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이렇게 또 하나 배웁니다
‘내, 내가 준결승……! 준결승이라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정말 당우기가 지고 그 맹해 보이는 백무극이 다음 비무 상대로 올라왔다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내가 준결승에도!’
상상만 해도 괜히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온다.
그런 윤종승을 남궁천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많이 웃어 둬라.’
사실 한 가지 속인 건 있다.
당우기가 실수로 졌다는 말.
물론, 관전자 대부분은 당우기가 실수로 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 눈썰미가 좋은 고수들은 당우기가 실력 차이로 졌다는 것을 바로 알아보리라.
백무극의 무공은 좀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전체적으로 정공법에 가깝지만 이따금씩 펼쳐지는 허초와 변초는 뒤통수를 때릴 만큼 기발하다.
하나 그걸 다시 또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리 신통한 수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묵묵히 펼치는 도초가 워낙 정공법에 가까우니 약간만 비틀어도 엄청난 차이처럼 느껴질 뿐.
‘그보다 중요한 건 공력의 흐름이지.’
남궁천은 백무극의 비무를 지켜보면서 그가 어떻게 내공을 운용하는지 초견파공안으로 세밀히 살폈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공력이었지.’
그야말로 바람처럼 물처럼 때론 바위처럼 흐르거나 멈추는 내력이었다.
그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공을 펼치는 게 아니라 언뜻 별생각 없이 칼을 휘둘러대는 것처럼 보일 지경.
이런 기의 흐름을 가장 잘 이용하는 문파가 있다.
바로 무당파다.
도가의 극의를 추구하는 무당파.
짙은 도가 특성 때문에 어지간해선 맹의 일에도 개입하지 않고, 무한의 어느 학관에도 제자들을 보내지 않지만, 무공만큼은 소림과 함께 태산북두로 불리는 이들.
무당파는 공력의 흐름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두며 몸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 물처럼, 바람처럼, 바위처럼. 그야말로 무위자연을 추구한다.
하나 무당파의 무공이 점점 강맹해지면서 그들 역시 공력의 흐름에 인위성이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그들을 강하게도 만들어주었지만, 궁극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되기도 했고.
그런데…….
‘그 녀석은 무당파의 내공 운용 방식에서 그 인위적인 강맹함을 덜어낸 것 같은 기분이란 말이지.’
언뜻 무당의 태극신공(太極神功)처럼 보이지만 결이 비슷할 뿐 완전히 다른 심법으로 움직였다.
‘이름 모를 지방 방파 출신이라더니…….’
과연 무공의 질은 사람이 결정하는 법이던가?
지방 방파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그렇고 그런 심법이 백무극에게는 꼭 맞는 옷이었던 걸까?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개량되었을 지도.
‘이러나저러나 아직은 확실한 게 없군.’
백무극의 무공을 자세히 파악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반각도 채우지 못해 장외 실격이라니.
“당우기 그 병신 같은 게 조금만 더 버텨줬더라면…… 쯧.”
“응? 당우기가 버티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말하는 건 마치 백무극이 당우기보다 훨씬 강하다는 뜻처럼 들리는데?”
“그럴 리가.”
남궁천이 딱 잘라서 고개를 저었다.
괜히 여기서 윤종승을 주눅 들게 해봐야 좋을 게 없기에.
지금 윤종승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 그리고 이길 수도 있다는 착각.
‘그래, 그 착각을 제대로 심어둬야지.’
하나 윤종승은 집요했다.
“야, 아닌 게 아닌데? 너 분명히 당우기가 조금 더 버텨줬더라면…… 하고 말했잖아? 마치 당우기가 원래 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처럼.”
“기분 탓이야.”
“엥? 세상에 기분 탓이 뭐 그런 게 있어?”
“자, 네가 지금부터 해야 할 건 준결승을 향해 부지런히 수련하는 거야.”
“그, 그렇지. 준결승!”
윤종승은 뭔가 얼렁뚱땅 넘어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꿈만 같은 ‘준결승’이라는 말에 취해 더는 따지지 않았다.
