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등하불명(燈下不明)
팍!
남궁천이 재빨리 탁자를 걷어차는 바람에 부회주가 걸려 넘어졌다.
콰당탕!
꼴사납게 구르던 부회주가 재빨리 손바닥으로 바닥을 때리며 일어나려는데, 어느새 남궁천이 옆구리를 밟으며 무게를 실었다.
퍽, 쿠웅!
“커억!”
부회주가 피를 울컥 토하면서 눈을 부라렸다.
“너 이 새끼……!”
“곧 죽어도 객기 하나는 대단한 녀석일세. 과연 부회주답다. 아주 칭찬해.”
“노오오옴!”
부회주가 다시 공력을 끌어올리면서 일어나려는데, 남궁천이 그대로 벽라검을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푹!
“끄아아아악!”
벽라검이 단전을 뚫고 바닥에 박히자 부회주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남궁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물 좀 가져오지. 너도 다음 생에는 점소이한테 좀 배워라.”
“너…… 큭…… 뭐, 뭐 하는 새끼냐? 끄윽!”
“너 같은 놈들 잡아 죽이는 새…… 분이시다.”
“무림맹에서 온 놈이냐?”
“아닌데. 아니, 맞나? 아, 나도 헷갈리네.”
“뭐……?”
“됐고. 나야, 나. 네놈들이 무림맹에게 정보를 흘려주는 바람에 한동안 개고생했던 대살성님.”
남궁천이 부회주를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순간 부회주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분명 대살성의 외모는 아니다.
한데 태도와 표정, 눈빛에서 대살성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게다가 이 죽음이 가득한 기운!
늘 죽음을 가까이 한 자라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이 삭막한 기운이 저절로 대살성을 떠올리게 한다.
“어, 어떻게……? 대살성은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나?”
부회주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남궁천이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부회주의 단전에 거꾸로 꽂힌 벽라검을 툭 쳤다.
“끄아아아악!”
부회주가 다시 비명을 터뜨리자,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새끼 엄살이 심하네. 아혈을 짚어버릴까? 아니지. 그럼 대화가 안 되는구나.”
“원, 원하는 게…… 뭐냐?”
“닭.”
“닭……?”
“어차피 너 같은 무식한 놈은 이해를 못할 테니 넘어가고. 질문은 내가 한다.”
탁!
남궁천이 벽라검을 한 차례 더 치는 바람에 부회주의 비명이 또 한 번 솟구쳤다.
“흑선은 왜 강등된 거냐?”
“네, 네가 그걸 어떻게……?”
부회주의 눈이 흔들린다.
남궁천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말했다.
“질문은 내가 한다니까. 정신 안 차려? 단전을 좀 더 휘저어줘야 지금이 편하구나, 생각할 거야?”
“항, 항명 때문이다!”
“항명?”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하긴. 가만 보면 어딘지 반골 기질이 보이긴 했다.
남궁천이 흑선을 알고 있는 건 전생에 불명회를 찾아왔을 때 그를 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한데 회주까지 보고 나니 기억은 더욱 분명해졌다. 당시 자신이 회주와 대화를 나눌 때, 흑선은 옆에 꼿꼿하게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딱히 하는 일은 없어 보였는데, 굳이 따지자면 회주를 보좌하는 총관 역할쯤으로 보였다.
하면 부회주 바로 아래 등급이라는 뜻인데…… 왜 지금은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무슨 항명이냐?”
“네, 네놈이 왜 그걸…….”
탁.
“끄아아압! 이 개새끼! 죽여! 차라리 죽여, 이 씨발 놈아악!”
부회주가 이를 빠득빠득 갈며 소리 질렀다.
어차피 단전이 부서진 데다 부상이 심해서 오래 살지도 못할 놈이 죽여 달라고 소리치니 참 희한한 광경이다.
역시 죽음보다 무서운 게 고통인가?
‘이렇게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구나.’
그건 그렇고.
“무슨 항명을 했냐고 물었잖아.”
“크읍…… 정보의 대가로 납치한 여자들을 받아선…… 안 된다고…… 버틴…… 거다.”
