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용천관 대약진
“이, 이겼다아아아!”
“윤종승이 이겼다아앗!”
“으하하하! 용천관이 무맹관에 이어 정협관 생도까지 박살 내버렸다!”
“윤종승! 최고다!”
용천관 생도들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였다.
반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멸시의 눈초리를 던지며 힐난하던 정협관 생도들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고개를 숙였다.
양민들의 반응도 격렬했다.
“맙소사, 용천관 생도가 둘이나 팔 강에 진출하다니! 이건 기적이 아닌가?”
“최근 이십 년간 보지 못한 이변이야.”
“으하하하! 내 이럴 줄 알고 용천관 생도에게 돈을 걸었지!”
“정협관은 생도를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는 거냐!”
온갖 소리가 어우러지면서 커다란 소음을 만들어냈다.
윤종승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모용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만 내려가도 좋다.”
모용신이 냉랭하게 뱉는 말을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윤종승이 몸을 돌렸다.
“네, 넵!”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정말 이겨 버리다니.
황보승에 이어 악굉까지 이겨 버리다니.
장외로 떨어진 악굉을 힐끗 보니 가슴 부위에 선명한 연꽃이 피어 있었다.
콱!
윤종승이 주먹을 힘껏 말아 쥐며 입매를 치켜 올렸다.
‘혁련장의 위력이…… 한 단계 상승했다!’
계단을 따라 비무대에서 내려오는데 마침 순서를 기다리는 남궁천이 보였다.
윤종승이 남궁천에게 저벅저벅 다가가더니 돌연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고맙다, 남궁천! 넌 내 은인이다! 앞으로 널 저버리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다.”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윤종승의 어깨를 툭 두드려 주곤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남궁천이 비무대에 오를 차례.
그런 남궁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윤종승은 맞은편에서 비무대로 향하는 주연화를 보았다.
‘화산파의 제자…….’
결코 쉽지 않으리라.
게다가 상대는 무한 제일의 무맹관 소속.
윤종승이 다시 남궁천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남궁천……! 이겨라.”
그렇게 몸을 돌리고 걸어가는데 누군가 앞을 가로막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이 녀석, 완전 잘했다.”
“헙, 누, 누구……?”
“뭐야? 너무 얻어터져서 날 몰라보는 거냐? 머리라도 다쳤어?”
호들갑을 떨며 말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청룡반 담당 교관인 비량이었다.
“아…… 교관님.”
“아…… 교관님이라니. 왠지 실망한 것 같은 말투는 뭐지?”
“아, 아닙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런데 왜 여기에 계세요?”
“왜긴. 널 응원하러 왔잖아? 저기 동기들 안 보여?”
“날…… 응원하러……?”
윤종승이 멍하니 고개를 드는데, 비량이 등짝을 퍽퍽 후려치며 말했다.
“짜아식! 이긴 녀석이 왜 이렇게 기죽은 것처럼 굴어? 어깨 펴라! 가서 동기들에게 인사하라고 데리러 온 거야.”
“아…….”
윤종승이 그제야 관람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직 세 번째 비무가 준비 중이었기에 모두가 자신을 보며 환호하고 있었다.
“잘 싸웠다! 용천관 생도!”
“황산윤가의 미래가 밝다!”
“팔 강에서도 잘 싸워라!”
두근두근……!
살면서 이렇게 만인의 주목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고, 발은 구름을 밟는 기분이다.
‘다들…… 날 응원하고 있어?’
정말이지 강호 영웅이 이런 기분 아닐까?
기분이 몽실몽실해지는데, 비량이 윤종승을 끌고 동기들 앞으로 데려갔다.
“와아아! 윤종승! 대단했다!”
“윤종승! 잘했다! 너야말로 진정한 호걸이다!”
“더 이상 넌 호구가 아니다! 난 네가 해낼 줄 알았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외치는 소리에 윤종승은 가슴이 먹먹해지며 온갖 생각이 다 지나갔다.
그간 경험했던 지옥들이 떠올랐고, 당시에는 외면하고 방관하던 이들이 이젠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것이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역시 강하고 봐야 한다!’
강호인에게 나약함은 곧 죄악이다.
끝없이 강함을 추구하는 것만이 강호인의 덕목이리라.
