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이렇게 또 하나 배웁니다
“백무극, 승!”
모용신의 선언.
관전자들은 모두 입을 딱 벌렸다.
더 이상의 이변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관전자들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
당우기와 백무극의 대결.
천하를 호령하는 사천당가가 아닌가?
게다가 정협관에서 모용강 다음으로 강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당우기다.
그런데…….
“져, 졌어? 그 당우기가?”
“이게…… 뭐야? 저게 말이 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저 녀석…… 백무극이라고 했던가? 지나치게 운이 좋은 것 아냐?”
“이 비무는 무효다! 다시 해라!”
정협관 생도들이 잔뜩 성을 내며 소리쳤다.
그들뿐만 아니라 관전하러 온 양민들도 이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보게, 사천당가라면…… 그 독과 암기로 유명한 곳 아니었나?”
“그런 걸로 아는데…….”
“무림맹 대표 무력 집단인 적랑단주가 사천당가의 장녀라지?”
“그런 걸로 아는데…….”
“하면 저 아이가 차기 가주가 될 몸이고…….”
“그런 걸로 아는데…….”
“아니,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왜 나한테 그러나? 나도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걸!”
“제길! 난 돈을 다 잃었어! 집에 가면 마누라한테 맞아 죽게 생겼다고!”
관전자들의 고함 소리와 욕설, 비난과 환호성이 마구 섞여서 장외로 떨어진 당우기의 귀로 날아들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자는 바로 당우기였다.
‘이게…… 도대체 뭐야?’
그는 퀭한 눈으로 백무극을 올려다보았다.
백무극은 비무대 위에 우두커니 서서 어딘지 맹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깃들지 않는 얼굴.
그가 말없이 포권을 하더니 몸을 돌리고는 걸어갔다.
‘뭐야? 너…… 어딜 가는 거야? 아직 안 끝났다고! 난 아직…….’
순간 당우기가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을 차고 비무대 위로 솟구쳐 올랐다.
“이렇게 멀쩡하단 말이다!”
쉭쉭!
품에서 꺼내 던진 암기가 허공을 할퀴면서 날카롭게 날아갔다.
귀빈석에서 이를 지켜보던 당예설이 벌떡 일어났다.
‘저 멍청한……!’
쒸쒸에엣!
두 자루의 암기가 곧장 백무극의 등으로 향했고, 지켜보던 관전자들은 저마다 숨을 멈추고는 눈을 부릅떴다.
여태 이런 경우가 있었던가?
몇 년 전, 패배를 인정하지 못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생도는 있었다.
또 끝까지 싸우겠다며 우기다가 영구 장애를 입고 단전까지 폐쇄돼 강호를 떠난 생도도 있었고.
하나 지금처럼 패배가 분명함에도 상대를 공격하는 자는 없었다.
두 자루의 비수가 마침내 백무극의 등 복판에 박히려는 순간,
번쩍!
한 줄기 빛이 터져 나오더니 금속성과 함께 암기가 튕겨져 나갔다.
따다앙!
푸푹!
튕겨 나간 암기가 비무대 한쪽에 나란히 박혔다.
백무극의 등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심사관 모용신이었다.
그가 날카로운 눈매로 당우기를 응시했다.
“당우기, 다시 말한다. 장외 실격이다.”
“……!”
“내려가라.”
“인…… 인정할 수…… 인정할 수 없습니다!”
“비무는 끝났다.”
“젠장! 난 아직 멀쩡하다고요! 단순히 실수였단 말입니다! 기회를 한 번 더 주십시오! 애초에 장외 실격 따위를 왜 규칙으로 만든 겁니까? 실전에서는 그런 것도 없지 않습니까?”
“추하군.”
“……!”
모용신이 진심으로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자 당우기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이를 지켜보던 당예설은 입술을 꾹 씹었다.
‘그만 내려와, 우기!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
하나 그녀의 속내까지 들을 수 있는 당우기가 아니었다. 아니, 들었다고 한들 그녀의 말을 들을 동생이 아니었다.
당우기는 눈이 뒤집혀서 외쳤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대로 비무를…….”
“비무대에서 반각도 버티지 못한 게 실력이 아니면 뭐지?”
모용신이 차갑게 묻는 말에 당우기는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반각.
