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64화 (64/508)

64. 귀빈

무연회의 시험 종목은 매 회 달라지곤 한다.

하지만 최종 시험은 항상 같다.

공개 비무 대회.

무한 삼대 학관은 물론, 양민들마저 직관할 수 있는 공개 비무 대회는 그야말로 무연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중원 각지의 명사들이 이 공개 비무 대회를 보기 위해서 일부러 무한을 찾아올 정도일까?

그만큼 유동인구가 많아지니 무한의 상권은 활기를 띄게 되고, 양민들은 덩달아 신이 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

이제 무한에서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무연회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리고 마침내 십육 강전이 치러지는 날.

무한을 찾은 무인들은 물론, 양민들까지 무림맹 대연무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화두는 단연 용천관의 대약진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번엔 용천관 생도들이 네 명이나 올라갔다지?”

“그게 정말인가? 그 꼴통들이?”

“허어! 이 사람, 이렇게 귀가 어두워서야. 어디 귀양살이라도 갔다 온 겐가?”

“하면 그 조강민이라는 후기지수가 정말 잠룡이었나 보구먼.”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그 생도는 출전도 못했다던데.”

“뭐라고? 그럼 어떻게……?”

“놀라지나 말게. 무려 용천관 공식 호구라고 불리던 두 생도가 끝까지 살아남았다더군.”

“공식 호구라면…….”

“남궁천과 윤종승이라던 것 같은데?”

“엇! 남궁천이라면 혹시 소문으로만 듣던 대살성의 사생아……?”

“그럴지도 모르지.”

“허어! 아비는 대살성으로 무림맹에 쫓기다 죽고, 그 아들은 무림맹에서 개최한 대회의 신성으로 떠오르다니. 참 기구하구먼.”

남궁천과 윤종승의 활약은 당연히 용천관 생도들 사이에서도 쉼 없이 회자되고 있었다.

특히 이 두 사람의 호구 생활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이 바로 용천관 생도들이었기에 그들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꼴찌의 반란.

질투와 시기가 생길 만도 하지만, 대다수 생도들은 남궁천과 윤종승을 보며 묘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패배자들의 인생 역전기는 언제 들어도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달까?

남궁천이 속한 청룡반 역시 비량의 인솔하에 무림맹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한 생도가 다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사실 남궁천이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 녀석, 대살성의 자식이기도 하지만 천하제일룡의 아들이기도 하잖아.”

“하긴. 남궁천이 대살성은 아닌데 핍박만 받았으니 좀 억울한 면도 있지.”

“어쩌면 오늘을 위해서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힘을 숨겨서 뭐 하게?”

“이렇게 깜짝 놀라게 하려는 거지. 영웅의 등장 이야기 같잖아? 그동안 자기를 괴롭혔던 놈들의 콧대를 눌러주기도 좋고.”

“쉿. 듣겠다.”

또 다른 생도가 주의를 주는 바람에 신나게 떠들던 생도가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입을 다물었다.

가까운 곳에서 송원교와 백리향이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삼차 시에서 탈락한 후 곧장 학관으로 돌아온 터였다.

송원교와 백리향이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입을 다물고 있자, 생도가 조금 용기를 얻은 것인지 짐짓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괴롭히래? 솔직히 난 어쩔 수 없이 가담한 적이 몇 번 있지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었다.”

“가담한 게 자랑이냐?”

“분위기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잖아? 어울리지 않으면 누구라도 호구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제기랄! 그러고 보면 누가 대살성의 아들인지 헷갈릴 지경이라니까.”

“야야, 목소리 낮춰.”

“뭘 이제 와서 쫄고 그래? 남궁천이 돌아오면 그동안 앞장서서 괴롭힌 것들이 공식 호구가 될지도 모르는데.”

생도의 말에 다른 생도들도 낄낄거리며 웃었다.

물론 송원교와 백리향을 은근히 노린 말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어금니를 꾹 깨물면서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 두 사람이 남궁천에게 완전히 깨졌다는 건 소문으로도 다 퍼진 상황.

본래 폐위된 왕처럼 초라한 존재가 없는 법이다.

이제 용천관 청룡반의 생도들은 송원교와 백리향을 폐위시키고, 남궁천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걷던 생도들이 마침내 무림맹 대연무장의 관람석으로 들어섰을 때,

“와아아아아!”