‘그래, 나는 강해졌다. 그리고 앞으로 더 강해질 거다! 모두 나를 지켜봐라. 그리고 날 이렇게 만들어준 남궁천을 지켜봐라! 언젠간 너희들이 말도 붙이기 어려울 만큼 강해질 우리를 보란 말이다!’
속내를 갈무리한 윤종승이 다짐의 의미로 주먹을 굳게 쥐고는 들어 올렸다.
“와아아아아!”
함성이 더욱 솟구쳐 올라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깨달음을 얻었거나, 심경의 큰 변화가 생겼거나. 어쨌든 뜻밖의 모습이군. 전에 봤을 때는…….’
남궁검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의 모습이 무엇이든 간에 지금이 중요한 법.
그런 의미에서 남궁검은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남궁천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남궁천은 이제 막 비무대에 올라서 천천히 몸을 풀고 있었다.
긴장한 표정이 아니다. 여유가 넘치다 못해 철철 흐른다. 나른함마저 느껴진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이런 시시한 놀이는 빨리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 낮잠이나 자고 싶다는 표정이랄까?
‘자신인지 자만인지는 두고 보면 알 일.’
아직은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으리라.
남궁검이 가만히 남궁천만 쳐다보고 있을 때, 금왕 역시 남궁천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이게 정말 저 아이 덕분이란 말인가?’
손끝에서부터 찌릿한 전율이 일어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남궁천은…….
‘도대체 어떤 아이지?’
분명 무공 격차가 확연했다.
한데 그걸 단 한 방으로 뒤집었다.
놀랍게도 남궁검은 그걸 예측하고 있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남궁검은 초절정고수니까.
하나 남궁천은?
아직 약관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윤종승에게 어떤 조언을 했기에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정말…… 홍이가 잠룡을 찾아낸 거라면……!’
자신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거다.
하나, 속단은 이르다.
정작 남궁천의 비무는 보지 못했으니.
남궁천의 비무를 결승까지 지켜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남궁천…… 지켜보마!’
금왕이 옆에 앉은 남궁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드디어 남궁천 차례군요. 기대가 크시겠습니다.”
“기대나 실망은 내 몫이 아니라 저 아이 몫이오.”
그야말로 냉랭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금왕은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대쪽같은 성격이라지만 이렇게까지 감정을 다스릴 줄이야.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손자의 무공을 직관하기 위해서 아니겠나?
그럼에도 표정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문득 금왕은 남궁검이 사업을 했어도 정말 탁월한 능력을 보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그러고 보면 누구와 비교되는군.’
금왕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귀빈석으로 향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황산윤가주님은 아무래도 많이 감동하셨나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윤첨산은 귀빈석 난간에 기댄 채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어흐엉! 아들아! 내 아드으을! 네가 정녕 해냈구나! 이 기특한 녀석! 이 아비는 네가 이길 줄 알고 있었다! 이 아비는 우리 아들의 승리를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단다! 장하다, 내 아들! 정말 장하다아아!”
다른 귀빈들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축하를 건넸다.
윤천삼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사례하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은 악현을 돌아보았다.
비무가 진행되는 내내 조롱에 가까운 발언을 일삼던 자.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윤첨산이 마음을 추스르고는 악현에게 다가갔다.
“부디 그쪽 아드님에게 귀한 공부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빠드득.
악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더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윤첨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세상에! 이렇게 짜릿할 수가!
당장에라도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비무대를 내려와서는 남궁천에게 다가가던데 왜 그랬을까?
‘아…… 남궁천에게 조언을 해준 건가?’
하긴 비무 대회에서 당당히 이겼으니 남궁천에게 조언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방심해서 남궁천에게 맞았지만, 이렇게까지 옛정을 챙기다니. 너란 녀석, 마음씨도 참 넓구나. 그릇이 다른 모양이다.
윤첨산은 내심 싱글벙글 웃으며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귀빈석을 벗어났다.
* * *
‘하아, 남궁천의 비무를 지켜볼 걸 그랬나?’
윤종승이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궁천의 비무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잠시도 서 있기가 힘들 지경.
정말이지 까딱하다간 장외에 드러누운 것은 악굉이 아니라 자신이 되었으리라.
‘뭐, 그 녀석은 알아서 잘 하겠지.’
조금이라도 빨리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사흘 후에는…….
‘당우기……!’
과연 자신이 당우기를 상대로 오늘처럼 버틸 수 있을까?