그랬다.
당우기와 백무극의 비무는 반각도 채 지나지 않아서 결판이 났다.
그 반각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암기를 날리고, 독까지 풀었다.
그러다가 백무극이 휘두르는 칼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물러났다.
생각보다 한 수가 있다 싶었지만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다만 좀 답답하긴 했다.
암기를 뿌리려고 해도, 하독(下毒)을 하려고 해도 웬만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충분히 막을 수 있지만, 반격의 기회도 좀처럼 없었다.
백무극 특유의 맹한 표정도 시간이 흐를수록 짜증이 났다.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비무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물러나면서 적당히 상대하는데 일순 보법이 뒤엉켰다.
때마침 가슴을 향해 짓쳐드는 칼을 보고 피하려다가 넘어지고 만 것이다.
하필이면 장외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당우기가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그런 당우기를 보며 모용신이 차갑게 일렀다.
“실전이었다면 넌 장외 실격이 아니라 삶에서 실격당했겠지. 비무 중이었다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한쪽 입매를 치켜 올린 모용신이 흘깃 귀빈석의 당예설을 보았다.
당예설은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당우기만 노려봤다.
‘바보 같은 녀석! 아버지…… 저런 녀석이 본 가의 소가주입니다. 그럼에도 저보단 저 녀석을 선택하신 겁니까? 단지 제가 여자라는 이유로? 그렇다면 저도 이곳에서 입지를 다질 수밖에요. 아버지가 후회하실 만큼 여기서 성공할 겁니다.’
한편 승리 통보를 받은 백무극은 만사에 무관심한 표정으로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대연무장을 빠져나가기 직전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관람석을 빼곡하게 메운 사람들.
그런데 그중에서도 그의 시선이 날아든 곳에는 남궁천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남궁천…….’
‘호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고는 그 시선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제법이지 않은가?
이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정확히 자신을 가려냈다.
‘감이 좋은 녀석이군.’
그렇게 잠시 시선을 교환한 백무극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서는 대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걸음을 옮기려는데 마침 용천관 생도들 몇 명이 다가와 말을 건넸다.
“남궁천! 정말 대단하다! 진짜 몰라보게 강해졌어!”
“맞아! 넌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도 언젠간 너처럼 될 수 있겠지?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생도들이 떠들어대는 말에 남궁천이 차갑게 웃었다.
한때는 호구 생활을 수수방관하거나 간접적으로 동참하던 이들이 이렇게 안면 몰수하고 달라진 태도라니.
아직 어려서 그렇다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입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야 하지 않나?
그 정도의 사리분별도 안 되는 녀석들이라면 언젠간 더 큰 사고도 칠 녀석들이리라.
진짜 옛날 성질 같아서는 말이 아니라 주먹이 먼저 날아갔겠지만…….
“나처럼 된다는 건…… 용천관 공식 호구가 되고 싶다는 건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고. 그게 아니면 대살성의 자식이 되고 싶은 거? 그럼 다시 태어나야 하지 않을까?”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주변 분위기가 대번 어색해졌다.
“아…… 그게 우리는 그저…….”
“야, 남궁천! 그래도 말이 너무 심하잖아! 우리가 이렇게까지 널 인정해 주는데 굳이 지나간 일을 들먹일 필요가 있어? 마음을 좀 넓게 가지고…….”
“한마디만 더 하면 줘 패 버린다.”
“뭐? 남궁천! 적당히 해. 네가 달라졌듯이 우리도 널 대하는 게 이젠 달라졌으니…….”
퍽!
창졸지간 날아든 남궁천의 주먹에 생도의 안면이 무참히 뭉개졌다.
“커윽!”
쿠당탕탕!
그대로 쓰러진 생도가 바닥을 구르며 코피를 줄줄 쏟아내자, 주변의 생도들이 흠칫거리고는 물러났다.
남궁천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생도들을 둘러보았다.
“내가 두 번 말하는 걸 좀 싫어해. 참, 내가 달라져서 너희들도 달라졌다고? 미안하지만 나는 그대로야. 내가 뒤끝이 없는 인간이긴 하지만, 은원 관계는 분명히 가리는 편이지. 그게 정의로운 세상 아니겠냐?”
“남궁천…….”
