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70화 (70/508)

70. 잠룡(潛龍)

잠룡이다.

틀림없는 잠룡이다.

지금까지 남궁천의 행보와 그가 받은 느낌은 그렇게 뇌리를 울리고 있었다.

잡아야 한다! 반드시……!

금왕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남궁천을 빤히 보았다.

확실히 남궁가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가문이 몰락한 근원이나 다름없는 남궁천, 그리고 이를 원망하는 듯한 남궁표, 조카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는 남궁화, 마지막으로 속을 알 수 없는 남궁검.

참으로 미묘한 조합이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남궁천이 바짝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지내야 하리라.

한데 남궁천은 그러지 않는다.

지금 뭐? 소가주의 자리를 달라고?

‘허!’

남궁가와 연이라고는 전혀 없는 금왕이 듣기에도 기가 찬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확신했다.

잠룡!

진정한 잠룡은 범인의 생각을 늘 뛰어넘게 마련이다.

다만 무작정 의외의 모습만 보인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돌발 발언을 할 때의 태도와 표정, 말투에서 잠룡의 기운이 뿜어지게 마련이다.

바로 지금처럼!

그리고 보통 이런 경우 범인들은 그 잠룡의 기운을…….

“방금 뭐라고 했느냐?”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금 남궁표처럼.

그가 눈썹을 팔자로 그리며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묻지 않느냐! 방금 뭐라고 한 것이냐?”

남궁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퍽 터져 버릴 홍시처럼 발갛게 익어 있었다.

남궁천이 무심한 눈길을 남궁표에게 던졌다.

‘무슨 애새끼 눈빛이……!’

남궁표가 미간을 파르르 떨었다.

다그쳐 묻긴 했지만 그는 분명 남궁천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뭐? 소가주 자리를 달라고?

‘이런 미친 사생아 녀석 같으니라고……! 본 가가 누구 때문에 기울어져 가는데? 감히 네놈 따위가……?’

주변에 사람들만 없으면 대번에 귀싸대기를 올려붙였으리라.

지금 저 냉혹한 눈빛은 필시 대살성의 피를 이었기 때문이리라.

남궁천 입이 다시 열렸다.

“남궁세가의 소가주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뭐, 뭐라……? 익……!”

남궁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남궁천이 다시 남궁검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저를 후계자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이제 남궁표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남궁화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렸고, 금왕은 이 모든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남궁검은 물속에 가라앉은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남궁표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뭐 하십니까? 형님! 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듣고만 계시다니요!’

당장에라도 따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지만 남궁검의 성품을 알기에 잠자코 기다렸다.

마침내 남궁검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이런 자리에서 그리 간단히 말할 문제가 아니다.”

미묘한 대답.

완곡한 거절 의사인지, 나중에 따로 말하자는 건지 헷갈린다.

한데 남궁천은 여기서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거침없는 발언이 계속됐다.

“어차피 기울어져 가는 가문이지 않습니까? 소가주가 되려는 사람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이번만큼은 남궁검도 미간을 슬쩍 구겼다.

결국 참다못한 남궁표가 버럭 성을 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만인의 지탄을 받는 남궁세가주가 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일이지! 아닌 말로 성을 갈 수 없어서 그저 참고 견디는 본 가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그게 다 네놈 아비 때문이다! 네 어미를 홀려서 본 가를 패가망신하게 만든 그 후레자식 때문이지! 네가 정녕 그걸 모르고 이딴 망발을 지껄이는 것은 아닐 테지? 지금 대살성의 사생아에게 본 가를 넘기라는 것이냐?”

자루에서 콩을 쏟아내듯 말을 퍼부어댄 남궁표가 어깨까지 들먹이며 씨근거렸다.

하나 남궁천은 처음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표정으로 남궁표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금왕이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성격은 조부를 닮아 버린 건가?’

남궁천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뭐?”

“절 대살성의 사생아로만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게 숙조부께서 절 보는 시선입니까? 아니면 세상이 보는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시는 겁니까?”

“네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냐? 세상이 너를 가리켜 부르는 말은 세상이 그리 인정했다는 뜻이다. 한낱 네깟 놈이 세상의 이치를 거스른다고…….”

“언제부터 남궁세가가 세상에 끌려가는 가문이 된 겁니까?”

“뭐라?”

“가문이 몰락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씀하고 싶으십니까? 그건 아니겠지요. 세상이 무시한다고 본 가의 자존감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실 테지요.”

“닥쳐라! 네놈이 뭘 안다고 감히……!”

“잘 모릅니다. 다만 남궁세가가 세상을 이끌어가던 가문이라는 사실 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한데 이젠 세상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그 꽁무니나 졸졸 따라가는 겁니까?”

“무슨 헛소리냐!”

“헛소리가 아니지요. 지금 숙조부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존감도 버리고 조카에게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말을 스스로 하시다니요? 세상이 인정한 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아닙니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입니다. 세상에 순응하면서 정해진 길만 가시겠다면 차라리 남궁의 성씨를 버려 버리는 게 어떻습니까?”

“이노오오옴! 네놈이 감히 지금……!”

“저는!”

순간 남궁천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관람석에서 울리는 함성 때문에 그 여파가 크진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박혀들었다.

“태생은 대살성의 사생아였을지라도 현재는 남궁의 성을 물려받은 남궁세가 사람입니다.”