눈만 마주쳐도 오금이 저린 당우기를 상대로?
아…… 지금은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다.
우선 숙소로 돌아가서 쉬도록 하자.
그렇게 걸음을 힘겹게 옮기는데 갑자기 누군가 모퉁이를 돌아 나오더니 와락 끌어안는 게 아닌가?
“컥! 누, 누구……?”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달려드는 인간들은 많은지!
짜증이 불쑥 일어나는데 귓가에 닿은 익숙한 목소리는 다름 아닌 아버지 윤첨산이었다.
“장하다, 내 아들! 어디 보자! 어휴, 안 아프냐? 얼굴이 많이 부었구나.”
“아버지…….”
그래도 가족을 보니 참았던 설움이 솟구치는 것만 같다.
눈시울이 촉촉해지니 윤첨산이 다시 한번 아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오냐, 아비다. 아비가 왔다. 이 아비가 아들 덕에 오늘 정말 체면을 세웠다. 장하다, 우리 아들!”
“아버지이이!”
윤종승은 아버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윤첨산이 그런 윤종승의 어깨를 다독이다가 입을 열었다.
“한데 남궁천에게는 왜 그리 잘해주는 것이냐? 옛정을 못 잊어서 그러는 것이더냐?”
“네……?”
“내가 다 봤다. 네가 남궁천에게 조언하는 모습을.”
“무슨 말이에요? 아버지. 오히려 그 반대로…….”
“이 녀석아. 사람은 멀리 내다봐야 한다. 그리고 공과 사를 잘 구분해야 해.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서 남궁천을 자꾸 도와줘봐야 네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
“아버지!”
“왜 그러느냐?”
“그게…… 남궁천이 절 도와준 겁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냐? 누가 누굴 도와?”
“남궁천이 절 도와줬어요.”
“아니, 어떻게? 남궁천은 분명 용천관의 공식 호구…….”
“아니에요, 아버지. 천이가 달라졌어요. 저도 더 이상 천이를 괴롭히지 않아요. 아니, 제가 괴롭힐 수 있는 녀석도 아니에요.”
“허어, 너 아무래도 너무 맞아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구나. 어디 좀 보자. 머리라도 다친…….”
“그게 아닙니다, 아버지. 저…… 천이를 통해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남궁천은 제게 스승과도 같은 존재예요. 전 앞으로 평생 천이와의 의리를 지키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더 이상 남궁천을 무시하지 말아주세요. 그건 절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얘, 얘야…… 너 그게 무슨…….”
“아버지도 차차 알게 되실 거예요. 남궁천. 그 녀석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마 아버지도 제가 남궁천의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워질 겁니다.”
“아들아.”
“아버지. 전 좀 쉬어야겠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직접 보세요.”
“그…… 알았다. 오늘 많이 힘들었을 테니 그만 가서 쉬어라.”
“네, 저 대신 아버지가 천이의 비무를 관람하시고 제게도 알려주세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마시고요. 그 녀석, 정말 대단하니까요.”
“끄음. 그래, 알았다.”
윤첨산이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윤종승이 깍듯하게 예를 갖추더니 걸어갔다.
어째서인지 햇빛을 받으며 걷는 아들의 등이 평소보다 넓게 보였다.
‘녀석, 키가 더 자랐나?’
그나저나 남궁천에게 도움을 받아? 스승과 같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 매가리라고는 없어 보이던 녀석이……?
찰나, 대연무장에서 벼락같은 함성이 차올랐다.
“우와아아아아아!”
‘아무래도 직접 봐야겠구나!’
윤첨산이 표정을 굳히고는 귀빈석을 향해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분위기가 왜 이러지?’
귀빈석으로 들어선 윤첨산은 얼어붙은 귀빈들을 보며 눈살을 슬쩍 구겼다.
그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귀빈을 붙들고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귀빈이 멍한 표정으로 윤첨산을 돌아보더니 다물어지지도 않은 입을 간신히 움직였다.
“끝, 끝났소.”
“뭐가 말입니까?”
“비, 비무가 끝났단 말이오.”
“허어, 벌써 남궁천이 진 겁니까? 이렇게 빨리…….”
“아니오. 남궁천이 이겼소. 압도적으로……!”
“뭐라고요? 아니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윤첨산이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비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떠나갈 듯한 함성을 들으며 남궁천이 묵묵히 비무대를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