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잠룡(潛龍)
꿀꺽……!
주연화는 남궁천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아니, 오히려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바보가 된 기분이다.
남궁천은 계단을 따라 비무대 아래로 완전히 내려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찬 기운이 목 끝을 스치는 것만 같다.
그렇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궁천은 자신에게 검을 들이밀고 있었다.
침 한 방울만 삼켜도 검첨이 그대로 목을 찢고 차갑게 파고들 것만 같은 공포였다.
한데 그때의 기운이 여전히 목 언저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분명한 건 살기가 아니다.
아직 강호 경험이 많지 않다지만 살기와 투기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다.
남궁천은 자신에게 살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오로지 투기만을 보였을 뿐.
한데 그 투기가 소름 끼치도록 섬뜩했다.
‘몇 번이나 합을 이뤘지……?’
비무가 시작되고 나서 곧장 선공을 펼쳤다.
방심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남궁천이 공식 호구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녀가 직접 본 상대의 무공은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옷깃도 스치지 못했어!’
매화검법을 세밀하게 펼쳤고, 번번이 허공을 베자, 육합검법으로 전환했다.
검격의 질이 달라졌지만, 남궁천은 마치 그 모든 과정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응했다.
뭐랄까?
자신이 한 걸음 내디디면, 남궁천은 이미 두 걸음 회피한 상황이랄까?
마치 자신이 어디로 움직일지, 어디로 검을 뻗을지, 심지어 어떤 식으로 운공을 할지 빤히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처음으로 남궁천과 검을 마주쳤을 때,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했다.
그 순간의 기분이란…….
‘마치 발가벗겨진 것만 같은…….’
상대를 보면서 이렇게 빈틈을 찾기 어려운 적이 없었다. 아, 사형인 유현을 제외한다면.
한데 남궁천은 빈틈이라는 표현도 부족하다.
아득한 절망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딱 이 합을 이뤘다.
그리고 남궁천이 품으로 빠르게 파고들기에 바닥을 차고 훌쩍 물러났다.
그 순간 남궁천이 든 검이 거짓말처럼 휘어지더니 어느새 팔꿈치를 옆면으로 찰싹 때리며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찰나지간 팔꿈치를 베인 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마지막 그 순간에는 검을 비틀었던 것일까?’
만약 남궁천이 검을 비틀지 않았다면 지금쯤 오른팔은 팔뚝 아래로 잘려서 비무대에 떨어져 있으리라.
그 생생한 감각을 다시 떠올리니 저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후에는 어떻게 됐더라?
반사적으로 팔꿈치가 펴지면서 가슴 쪽으로 허점이 드러났고, 남궁천이 그대로 벽라검을 들이밀며 달려들기에 뒷걸음질을 치다가 넘어져 버렸다.
평소라면 체면불고하고 나려타곤 수법으로 바닥을 구르며 피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
벽라검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바짝 붙어오면서 그대로 목을 꿰뚫을 것 같았으니까.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기만 하다.
어디까지나 심사관이 지켜보는 비무 대회가 아니던가?
물론 사고가 일어나서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지만 어지간해선 생도가 죽는 일은 없다.
그 전에 심사관이 나설 테니까.
하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다.
목전으로 날아드는 검을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는데 기적처럼 검이 멈췄다.
종이 한 장 차이였을까?
분명 검이 떨어져 있지만, 그 예기가 금방이라도 살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온통 시체들 사이에 홀로 주저앉은 기분.
실제로는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연화는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변명의 여지도 없는 완벽한 패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보니 관람자들도 멍하니 두 눈만 끔뻑였다.
심사관도 마찬가지.
남궁천이 힐끗 돌아보자, 그제야 심사관인 모용신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남궁천, 승.”
“…….”
심사관이 공개 선언을 했음에도 관람석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뭐, 뭐야? 정말 남궁천이 이긴 거야?”
“지금…… 저 용천관 생도가 이긴 게 맞지?”
“저 여생도는 화산파 제자 아니었어?”
