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모든 것엔 대가가 있다
마침내 비무 대회 십육 강전이 모두 끝났다.
그야말로 대격변의 날.
만년 꼴찌를 자랑하던 용천관에서 무려 네 명이나 팔 강전에 올라갔다.
남궁천과 팽수혁, 윤종승, 그리고 진소홍까지!
진소홍은 무맹관 생도와 겨루게 됐는데, 남궁천의 조언을 적절하게 응용하여 무리 없이 다음 비무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선 ‘호구들의 반란 사건’이 워낙 놀라운 일인지라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긴 했다.
그 외에도 모용강, 운경, 백무극, 유현이 다음 비무로 진출했다.
그렇게 팔 강 진출자의 절반을 용천관 생도들이 차지했으니, 삼대 학관 중 용천관이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셈.
사람들은 이날을 승룡절(昇龍節)이라 불렀다.
말 그대로 용천관의 소룡들이 마침내 승천한 날!
무인뿐만 아니라 양민들도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입을 모아 용천관 소룡들에 대해 칭찬과 감탄을 늘어놓았다.
“나는 이제부터 용천관만 응원할 거야!”
“내 아들이 크면 용천관에 보내볼까?”
“누가 받아 준대?”
“하하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궁천을 비롯한 청룡반 네 사람은 하루아침에 용천관 영웅으로 등극했다.
본디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다.
약자가 역경을 극복하고 우뚝 서게 되면 저도 모르게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다.
저마다 그 모습을 보며 희망과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신들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그렇게 용천관 생도들의 대약진은 평범한 양민들도 희망과 설렘을 안고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무한의 객점이나 주루들은 하나같이 통 큰 행사를 진행했다.
바로 용천관 생도들에 한해서 모든 주류와 안주를 공짜로 제공하겠다는 것!
“와아! 이게 다 공짜라니!”
무림맹 인근 주루를 방문한 용천관 생도가 입을 한껏 벌리고는 감탄했다.
옆에 앉은 생도는 눈가를 손수건으로 콕콕 찍었다.
“아…… 눈가에 습기가…… 우리가 지금껏 이렇게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나?”
“이게 다 남궁천 덕분이야. 제일 극적이었잖아. 공식 호구에서 현재까지 무연회 최우수 성적을 거둔 생도!”
“공식 호구라는 말은 이제 꺼내지도 말자. 남궁천은 이미 내겐 희망이자 영웅이니까.”
“청룡반 녀석들도 지금쯤 후회하겠지?”
“그렇겠지. 진짜 평소에 남궁천을 괴롭힌 것들은 다들 재갈 물고 반성해야 해!”
생도 하나가 버럭 소리치자, 주루 한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이 슬며시 일어났다.
몇몇 생도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향하더니 노골적인 적개심을 품었다.
그 둘은 바로 송원교와 백리향이었던 것.
여론은 무서운 법이다.
남궁천을 영웅처럼 추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때 청룡반을 주름잡던 송원교와 백리향은 완전히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두 사람이 탁자 위에 돈을 올려두고 주루를 빠져나가려고 하자, 생도 하나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하여튼 쓰레기들이 우리 학관의 영웅도 몰라보고. 차라리 다 뒈져 버리는 게 낫지!”
“……!”
조용히 걸음을 옮기던 송원교가 입술을 콱 씹고는 멈칫거렸다.
‘이것들이……! 가만 가만 두고만 보니 정말 가마니로 보이나?’
이마에 핏대가 선 송원교가 딱딱한 표정으로 돌아서서는 생도들을 훑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무겁게 깔린 목소리. 치솟는 분기를 억누르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조금 전 소리친 생도가 스윽 몸을 일으켰다.
“나요.”
“쓰레기라고?”
“왜? 내가 틀린 말 했소? 혹시 그쪽이 그 쓰레기요?”
생도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일부러 모른 척하며 물었다.
그러자 주변의 생도들이 키들거리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이 새끼가……!”
송원교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성질 좀 죽이고 지냈더니 이젠 개나 소나 자신을 보고 짖어대는 꼴이지 않은가?
오냐, 오늘 날 제대로 잡았다. 기분도 엿 같은데 어디 한 번 놀아보자.
한데 누군가 그의 옷깃을 낚아챘다.
백리향이었다.
“백 소저?”
“그냥 무시해요. 저런 것들 하나하나 상대할 필요는 없잖아요?”
말을 꺼낸 백리향이 슬쩍 곁눈질로 다른 생도들을 가리켰다.
그제야 송원교는 주루에 가득 찬 생도들이 적개심을 품은 채 이쪽을 노려본다는 걸 깨닫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씨발…….’