남궁천이 남궁검을 돌아보며 말을 마저 이었다.

“끝까지 대살성의 사생아로 남길 생각이었다면 남궁의 성을 물려주어서도 안 되겠지요.”

“…….”

남궁검은 남궁천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끄러미 마주보았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남궁검의 목소리가 무겁게 흘러나왔다.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무연회 우승을 두고 한 말이다.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정당한 과정을 수반한 결과다.”

“하면 결과까지 지켜보시고 말씀 주십시오.”

“생각해 보마.”

“형님!”

순간 남궁표가 불쑥 끼어들었지만, 남궁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음을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남궁천이 미련 없이 돌아서서 자리를 벗어나자, 남궁표가 제 가슴을 툭툭 치며 열불을 토했다.

“형님! 이건 아닙니다! 설마 진심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요? 저 새파란 녀석의 말 같지도 않은…….”

“무연회 우승은 그 상징성이 대단하다.”

“형님!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무연회 우승? 네, 대단하지요. 만인이 우러러 볼 만큼 엄청난 파급력이 있겠지요. 하나 그만큼 저 아이가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소문도 더욱 부각될 겁니다.”

“저 아이가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강호에 있더냐?”

“그야…….”

“그건 이미 본 가에 드러난 약점이다. 저 아이가 무연회 우승을 한다면 약점이 조금 더 부각될 수는 있겠지. 하나 장점이 더 크다.”

“그래도 대살성의 사생아가 소가주가 됐다며 세상이 비웃을 겁니다!”

“그래서 무섭더냐?”

“뭐라고요?”

“세상의 비웃음이 무섭더냐? 그래서 너는 세상에 그리 고분고분 순종하며 살아가는 중이더냐?”

남궁검의 날카로운 눈빛에 남궁표는 잠시 심장마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남궁표는 가문이 몰락하고 나서 무한에 머물며 무림맹의 눈치만 살피며 지냈다. 가문의 재건을 위해서 바짝 엎드려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대살성도 죽은 마당이니 언젠가는 기회가 다시 오리라 믿었다.

한데 갑자기 뜬금없이 남궁천이 나타나서 설칠 줄이야.

남궁표가 말을 잇지 못하고 어금니만 뿌득뿌득 갈고 있자, 남궁검이 조용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본 가는 제왕의 가문이다.”

“……!”

“지금은 비록 쇠락했다지만 한때 무림을 이끌던 가문이다. 한데 어찌 너는 저 아이 말마따나 무림의 꼬리만 쫓을 생각을 하느냐?”

“형님…… 설마 저 망나니 녀석을 진지하게 보시는 건 아니겠지요?”

“앞서 말했다시피 결과를 지켜볼 뿐이다. 그 결과가 정당한 과정을 수반하여 나름 인정할 만한 결실을 맺는다면…….”

남궁검은 뒷말을 잇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이어질 뜻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형님!”

“그 아이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다.”

“예, 압니다. 저도 봤습니다. 확실히 성장한 것 같더군요. 하나 이제 겨우 한 번 이겼을 뿐입니다. 게다가 아무리 무공이 뛰어나더라도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가문의 미래를 생각하십시오!”

“하면 네가 이을 것이더냐?”

남궁검의 냉랭한 눈빛이 남궁표의 눈으로 날아들었다.

남궁표가 멈칫했다.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러마했으리라.

하나 이젠 다 쓰러져 가는 가문.

오히려 남궁이라는 성을 내거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상황이 아니던가?

순간 남궁검의 입가에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더 할 말 없으면 가거라.”

“형님!”

“가문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자가 어찌 가주가 되겠는가? 가문이란 거추장스러우면 벗어던질 수 있는 장삼 따위가 아니다.”

“……!”

남궁표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도 하필이면 남궁천이라니……!

남궁천만 아니면 누구라도 좋겠건만!

남궁표가 쉬이 떠나지 않고 서 있자, 남궁검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문이 부끄러워 무림맹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네가 갑자기 가문의 일에 왈가왈부하니 가주로서 부담이 느껴지는군.”

차갑기 짝이 없는 말투.

남궁표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더는 할 얘기가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남궁표가 자리를 떠나고 나자 남궁검은 앞서 남궁천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나저나…… 녀석이 왜 갑자기 소가주 자리를……?’

* * *

무공의 성취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소가주가 되어야 한다.

지난 며칠간 고민을 거듭해 내린 결론이었다.

‘창궁서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지.’

남궁천은 벽라검을 뽑아 검신을 가만히 살피며 생각했다.

전생에는 없던 근본이 생겼다.

하나 이 근본이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해서 남궁세가의 무공을 제대로 점검해보고 싶었다.

물론, 남궁천은 전생에 남궁선을 통해서 남궁세가 무공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 남궁선도 놓친 게 있을 수 있다. 좀 더 확실히 근본을 다지고 싶었다.

해서 소가주 자리를 요구했다.

가문이 몰락해도 금은보화보다 더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 곳. 바로 창궁서고를 이용하기 위해서.

창궁서고를 이용할 수 있는 자격은 가주와 소가주에게만 주어지므로.

‘일단 영감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압도적인 우승이 필요하겠군.’

남궁천이 입매를 슬쩍 치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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