“근데 정말 네 말대로 하면 내가 무조건 준결승에 진출하는 거야?”
“세상에 ‘무조건’이 어디 있나? ‘반드시’라는 의지만 있을 뿐이지. 열심히 해서 반드시 진출하도록 해.”
“그래, 알았어. 반드시!”
“좋아, 그 각오다. 그럼 시작하지.”
“잠, 잠깐만!”
“또 뭐야?”
“내, 내 무기는? 넌 칼을 들고 싸우는데…… 난……?”
“말했지? 넌 권사가 잘 맞아.”
“물론 주먹으로 싸우는 것도 좋지만 앞에서 칼 들고 휘둘러대면 맨살로 어떻게 막아?”
“못 막으면 피해야지.”
“아, 그렇지만…….”
“그간 본 가가 몰락하면서 반사이익을 제법 봤다고 들었는데? 가죽 토시 하나 정도는 사지 그래? 권사라면 그 정도는 차고 다녀야지.”
“흐음. 가죽 토시라…… 황보승이 차고 있는 것처럼 말이지?”
“그래.”
물론 권사라고 모두 그런 걸 차고 다니는 건 아니다.
특히 고수들일수록 토시를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여긴다. 진짜 고수라면 내공만으로도 충분히 몸을 보호할 수 있으니까.
‘아니면 허세 때문에 착용하지 않던가.’
하지만 윤종승의 실력이 남에게 과시할 정도는 절대 아니니까 초보답게 토시를 착용하는 게 좋을 것이다.
윤종승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한테 말해봐야겠네.”
“그건 나중에 알아서 하고. 일단 덤벼라. 칼등으로만 상대해 줄 테니까.”
“아, 알았어.”
윤종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갑자기 수련을 하자니까 좀 이상하긴 했지만 언제 또 남궁천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 당장 응하는 게 좋으리라.
“간다! 이여업!”
윤종승이 기합성을 터뜨리며 바닥을 차고 달려 나갔다.
순간 남궁천은 대연무장에서 보았던 대로 백무극의 운공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단전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경맥을 따라 질주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바람처럼 물처럼 때론 바위처럼.
‘확실히 직접 움직여 보니 또 느낌이 묘하군.’
완전한 정공법.
하나 남궁천에게는 왠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 든다.
평생 근본 없이 도망자로 살았던 삶이다.
거기에 초견파공안 덕분에 이런저런 잡다한 무공을 섞어서 익혔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정직한 무공은 왠지 어색하다.
게다가 이 정공법…….
‘왠지 공력이 낭비되는 느낌이란 말이지.’
조금 다듬으면 더 정교하고 우수한 무공이 될 것 같은데, 이상하리만치 공력이 낭비된다.
파밧! 팍! 팍!
윤종승은 매섭게 남궁천을 휘몰아쳐갔다.
‘뭐야? 생각보다 할 만한데?’
윤종승의 눈빛에 자신감이 살짝 깃들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상대해 준다고 했을 때는 또 흠씬 두드려 맞을 걸 각오했는데, 의외로 여유가 있다.
‘그럼 이쯤에서 혁련장을!’
마침 남궁천의 움직임이 다소 굼뜨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윤종승이 오른발을 빳빳하게 지탱하면서 내공을 재빨리 운기했다.
파밧!
윤종승의 단전에서 일어난 공력이 수태양소장경을 따라 맹렬히 질주했다.
하나 남궁천은 그 과정을 눈으로 보지 않았다.
지금 남궁천은 어디까지나 철저하게 백무극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슈우우우욱!
윤종승의 일장이 옆구리를 향해 빠르게 날아드는 순간, 남궁천이 몸을 비틀면서 도를 사선으로 그었다.
쉬이이이잇!
어느 쪽이 빠를 것인가?
당연히 근거리에서 내뻗은 장법이 더 빠를 터였다. 적어도 윤종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남궁천과 두 눈이 마주친 순간 묘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무상무념에 가까운 그 눈빛을 마주하자 단단하게 다졌던 심지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헛!”