“정말 이대로 끝이라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자들 사이에서 감탄과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흥분한 사람들은 바로 용천관 생도들.
“우와아아앗! 남궁천이 이겼다아앗!”
“남궁천, 정말 대단하다! 넌 우리의 자랑이다!”
그들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남궁천의 호구 생활을 침묵하고 방관한 사실마저 잊은 것처럼 들떠서 소리쳤다.
이쯤 되자 남궁천의 승승장구를 은근히 운으로 치부하던 정협관 생도들조차도 내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궁천이 대연무장을 완전히 벗어나자, 넋을 놓고 있던 주연화도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그녀의 멍한 표정을 본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주연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서서는 계단을 내려왔다.
아직도 남궁천에게 패배한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억울하거나 분한 마음도 없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오자 유현이 다가와 빙그레 웃었다.
“역시 강호는 넓지 않느냐?”
“사형…….”
멍하니 유현을 보던 주연화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히.”
“패배를 곱씹는 건 중요한 일이다. 하나 감정을 곱씹지 말고 이성을 곱씹어야 한다. 어째서 진 건지, 왜 당했는지. 그게 한 걸음 나아가는 길이니까.”
“명심할게요.”
“그래서 결론은?”
“네?”
“뭔가 느낀 게 있었던 것이 아니더냐? 비무대에서 한참이나 주저앉아서 내려오지 않기에.”
“아…….”
주연화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유현은 자신이 비무대에서 패배의 요인을 곱씹어보느라 꿈쩍도 하지 않은 줄 안 것이다.
유현이 빤히 쳐다보자 주연화는 그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는 외면해 버렸다.
‘어떻게 저 눈을 보면서 사실 공포에 질린 거라고 말할 수 있겠어?’
다시 그때의 공포심이 등골을 타고 솟아오르는 것만 같다.
목 끝에서 종이 한 장 차이로 멈춘 검.
‘게다가 팔을 잃을 뻔…….’
주연화가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쓸었다.
검의 옆면으로 얻어맞은 팔꿈치가 괜히 더 화끈거리는 기분이다.
‘후유, 정말이지 그 순간 검을 비틀어주지 않았더라면…… 가만?’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 감각은……?’
팔꿈치를 따라 찌릿한 감각이 손끝까지 전해지는 기분.
‘그때 내가 팔꿈치를 굽히지 않고 곧게 폈더라면……? 그럼 공력의 흐름도 달리 가져가야 할 테고…… 설마!’
주연화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연화야?”
“아…… 사형! 잠깐만요!”
“응? 화야! 어딜 가는 거야?”
유현이 얼른 주연화를 불렀지만, 그녀는 벌써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디론가 달려간 후였다.
한편 열 띤 함성 속에서 그런 주연화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금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 저런…… 이 정도 차이라면 남궁천은 우승후보가 아닌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단 삼 합을 겨루기도 전에 곧장 승리해 버렸다.
그야말로 남궁천의 일방적인 승리.
‘남궁천이라…… 정말 놀랍구나. 소홍이 괜히 잠룡이란 말을 꺼낸 게 아니야.’
실제로 남궁천의 비무를 지켜보고 나니 그 역시 가슴이 뛴다.
물론 아직까지는 판단하기 이르지만, 남궁천이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정말 대단하군요.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손주를 두셨습니다.”
옆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지만, 남궁검은 예의 그 냉랭한 표정에 조금도 변화가 없다.
‘정말이지 속을 모를 사람이군.’
하나 그 옆에 앉은 남궁화는 눈에 띄게 놀란 표정이다.
‘조카의 무공을 자세히 모르고 있었나? 아니면…… 그간 가족에게마저 진짜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하면 왜 이제 와서 모든 걸 드러내는 걸까? 가만, 만약 모든 걸 드러낸 게 아니라면?’
심장이 떨린다.
소홍에게 섣부른 판단을 내리지 말라고 훈계했던 게 부끄러울 만큼 가슴이 벌컥거린다.
아서라. 아직은 이르다.