머릿속이 울릴 정도의 함성이 그들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모인 사람들.

아직 비무가 시작하기 전인데도 관람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열기 때문에 쌀쌀한 날씨가 잊힐 정도였다.

관람석 한쪽에는 용천관 생도들의 자리까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정협관 생도들이 앉은 옆자리.

용천관 생도들은 가슴을 쫙 펴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표정에는 하나같이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지금까지는 용천관 생도가 비무 대회까지 살아남은 적이 거의 없었다.

많아야 한두 명이 전부였다.

그래서 무림맹에서는 용천관 생도들에게 지정석조차 내어주지 않았다.

한데 올해는 무려 네 명!

정협관 생도의 숫자와 똑같다!

덕분에 관람석 한쪽에 지정석도 마련된 것이고.

‘에헴! 이젠 우리도 꿀릴 게 없지!’

용천관 생도들이 기세등등하게 자리에 앉았다.

* * *

관람석 한쪽에 마련된 귀빈석.

그곳에는 용천관 생도들만큼이나 뿌듯한 마음으로 대연무장을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황산윤가주 윤첨산이었다.

며칠 전 비무 대회 초청장을 받고 어찌나 놀랐던지.

‘후우,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윤첨산이 가슴에 한쪽 손을 얹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한데 이곳에 오고 나서는 또 한 번 놀랐다.

바로 남궁천마저 비무 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 물론 남궁천이 자신의 아들을 호되게 패버린 사건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들이 방심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고였을 터.

‘도대체 어떻게 그 호구라던 녀석이 비무 대회까지 올라온 거지? 보나마나 우리 승아가 옛정을 못 이겨 챙겨줬을 테지. 하여튼 맘 약한 녀석 같으니라고.’

윤첨산은 혀를 차고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조금 언짢았던 기분이 금세 풀어진다.

어딜 둘러봐도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세가나 문파의 수뇌들이었다. 그런 귀빈 중 한 명으로 자신이 초대되었으니 어찌 들뜨지 않겠나?

‘내가 아들 덕에 호강하는구나.’

그런데 마침 뒤쪽에서 술렁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돌아보니 수뇌인사들이 꽤나 동요하면서 한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귀빈석에 낯선 중년의 등장했는데, 모두들 그를 보고 중얼거리는 소리였다.

얼핏 들으니 ‘금왕’ ‘만금’ ‘회주’ 등의 단어가 들렸다.

‘가만…… 금왕……? 만금? 헉! 설마…… 저자가 만금진인?’

윤첨산이 벌떡 일어나서 쳐다보자, 어느새 금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맹주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사실 얼굴을 봐도 그가 금왕인지는 알 수 없다. 금왕의 진짜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다만 저 장포!

금룡 두 마리가 서로 뒤엉키며 승천하는 문양이 새겨진 저 장포는 분명 금왕이 공식 행사에서만 입는다는 옷이 틀림없다!

마침내 맹주가 사내를 향해 두 팔 벌려 환영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어서 오시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금왕의 딸이 비무 대회에 참가할 줄이야. 나도 용천관주를 통해 최근에야 알게 됐소. 사람도 참, 어찌 그리 감쪽같이 속이셨소? 딸을 참으로 훌륭하게 키우셨소이다.”

“과찬이십니다, 맹주님. 그저 제 몫만 챙길 수 있도록 가르쳤을 뿐입니다.”

“허허허, 무서운 걸? 금왕의 딸이 제 몫을 챙긴다면 그 규모가 또 얼마나 대단할지 짐작도 안 가는구려.”

“맹주께서 절 너무 놀리시는군요.”

“허허허!”

두 사람의 기분 좋은 담소를 들으면서 주변 사람들도 그제야 전후 사정을 눈치채는 분위기였다.

보아하니 윤첨산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금왕이 맹주와 대화를 끝내고 자리에 착석하자, 다른 수뇌인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 금왕에게 다가갔다.

“금왕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금왕을 뵙습니다.”

“만금진인의 존성대명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뵐 수 있어 반가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확실히 금력은 권력만큼이나 무서운 법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다는 쟁쟁한 고수들이 강남 제일 갑부 앞에서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드는 것만 같다.

물론, 개중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이들도 있지만.

그리고 윤첨산은…….

