 알아듣소?”

“예, 계속 듣습니다.”

“커험! 아무튼 그런 관계로 우리는 공짜 음식을 일체 제공하지 않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여기엔 바로 자존심이 걸려 있거든. 나는 요리도 명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명품이란 공짜일 수가 없지. 그건 내가 만든 예술을 스스로 평가 절하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흐음.”

“내 예술의 가치는 그렇게 하찮은 게 아니란 말이오? 알겠소? 내 요리 자체가 바로 명품이 되는 그 순간까지 나는 멈추지 않을 거요. 내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고 나의 기술이 예술이 되고, 그 예술이 지고한 가치가 될 때까지 자존감을 지키며 요리할 거란 말이외다. 그리하여 당당히 우리 반장이 고유명사가 될 수 있게 우뚝 설 것이란 말이오.”

“…….”

금왕과 진소홍이 멍하니 바라보는 가운데, 귀왕의 수하들이 낯빛을 붉히며 뭔 개소리냐는 듯 수군거렸다.

귀왕이 헛기침을 하고는 정리했다.

“어쨌든 그것이 내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요.”

그의 말이 맺어지자 귀소이들이 얼른 딴청을 부리며 흩어졌다.

왜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인가?

한데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짝…… 짝…… 짝……!

금왕이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귀왕도 어리둥절해서 금왕을 보았다.

‘응? 알아들은 건가? 나도 모를 내 말을……?’

금왕이 반짝이는 눈으로 경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훌륭하신 말씀입니다. 강호도처에는 인생 선배가 가득하다더니. 여기서 제가 배울 분을 뵙는군요. 덕분에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 뭐…… 도움이 됐다면 다행인데…….”

“과연 대세를 거스른다는 건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모험이 아닐 수 없지요. 하나 그 자존감이 분명 이 작은 반장을 크게 키울 거라 확신합니다.”

“어…… 뭐…… 고맙긴 한데…….”

“정말 뜻밖에도 귀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요즘 추진하는 사업에 대한 영감을 얻은 기분입니다. 전에 없이 막막하던 차였는데 가슴이 뻥 뚫렸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음……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래서 계산은……?”

“아, 제가 수행원과 따로 떨어져 딸과 오붓하게 보내려다 보니 미처 금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엉? 뭐야? 결국 먹고 튀겠다는 거야, 뭐야?”

“절대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제게 깊은 영감을 주신 은인에게 어찌 그런 무례한 짓을 하겠습니까? 죄송하지만 지금 제가 가진 게 이게 전부라서 괜찮으실지…….”

순간 귀왕은 물론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귀소이들도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고는 금왕의 손을 보았다.

‘저, 저건……!’

싯누런 금덩이!

그런데 가만…… 이 모양은 곰인가……?

‘아니, 어떤 미친놈이 금을 가지고 이런 장난을 친 거지? 진짜 금인 건 분명한데…… 가만! 설마 이건 금으로 만든 작품인가? 오색풍마상처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귀왕이 괜히 무식해 보일까 봐 헛기침을 하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작품이 무엇이오?”

“아…… 작품이라기에는 그저 곰 모양의 금덩이일 뿐입니다.”

“그럴 리가! 이건 분명 작품이오. 당신이 모를 뿐.”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면 이걸로 괜찮으실지요?”

그러자 귀왕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면서 소리쳤다.

“아니,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사람이 장난해? 이런 걸 갑자기 내밀면 거스름돈을 어떻게 주란 말이야? 안 그래도 파리만 날리는…….”

“아, 당연히 거스름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야 당연히 필요 없…… 엉? 쿨럭! 쿨럭!”

귀왕이 다시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금왕을 보았다.

귀소이들 역시 귀를 의심하며 시선을 모았다.

금왕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되는군요. 굳이 밥값만 받으시겠다는 그 신념. 하나 제게 영감을 주신 은인에게 드리는 사례입니다. 부디 사양치 말고 받아주십시오.”

귀왕이 눈을 끔뻑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정, 정말 이걸 내게 준다는 거요?”