잠룡은 아무나 되나?
더구나 그 아이는 대살성의 사생아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금왕은 다시 한번 남궁검의 눈치를 살폈다.
남궁검이 무감하게 던진 시선을 쫓아가니 남궁천이 이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남궁검을 보고 있었다.
허, 조손지간에 이리도 무심한 눈길을 주고받다니.
남궁천이 걸음을 옮기고 나자, 남궁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 테지…….”
“무엇이 말입니까?”
금왕이 넌지시 묻자, 남궁검은 슬쩍 돌아보더니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남궁검은 대충 받아 넘기고는 고개를 들어 귀빈석에 앉은 맹주를 보았다.
맹주 역시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금왕이 침음을 흘리고는 비무대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잠룡이라…….’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그의 심장에서 요동쳤다.
* * *
‘눈치를 챈다면 재능이 있다는 뜻이겠지.’
남궁천이 저만치 두리번거리는 주연화를 보고는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단 일격으로 이길 생각이었다.
한데 두어 번 주연화의 공격을 피하면서 생각을 바꿨다.
재능이 보였다.
게다가 자신을 대하던 싹싹한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전생에는 사방이 적이었다면, 이번엔 우군을 만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나친 오지랖은 사양이다.
해서 살짝 손만 봐줬다.
눈치가 빠르고 재능이 있다면 자신의 가르침을 알아챌 것이고, 그게 아니면 영원히 모르리라.
그리고 지금까지 본 주연화의 인성이라면…….
‘눈치를 챈다면 은혜 정도는 기억하겠지.’
특히나 정통 깊은 화산파의 제자라면 은원관계를 확실히 할 테니. 씨앗을 뿌려둔 셈 치면 되리라.
그렇게 걸음을 옮긴 남궁천이 관람석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힐끔거리더니 웅성거렸다.
“어? 남궁천 아냐?”
“맞네? 용천관 공식 호구…….”
“이 사람아. 방금 그 비무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건 헛소문이겠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도 선뜻 가까이 다가오진 못했다.
아무래도 대살성의 자식이라는 낙인 때문이리라.
그런데 나이가 꽤 지긋해 보이는 사내가 딱딱한 표정으로 걸어오더니 남궁천 앞에 멈춰 섰다.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모르겠지만 운도 언제까지나 통할 수는 없다.”
“누구신지?”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자,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이놈이 지금 날 놀리나? 아니지. 날 기억 못 하는 걸지도 모르겠군. 항간엔 기억을 잃었다는 말도 있었으니.’
하긴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도 대면한 적이 거의 없으니 얼굴을 잊을 만도 하다.
노인이 혀를 찼다.
“됐다. 내가 누군지는 곧 알게 될 테지.”
말을 마친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데, 남궁천이 가려는 방향과 같았다.
두 사람은 곧 남궁검 앞에 섰다.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노인이 다소 떨떠름한 목소리로 남궁검에게 인사를 건넸다.
‘숙조부였구나.’
남궁천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남궁검과 묘하게 닮은 것 같더라니.
남궁천이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남궁검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남궁검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동생과 손주를 번갈아 보더니, 먼저 남궁천에게 말을 건넸다.
사실 가문이 몰락한 후로는 동생 남궁표와 관계가 소원한 데다, 지금은 남궁천이 큰 대회를 치르고 온 것이니 먼저 맞아준 것이다. 그마저도 온기라곤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수고했다. 가서 쉬어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남궁천이 단도직입적으로 꺼낸 말에 남궁검뿐만 아니라 남궁표와 남궁화, 심지어 금왕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무엇이냐?”
남궁검의 질문에 남궁천이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치다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폭탄을 툭 던졌다.
“제가 무연회에서 최종 우승하면 소가주 자리를 주십시오.”
“……!”
주변의 인물들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표는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딱 벌렸고, 남궁화는 일순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남궁검은 돌이라도 씹은 것처럼 굳은 표정이었다.
다만 자리에 앉아 있던 금왕만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으며 속으로 확신했다.
‘잠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