송원교가 멈칫하는 사이 백리향이 생도를 향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학관에서 짓궂은 장난을 친 적 있지 않나요? 우리도 그저 장난일 뿐이었어요.”
“허! 나는 장난으로 동료를 사지로 몰아세운 적 없소만.”
“우리도 죽으라고 한 적은 없어요.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건 상대의 마음이죠.”
기가 막힌 궤변에 주루의 생도들이 저마다 입을 쩍 벌렸다.
그때였다.
“장난이라고?”
등 뒤에서 들린 서늘한 목소리에 백리향과 송원교의 몸이 동시에 얼음처럼 굳었다.
뚜벅뚜벅.
나직이 울리는 발걸음 소리.
소원교와 백리향이 뻣뻣하게 굳은 통나무처럼 돌아섰다.
“남, 남궁천……!”
짜악! 짜아악!
가까이 다가온 남궁천이 다짜고짜 송원교와 백리향의 뺨을 후려쳤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지켜보던 생도들은 여전히 턱이 빠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남궁천이 칼바람 같은 음성을 흘려냈다.
“미안. 놀랬지? 장난 좀 쳤어. 괜찮아?”
“……!”
송원교와 백리향이 차마 반격은 못하고 어금니를 꽉 씹는데, 남궁천이 싸늘한 조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비열하고 나쁜 새끼가 뭔 줄 알아? 이렇게 웃으면서 사람 죽이는 새끼야. 얼마 전 네놈들처럼 말이지.”
“미, 미안하다. 그땐 우리가…….”
짜악! 짜악!
다시 번개처럼 날아든 손찌검에 송원교와 백리향이 다시 한번 휘청거렸다.
지켜보던 생도 중 한 명이 술잔을 떨어뜨려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 자. 웃어. 장난이라니까? 참고로 그 사과 안 받는다. 네놈들이 마지못해 하는 그 사과, 전혀 진심이라고 생각지도 않아. 행여 진심이더라도 용서할 생각도 없고. 알겠어? 원래 사과는 쉽지만, 용서는 씨발 존나게 어려운 거거든.”
“…….”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지. 설사 네놈들이 개과천선했다고 치자. 그래도 내 아들…… 아니, 내가 겪은 지옥을 몇 배로 겪고 죽고 싶어질 때까지 감당해야 할 거다. 그래야 공평한 세상이지. 안 그러냐?”
남궁천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두 사람의 표정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해쓱해져갔다.
“앞으로 두고 봐라. 너희들 인생에서 출세의 기회란 결코 없을 테니까. 무엇을 하든 네놈들이 저지른 짓이 족쇄처럼 따라 붙을 거다. 아직은 실감이 안 되겠지. 집안 빵빵하고, 뭐, 지금 내 위치도 위협적이진 않으니까. 여차하면 덮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군. 하지만 내가 그렇게 안 둘 거야. 네놈들에게 출세 기회가 생길 때마다 지울 수 없는 꼬리표가 따라붙도록 만들 거야. 대살성의 낙인보다 더한 낙인이 네놈들 마빡에 새겨질 거다. 그래서 온 세상이 네놈들을 외면하도록. 강호에서 네놈들이 결코 기를 펴고 살 수 없도록 만들 거다.”
“……!”
송원교와 백리향의 안색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다른 이가 말했더라면 코웃음을 쳤으리라.
하나 상대가 남궁천이라서 허세로 들리지 않는다.
용천관 공식 호구에서 하루아침에 용천관 영웅으로 거듭난 자.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보고 나니, 그가 그렇다면 정말 그럴 것 같다.
등줄기를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아난다.
남궁천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직이 읊조렸다.
“그러니 이번 생은 욕심 부리지 말고 얌전히 찌그러져서 지내. 죽어서 백골이 될 때까지. 조금이라도 날아 보려다간 지옥보다 더 깊이 추락하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뭐, 세상에 외면당하는 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면 어디 한 번 화끈하게 설쳐보던가?”
남궁천의 말이 끝났지만 송원교와 백리향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저주에 가까운 그 말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주루를 가득 메운 생도들의 시선에서 온갖 힐난과 비난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꺼져.”
남궁천의 말이 떨어지자 송원교와 백리향이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억지로 옮겼다.
두 사람이 주루를 막 벗어나기 직전, 남궁천이 다시 말을 뱉었다.
“아, 참고로 내가 뒤끝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냐. 다 정의 구현을 위해서지.”
그렇게 두 사람이 문밖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한참을 침묵하던 생도들이 어느 순간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공교롭게도 딱 그 순간 윤종승이 주루로 들어섰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윤종승이 생도들을 보며 헤픈 미소를 짓고는 손을 흔들었다.