“네놈들이 날 인정하든 말든 관심 없다. 인정해 달라고 한 적도 없고. 하지만 적어도 양심은 가지고 살아라, 이 새끼들아.”
말을 마친 남궁천이 바닥에 침을 탁 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지간하면 좋게 대해주고 싶었지만 역시 아들을 괴롭히는데 동참하거나 방관했던 이들이 아닌가?
그래, 뭐 다 좋다 이거야.
송원교와 백리향의 눈치를 살피느라 쉽게 대항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지.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고 저렇게 태도를 싹 바꾸는 게 자랑인가?
아오, 역시 곱씹을수록 안 되겠다.
남궁천이 휙 돌아서더니 한 명씩 돌아가며 주먹을 날리자, 생도들이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후우, 조금 상쾌해진 기분.’
이 와중에도 깔끔하게 한 대씩만 때린 건 역시 내가 뒤끝 없는 남자라는 방증이지.
남궁천이 손을 털고는 비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백무극이라. 한 번 시험해 볼까? 다음 상대가 아마 윤종승이었지?’
* * *
“드르렁…… 쿠울……!”
코고는 소리가 방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침상에 대자로 뻗은 윤종승은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온몸에 멍이 든 몰골로만 보면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잠에 빠져 있었을까?
툭!
뭔가가 가슴을 치는 감각에 윤종승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허억! 뭐, 뭐야? 아그그……!”
하필이면 피멍이 든 부위였던지라 윤종승이 몸을 꼬며 가슴께를 문질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남궁천이 옆에 와 있었다.
남궁천이 벽라검을 들고 윤종승의 아픈 부위만 골라서 쿡쿡 찔러댔다.
“지금 잠이 옵니까?”
“헉! 윽! 그, 그만……! 진짜 아프단 말이야. 아윽!”
“이제 그만 처자고 일어나라. 다음 비무 준비해야지.”
“아…… 다음 비무…….”
윤종승이 씁쓸하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남궁천이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왜? 자신 없어?”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텼지만 솔직히 다음 판은 질 것 같다.”
“싸우기도 전에 질 생각부터 하다니. 정신 상태가 글러먹었군. 그 정신머리를 내가 이참에 싹 뜯어고쳐주지.”
“갑자기 왜 그래? 언제는 강해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해도 튕기기만 하더니.”
“왜? 싫어? 그럼 한심하게 처발리다가 대패하든지.”
남궁천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윤종승이 얼른 붙들었다.
“아, 아냐! 그런 건 아냐! 가르쳐줘! 뭐든!”
“이제 정신이 좀 들었나?”
“그래, 네 말대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다음 비무가 고작 사흘 남았는데.”
“사흘 중 하루가 거의 다 지나갔어. 그럼 무복 갖춰 입고 나와라.”
“알았어!”
윤종승이 헐레벌떡 일어나서는 옷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저 깐깐한 남궁천이 갑자기 왜 자신에게 친절하게 무공을 가르쳐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남궁천……! 나도 너만큼 강해질 거다!’
윤종승이 밖으로 나오자 남궁천이 도를 들고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윤종승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웬…… 도?”
“다음 네 상대가 사용하는 게 도니까.”
“응? 당우기가 도를 썼어?”
“아직 모르는구나.”
“뭘?”
“너에게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뭔, 뭔데?”
“당우기가 비무에서 졌다. 백무극이 너와 팔 강전에서 붙게 됐어.”
“뭐라고……?”
윤종승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우기가 지다니.
“진, 진짜 그 당우기가 졌다고? 어째서? 왜?”
“멍청하게 흥분해서 덤벼들다가 실수를 했거든.”
“실수라니…….”
“발을 헛디뎌서 장외 실격됐어. 그러므로 넌 운이 아주아주 좋은 거지.”
윤종승은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남궁천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생각해 봐라. 네가 준결승까지 올라간다면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냐? 이건 절호의 기회지. 당우기가 실수해서 졌으니 밥상이 차려졌다 이거야. 설마 걷어찰 생각은 아니지?”
“정말로 당우기가…….”
“글쎄, 그렇다니까. 이제 내가 매우 친절하게 숟가락까지 얹어줄 테니 너는 밥이나 퍼 먹어.”
뭐, 쉽진 않겠지만.
남궁천이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