“흐음. 그랬군.”
“주제 파악…… 못 하고…… 설친…… 대가지.”
등하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한 말은 그런 거였나?
하긴 흑도에 몸을 담고 있지만 의외로 건전한 녀석들이 있다. 일말의 양심을 가지고 사는 놈들.
자라온 환경이 거칠어 자연스럽게 흑도에 접어들었지만 그래도 생각이라는 걸 하는 놈들인 거지.
내가 대살성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참 운명이란 기구하지 않은가?
생각하는 게 흑도보다 못한 새끼들도 명문정파의 자제랍시고 설치는데, 나름 건전한 사고로 신념을 가지며 사는 놈은 흑도에서 저러고 자빠졌으니.
불공평을 공평하게 만드는 것이 무림맹의 역할이라고?
발바닥 아래에 땅굴 수십 갈래가 지나다니는 줄도 모르면서 무슨.
무림맹 권력 자체도 불공평 위에 세워졌으면서 무슨.
거짓 정의를 내세워서 온갖 위선을 다 떨면서 무슨!
“그러고 보면 윗대가리들은 어딜 가나 죄다 한심하다니까. 안 그러냐?”
“…….”
대답이 없다.
“개기냐?”
툭!
벽라검을 손가락으로 퉁 튕겼는데도 반응이 없다.
“오, 잘 참는데? 아…… 뒈졌구나.”
얼굴을 보니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있었다. 무심히 맥을 짚어 보니 이미 죽었다.
남궁천은 벽라검을 뽑아 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박살난 책상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고, 시체 여덟 구가 널브러져 있다.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불쌍한 여인들은 침상 곁에서 옹기종기 모여 오들오들 떨고 있다.
이 사달이 났는데도 문 앞을 지키던 거구들은 들어올 생각조차 안 한다.
원래 흑도가 이렇다.
의리는 있지만 충심은 없다.
그래서 조직의 우두머리만 잡으면 의외로 손쉽게 정리가 되곤 한다.
절대강자존.
그저 강한 자가 군림하면 군말 없이 따르는 게 또 흑도다.
가끔 정파 흉내를 내면서 충심에 목숨을 던지는 놈들도 있지만, 역시 흔치는 않다.
아마 지금쯤 문 앞을 지키던 거구들은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어디론가 달아났을지도 모르지.
무심히 고개를 돌려보니 협탁 위에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물 있는데 없다고 지랄이야.”
남궁천이 성큼성큼 걸어가서는 찻주전자를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갈증이 씻겨 나가자 정신이 좀 맑아졌다.
때마침 문이 열렸다.
이번에 들어선 자는 흑선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는 우뚝 멈춰 서서는 회주실에서 벌어진 참상을 멍하니 보았다. 곧이어 그의 시선이 남궁천에게 날아왔다.
남궁천이 찻주전자를 들고 걸어가며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탁자는 부서져서 없지만.”
흑선이 미간을 슬쩍 모으다가 말없이 걸어와 앉았다.
“대체 누구요?”
퉁명스럽지만 나름 예를 갖춘다.
남궁천은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찻주전자를 내밀었다.
“마실 거냐?”
“됐소.”
“내가 다 마신다?”
“그러시든지.”
“그럼 사양 않고.”
남궁천이 찻주전자에 남은 차를 완전히 비워내고는 숨을 돌렸다.
“이제 좀 살겠네. 너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봐서는 안 될 걸 봐 버렸다.”
흑선의 눈길이 벽라검으로 향했다.
똑똑한 새끼.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사하다 보면 내가 남궁세가와 관련된 사람이라는 건 대충 알겠지.”
“날 죽일 거요?”
흑선은 확실히 똑똑했다.
일대일의 싸움에서 자신이 당할 수 없다는 걸 명백히 인지하고 있는 걸 보면.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럼?”
“너 하는 것 봐서.”
“어찌하면 되겠소?”
“목숨이 아깝나?”
“아깝소.”
“왜?”
“아직 사람답게 살아보지 못했으니까.”