“아, 예. 예. 흐흐. 다들 감사합니다. 흐흐.”
그 모습에 몇몇 생도가 웃음을 터뜨렸지만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남궁천이 윤종승을 불러 함께 자리에 앉았다.
“처맞느라 고생했으니 골라. 오늘은 내가 쏜다.
“오! 정말? 아니 잠깐…… 오늘은 원래 공짜 아냐?”
남궁천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혀를 찼다.
“눈치는 빠르군.”
* * *
무림맹에서 조금 떨어진 반장에서도 조촐하게 자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금왕과 진소홍이었다.
금왕은 딸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더 좋은 걸 사 주고 싶었다만.”
“좋은 건 평소에도 실컷 먹잖아요. 여기 국수를 먹고 싶었어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은근히 맛집이거든요.”
“허허, 그래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이 아비가 다 배부르구나.”
“아버지도 드셔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그래, 그래.”
금왕이 국수를 몇 젓가락 먹었다. 확실히 딸의 말대로 맛이 꽤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더 딸을 바라보고 싶었다.
금왕이 빙그레 웃었다.
“이 아비는 진심으로 놀랐다. 네가 이렇게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고마워요, 아버지.”
“정말 대단했다.”
“별말씀을요.”
“음……? 너 말고 남궁천을 말한 건데.”
“뭐라고요? 제가 비무에서 이긴 걸 말한 게 아니었어요?”
진소홍이 눈을 곱게 흘기자 금왕이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미안하구나. 너도 정말 대단했다. 하지만 남궁천이 워낙 돋보여…….”
찌릿.
진소홍의 가자미눈을 뜨자 금왕이 얼른 말을 끊고 국수를 들이켰다.
그 모습에 진소홍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금왕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는 칭찬했다.
“우리 딸도 대단했지. 아주 훌륭했어.”
“치이, 됐어요. 아버지는 거짓말이 너무 서툴러. 그렇게 속내가 다 보이는데 사업은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녀석아, 너에게만 서툰 거야. 네가 내 유일한 약점이지.”
“피이.”
“너도 언젠간 자식을 낳아보면 알 게다. 그러고 보니 언제 이렇게 컸누…… 금괴를 녹여 곰 인형을 만들어달라고 조를 때가 엊그제 같은데.”
눈시울이 촉촉해진 금왕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살짝 찍더니 말을 이었다.
“오늘은 정말 대단했다.”
“네네, 저 말고 남궁천요.”
“아니, 너 말이다.”
“그래 봐야 남궁천에 비하면…….”
“그 말이 아니야.”
“……?”
“잠룡을 알아보는 눈.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순간 진소홍이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요? 아직 비무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물론 더 지켜볼 여지는 있어.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실제로도 두드려 볼 거고. 급한 문제는 아니니까.”
“그렇죠.”
“하나 내게 시간이 없고 당장 결정해야 할 문제라면…… 역시 그 아이가 잠룡이라는데 운명을 걸 것 같구나.”
“역시!”
진소홍이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는 건 거의 팔 할 이상 확신하는 것이라 봐야 했다.
금왕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나 이후가 문제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아요.”
“그래. 잠룡을 타고 승천하느냐, 잠룡의 몸부림에 휩쓸려 버리느냐의 문제지. 잠룡도 분명 용이다. 용이 내 집 안마당에서 몸부림을 치면 풍비박산 나는 건 일도 아니지. 그만큼 위험한 일이야.”
“명심할게요, 아버지.”
“너라면 잘 해나갈 거라고 믿는다. 이 아비는 한 걸음 물러나서 지켜보도록 하마.”
금왕이 든든한 눈길로 딸을 보았다.
분명 쉽지 않은 여정이 되리라.
하나 정말 남궁천이 잠룡이라면…… 그리고 딸이 그 잠룡을 타고 함께 승천할 능력이 있다면…….
‘앞으로는 달라진 위치에서 세상을 보게 되리라.’
“그나저나 다음 상대는 유현이었지?”
“네, 무맹관 생도이자, 화산파의 제자예요.”
“허허, 모용강과 더불어 가장 어려운 상대로구나.”
“맞아요. 하지만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요.”
“그래,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네, 아버지.”
“그러고 보니…… 남궁천의 다음 상대가 모용강이었던가?”
“그럴걸요?”
“어째 대답에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구나.”
진소홍이 그릇에 남은 육수까지 깨끗하게 비워 버리고는 활짝 웃었다.
“그야 제가 찜한 잠룡이 압도적으로 이겨 버릴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