윤종승이 헛바람을 삼키면서 얼른 정신을 차렸다.
반면 남궁천은 윤종승이 멈칫한 찰나를 이용해서 공력의 흐름을 살짝 바꿨다.
남궁천의 눈빛, 윤종승의 흔들림, 남궁천의 운기 변화가 맞물리면서 아주 작은 차이가 흐름을 단박에 비틀었다.
앞뒤 꽉 막힌 사람처럼 오로지 정공법만 펼치던 남궁천의 움직임이 일순 대비효과 때문에 더욱 화려한 변초처럼 보였다.
쉬이이잇, 퍼억!
“크억!”
윤종승은 묵직한 통증이 옆구리에서 퍼지는 걸 느끼며 물러났다.
파바밧!
“헉, 헉, 헉!”
겨우 중심을 잡고 멈춰 섰는데 속이 메스껍고 구토가 치밀었다.
남궁천이 칼등으로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칭찬했다.
“지금 좋아. 그렇게 맞아야 해. 역시 매도 맞아본 놈이 그 맛을 아는 법이지.”
“헉, 헉……! 그럼 이번에도 똑같은 작전이야?”
“한 가지 더 있다.”
“뭔데……?”
“그 녀석 눈을 보지 마.”
“그건 왜?”
“힘 빠지니까.”
“아…….”
윤종승이 왠지 모를 수긍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백무극은 보는 사람이 힘 빠질 것 같은 표정이긴 했으니까.
긴장이 저절로 풀어지는 표정.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남궁천이 그런 눈빛이지 않았나?
‘뭐야? 남궁천. 넌 그런 것까지 흉내낼 수 있는 거냐?’
분명 눈을 마주치는 순간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흡성대법으로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에이, 설마…….’
윤종승이 흠칫거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그래, 흡성대법이라니. 지나친 생각이겠지.
윤종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주먹을 쥐며 기수식을 취했다.
반면 남궁천은 조금 전 윤종승과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 녀석이 한 것처럼 운기하면…….’
상대의 기운을 일시적으로나마 흔들 수 있게 된다.
흡성대법? 그런 건 아니다.
남궁천도 처음 보는 무공이다. 아니, 무공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능인가? 초견파공안처럼……?’
그런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초견파공안은 타고나야 하는 체질과 같다. 절대음감이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닌 것처럼.
한데 방금 윤종승의 마음을 흔든 것은 분명 운공을 통한 효과였다.
‘그렇다면 역시 무공으로 봐야 하나?’
그런데 눈빛만으로 상대의 공력을 흩트리는 게 가능한가?
무슨 음공도 아니고.
가만……?
‘공력과 함께 시각적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드는 거라면…… 환술(幻術)?’
가능성이 있다.
완전히 허상을 보게 만드는 환술이라면 꽤나 심후한 공력이 필요하겠지만, 상대의 공력을 살짝 흩트리는 정도라면……!
‘어쩐지 낭비되는 공력이 있는 것 같더라니! 방금 내가 사용한 게 환술이었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다.
환술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백무극의 사문이 환술에 능한 곳일까?
어쨌든 중요한 건 백무극에게 환술이라는 무기가 있다는 것과 그 환술이 눈을 통해 발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환술을 또 익혔다는 거지.’
뜻밖의 수확이다.
이번에 익힌 환술은 여느 무공과 달리 제삼자에게 들킬 위험도 적다. 당한 사람조차 영문을 모를 정도이니 말 다 한 게 아닌가?
‘심지어 사용한 나조차도 환술인지 뭔지를 몰랐어.’
어찌 보면 별것 아닐지라도, 고수의 영역으로 올라갈수록 이런 사소한 환술이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법.
남궁천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내가 이렇게 배움에 있어서 항상 열려 있는 자세란 말이지.’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웁니다.
그리고 배웠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복습하고 써먹어야지.’
남궁천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덤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