“물론입니다. 제가 얻은 깨달음에 대한 대가로는 보잘것없지만…….”

“무슨 소리를! 다들 들었느냐? 여기 계신 귀인께서 우리에게 이 황금신웅보살(黃金神熊菩薩)을 밥값으로 내겠다고 하신다!”

“아…… 저 이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라 그저 곰 모양의 금일 뿐…….”

“아니.”

귀왕이 매우 진중한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엄청난 물건이 그냥 곰 모양의 금덩이일 리가 없소. 이건 분명 황금신웅보살이오.”

부리부리한 귀왕의 눈동자에서는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금왕은 거기서도 나직이 감탄했다.

‘아, 스스로 가치를 높이는 법이라니…….’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훌륭한 말씀이십니다. 많이 배웁니다.”

“귀인을 몰라보고 잠시 무례하게 군 점을 용서하시오!”

귀왕이 포권을 취하며 말하자, 금왕이 손사래를 쳤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감사드려야지요.”

“은공의 존함은 어찌 되시는지?”

“하하, 그저 무명의 촌부일 뿐입니다.”

“뭐, 촌부님도 아시겠지만 낙장불입이오.”

“예? 아, 예…… 허허.”

“그럼 살펴가시오. 자, 어서 가시오. 가서 푹 쉬시오.”

그렇게 귀왕이 금왕과 진소홍을 쫓아내다시피 떠밀었다.

금왕은 거듭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길을 나섰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금왕이 파안대소하며 돌아섰다.

“으하하하! 다들 보았느냐?”

“대단하십니다, 채주님!”

“도대체 무슨 조언을 하셨기에 저런 금덩이를 받으…….”

“쓰읍! 황금신웅보살이다.”

“아, 예. 무슨 조언으로 황금신웅보살을 받으신 겁니까?”

“그건 음…….”

귀왕이 우물쭈물거리자, 옆에 있던 다른 수하가 말했다.

“일전에 우리 젊은 주인께서 말씀하셨잖냐? 군자는 개소리에서도 철학을 찾아낸다고. 저 군자님이 채주님의 개소리에서 뭔가 철학 같은 걸 찾아내신 거겠…….”

따악!

귀왕이 수하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으르렁거렸다.

“하여튼 이 새끼는 날 닮아서 매를 번다니까.”

한편 이들에게 이런 소란을 던져준 금왕은 모처럼 딸과 함께 기분 좋은 밤길을 걸었다.

진소홍이 미간을 살짝 모으며 물었다.

“그런데 너무 대가가 큰 것 아니에요?”

“아니다. 그자가 한 말에서 이 아비가 얻은 영감은 겨우 금괴 몇 개의 가치가 아니란다. 그 가치를 잘 이용하려면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지. 안 그러면 부정을 탈 수도 있으니.”

“그 정도로 대단한 영감을 얻으셨다면, 대가가 더 커야 하는 건 아니에요?”

“하하. 그렇지만 그자는 정작 본인이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모르는 눈치였지 않느냐?”

“하긴…….”

“그러니 이 정도면 서로가 충분히 만족한 거래였다.”

“그러네요.”

진소홍이 해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문득 귀왕과 귀소이들의 엉뚱한 반응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기분 좋은 밤.

모처럼 만난 아버지께 자신의 안목을 인정받았고, 아버지는 돈으로 환산하기도 힘든 귀한 영감을 얻으셨다.

배도 부르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한 밤.

‘매일이 오늘만 같다면 좋겠어.’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바람은 낙엽 한 장을 사뿐히 실어 골목길을 한 차례 훑더니 벽을 따라 솟구쳐 올랐다.

마침내 지붕 위로 낙엽이 날아올랐을 때,

파스스스…….

거짓말처럼 낙엽이 바스러지더니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던 그곳에 검은 피풍의를 두른 신형이 신기루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전신에서는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피풍의로 머리까지 덮어쓴 그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 두 눈만 날카롭게 빛냈다.

사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저만치 걸어가는 금왕과 진소홍.

잠시 후.

스르르르……!

피풍의를 두른 사내가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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