“누구처럼 계집질에 미련이 남은 건 아니고?”
흑선이 픽 웃었다.
“사람을 뭐로 보고.”
“두 가지 길이 있어. 첫 번째 길은 내가 널 여기서 죽이고 나가는 거야. 그럼 불명회는 사라지고, 흑도가 발칵 뒤집히겠지. 무림맹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막혔으니 흉수를 찾아 화풀이라도 하려고 혈안이 될 거다. 하나 나는 내 신분을 숨길 자신이 있다. 내 용모파기를 만들어서 뿌린다고 한들 잡히지 않을 거다.”
“설마 인피면구요?”
“그래. 너만 죽이면 벽라검을 본 인간도 없어.”
“그리 간단하게 끝날 문제 같소?”
“간단하게 끝날 거다.”
남궁천이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물론 어설픈 사람이 이런 짓을 벌였다면 머지않아 꼬리가 밟힐 거다.
하나 남궁천이 누군가?
무림맹의 천라지망도 따돌리며 도망쳐본 사람이다.
게다가 지금은 전생에는 쳐다보지도 못했던 완벽한 인피면구에 확실한 신분까지 주어졌다.
이런 조건이면 식은 죽 먹기지.
맹주든 황제든 누군가를 죽이는 건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까이 접근만 한다면 기회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아무도 실행을 하지 못한다.
왜? 그 후에 닥칠 엄청난 운명의 소용돌이에 맞설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정신으로는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용기를 넘어선 광기가 필요한 영역인 거다.
‘그리고 그 광기라면 내게 차고 넘치고.’
남궁천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던 흑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군.”
“잘 알아봤다.”
“다른 길은 뭐요?”
“흑도인들도 발칵 뒤집히지 않고, 너도 죽지 않는 길.”
“그러니까 그게 뭐요?”
“네가 불명회주가 되는 거다.”
“……!”
“불명회는 폐쇄성이 짙은 조직이지. 그리고 존재 자체에 의의가 있을 뿐, 누가 수장이 되든 흑도인들은 관심도 없어. 정보만 제대로 물어오면 되니까.”
“어찌 나를 믿고?”
“너한테서는 광기가 느껴지지 않거든. 기회만 주어지면 착실히 인생을 살 것 같단 말이지. 누구처럼 색욕에 미쳐서 날뛰지도 않을 것 같고.”
“조건은?”
“회주는 너지만 네 주인은 나야. 당연히 네 건 내 거지.”
“…….”
“억울하면 여기서 장렬히 죽는 방법도…….”
“하겠소.”
“정비할 자신은 있어?”
남궁천이 곁눈질로 널브러진 시체들을 둘러보았다.
흑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소.”
“좋아, 그럼 무림맹의 조직도와 수뇌부 관계에 대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다음 귀왕반장 주인장에게 넘겨라.”
“기한은?”
“빠를수록 좋아.”
“사흘 안에 드리겠소. 조직 정비도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요.”
“좋아, 충분해.”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자 흑선이 시선을 들었다.
“정말 이걸로 끝이오?”
“끝이야. 아, 그동안 너희들이 받은 자금이나 영약들은 어디에 보관해 두지?”
“대부분 팔아서 현금화했소. 자금은 전장에 맡겼지만 그리 넉넉하진 않소. 정보를 구하는 일에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법이니까.”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남궁천이 내심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찼다.
“이제 땅굴은 그만 파라. 무슨 두더지 새끼들도 아니고.”
“알겠소.”
“그럼 정비 잘하고. 간다.”
남궁천이 손을 흔들고는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흑선은 가슴 한편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당신의 정체는 알려주지 않을 거요?”
“일 없다. 머지않아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고맙소.”
“착각하지 마. 널 위해 이런 일을 한 게 아니니까.”
“그래도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소? 고마운 건 고마운 일이지.”
남궁천이 문을 나가려다 말고 슬쩍 돌아보았다.
“새끼, 예쁜 소리만 골라서 하네. 그 감성 잃지 말고 살아라. 진짜 간다.”
남궁천이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