“황산윤가주 윤첨산이 만금상회주이신 만금진인을 뵈옵니다! 이렇게 금안(金顔)을 뵙게 되어 감개가 무량하옵니다! 제게 이런 날이 오다니 하늘이 도운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다가가 인사했다.

금왕이 껄껄 웃으며 형식적인 답례를 해주고 나서야 윤첨산은 들뜬 마음을 달래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금왕이…… 내게 웃어주었다.’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는 이 기회에 금왕과 어떻게 친해져 볼지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굴려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비무 대회 개최 시간이 임박했을 때였다.

다시 한번 등 뒤에서 술렁임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금왕이 나타날 때와는 조금 다른 반응이었다. 묘한 이질감 같은 게 느껴졌달까?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윤첨산은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자가…… 정말 왔군.’

귀빈석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남궁검과 남궁화였다.

물론 이곳에 모인 귀빈들은 이 두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모두들 껄끄러운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대살성과 연분이 난 딸을 둔 아비.

그 바람에 천하제일세가에서 끝없이 추락해 지금은 서열에서도 보이지 않는 가문.

한마디로 엮이기 싫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윤첨산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쯧쯧. 그러게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그러셨소? 차라리 나와 사돈 관계라도 맺었으면 이런 대우는 받지 않았을 터인데.’

그러고 보니 금왕은 딸이라고 했던가?

이 기회에 금왕과 사돈 관계를 맺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윤첨산이 혼자만의 상상에 잠긴 사이 남궁검과 남궁화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분명 초청장에는 귀빈으로 초대한다고 되어 있었는데, 두 사람의 자리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귀빈들도 술렁이기 시작하니 그제야 맹주가 힐끔 돌아보고는 아는 체를 해왔다.

“이게 누구요? 남궁검 대협이 아니오? 어서 오시오.”

“오랜만에 뵙소, 맹주.”

남궁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대꾸하자, 맹주 묵천악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전히 냉랭하시구려. 그래도 오늘은 모처럼 즐거운 날이니 좀 웃어도 좋을 텐데.”

“고작 이런 치졸한 짓을 하려고 부르셨소? 실망이군.”

남궁검이 예의 그 차가운 실소를 흘리자, 맹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풀어졌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총관! 두 분의 지정석은 어딘가?”

“그, 그것이…… 미처 준비를…….”

“아니, 자네는 어찌 그런 실수를 저지른단 말인가!”

맹주가 짐짓 노한 척 꾸짖자, 옆에 있던 모용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총관님은 잘못이 없습니다, 맹주님. 제 탓입니다.”

“그건 무슨 소린가?”

“설마하니 남궁가에서 정말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모용신의 담담한 목소리에 몇몇 귀빈들이 조소를 지었다.

말속에 뼈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살성의 집안이나 다름없는 남궁가가 낯짝 두껍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뜻이니까. 일부러 세가라 부르지 않고 남궁가라고만 부른 것 또한 같은 맥락일 터.

윤첨산 역시 한껏 비웃음을 지으면서도 내심 혀를 내둘렀다.

‘저 영감은 이 와중에도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는군. 허참, 얼굴을 무슨 얼음으로 조각해 둔 건지.’

물론 남궁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귀빈으로 초대받아서 왔는데, 지정석이 없다는 이유로 서 있든지, 쫓겨나든지 해야 할 상황.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자리를 더 만들겠다는 반응조차 없는 걸 보면 애초에 맹주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아니, 계획을 한 건지도.

참으로 치졸한 짓이다.

하나 맹주는 알고 있었다.

이런 치졸함이야말로 관계를 정의하는 가장 효과적인 심리전이라는 것을.

국가 간의 교류에서도 상대국 왕에게 일부러 작은 의자를 제공하는 나라도 있다지 않던가?

이는 만인에게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내부 결속은 다지면서 상대를 철저히 고립시키는.

남궁검의 가슴에서 한기가 일어나는데, 돌발 상황은 뜻밖의 인물에게서 일어났다.

“남궁 대협, 오래전부터 존경하고 흠모해왔습니다, 혹, 제가 앉던 누추한 자리라도 괜찮으시다면 여기에 앉으시지요.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윤첨산을 비롯한 귀빈들 모두가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본 곳에는 금왕이 세상 온화한 표정으로 남궁검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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