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등하불명(燈下不明)
주루를 나선 거구는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는 이리저리 골목을 헤집다시피 걸어갔는데, 마침내 인적이 드문 한적한 길이 나오자 남궁천을 힐끔 돌아보았다.
“여깁니다, 공자님.”
거구가 골목 안쪽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말했다.
남궁천은 문득 옛 생각이 떠올라서 거칠게 대꾸했다.
“알았다, 이 새끼야.”
“…….”
거구가 기분 나쁜 듯 눈썹을 성큼 치켜 올렸지만 남궁천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래전 불명회가 자신에게 정보를 넘기지 않았던 기억이 떠올라서 더한 말도 해주고 싶었지만 참는 중이었기에.
모퉁이를 돌아가니 마침 골목 한쪽에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남궁천이 입매를 슬쩍 비틀었다.
‘이 새끼들은 여전하네.’
확실히 겉으로 보기에는 어느 귀공자가 타고 다닐 만한 마차처럼 보인다.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마차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감한 표정.
사내가 무심한 듯 묻는다.
“등잔 밑으로 가시겠다고?”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고갯짓으로 올라타라는 시늉을 한다.
남궁천이 올라타자 마차 문이 닫혔다.
다그닥…….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면서 출발했다.
창문이 닫혀 있어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마주 앉은 남자가 남궁천을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나 좋은 기억이 없는 남궁천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뭘 그리 꼴아 봐.”
“훗. 처음 보는 얼굴인데.”
“네놈들이 강호인을 다 아냐? 웃기고 자빠졌어.”
“입이 거칠군.”
“더 거칠게도 할 수 있는데 참고 있다.”
“하하. 그리 흑도인이라는 티를 팍팍 내지 않아도 상관없소. 어차피 우리 존재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 떳떳한 강호인은 아니란 뜻이니.”
“넌 내가 흑도인 티 내려고 이러는 걸로 보이냐?”
“아니면…… 본 회에 원한이라도?”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묻는다.
원한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말투다.
감히 자신들을 건드릴 무인은 없다는 걸 안다는 거지.
하나 내가 대살성이라는 걸 말해줘도 저런 표정일까? 네놈들 때문에 삼 개월간 뒈질 고생을 하며 이를 갈았다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물론 내가 그걸 말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원래 내 말투다, 병신아.”
뭐, 이건 사실이고.
사내가 피식 웃더니 남궁천을 아래위로 한 번 훑고는 묻는다.
“뭘 원하시오?”
“지랄하지 말고 안내나 해. 너 같은 새끼가 끼어들 판이 아니니까.”
그제야 사내의 표정도 자못 진중해졌다.
그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는지, 남궁천을 빤히 보며 물었다.
“대가를 치를 능력은 되시고?”
남궁천이 말없이 검은 천을 풀어 벽라검을 드러내 보였다.
스르릉.
검파를 쥐고 조금 뽑아내자, 사내가 흠칫거리면서 옆구리로 손을 가져간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쫄지 마, 이 새끼야. 보여주려는 거야. 네놈들도 쉽게 구경하기 힘든 보검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디서 난 거요?”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사내는 아직 남궁천이 들고 있는 검이 벽라검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 역시 무인인 만큼 평범한 검이 아닌 것만은 확실히 알아챈 것 같았다.
“오다 주웠다.”
이번엔 사내가 피식 웃었다.
“뭐, 출처를 밝히기 싫다면 강요는 하지 않소. 하나 위에서 문제를 걸고넘어질 순 있소.”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뭐, 그러시든지. 그럼 어느 선까지 안내해드리면 되겠소?”
“회주를 만나야겠다.”
“……!”
“왜? 안 돼? 이거 되게 좋은 검이야. 욕은 안 먹을 거다.”
“끄음. 알겠소. 그럼 우선…….”
“줘. 내가 뒤집어쓴다.”
남궁천이 손을 내밀자 사내가 다시 한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멍하니 품에서 검은 천을 꺼내는데, 남궁천이 그걸 빼앗듯이 들고는 머리에 뒤집어썼다.
앞이 캄캄해졌다.
사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본 회와 거래해 본 적이 있으시오?”
“없어.”
“한데 우리 방식을 잘 아시는군.”
“쥐구멍 파서 사는 새끼들 하는 짓거리가 다 거기서 거기…….”
말을 뱉던 남궁천이 이내 의식을 잃고는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검은 천에 미리 묻혀놓은 수면향 때문이다.
방향 감각이 뛰어난 고수들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마차가 회전하는 방향, 길바닥의 포장 상태 등만으로도 위치를 추측할 능력이 있기에.
남궁천은 아예 드르렁 드르렁 코까지 골면서 숙면에 빠졌다.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놈이지?”
* * *
꿈을 꾸었다.
전생에 실제로 겪었던 꿈에 망상이 더해진 꿈이었다.
남궁천은…… 아니, 진천랑은 불명회를 찾아갔고, 회주와 독대했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회주는 정보를 내어주지 않았고, 진천랑은 화가 나서 회주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여야 하는데…….
짜악!
오히려 진천랑의 뺨이 휙 돌아갔다.
어찌나 뺨이 화끈거리는지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발끈한 진천랑이 휙 돌아보자, 다시 회주가 뺨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짜악!
이게 아닌데?
원래 내가 때렸는데? 물론, 상대는 회주가 아니라 그 졸개였지만.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손찌검이 날아드는 순간, 남궁천은 눈을 번쩍 뜨고는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다.
탁!
어두컴컴한 동혈 안.
횃불을 들고 있는 사내가 비린 웃음을 지었다.
“이제정신이 좀 드셨소?”
남궁천이 잠시 눈살을 구기고 꿈과 현실을 구분했다.
‘지하인가?’
남궁천이 사내의 손목을 놔주고는 엉거주춤 일어났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한 식경 정도.”
한 식경이라.
기분 같아서는 한나절은 잔 것 같은데 그것밖에 지나지 않았나?
그사이 남궁천은 마차에서 어딘지도 모를 동혈 안으로 이동해 누워 있었다.
등하로(燈下路).
와본 적이 있다.
전생에 불명회를 찾아갔을 때, 이 등하로를 지나갔으니까.
거미집처럼 복잡하게 얽힌 지하 통로.
무한의 땅속에 이런 복잡한 길이 뚫려 있다는 걸 알면 무림맹뿐만 아니라 황궁도 놀라지 않을까?
남궁천은 허리춤의 벽라검을 확인하고는 다짜고짜 사내의 뺨을 올려붙였다.
짜악!
“이런 씨벌…….”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사내도 이번엔 황당했는지 눈을 부라리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눈 깔아, 이 새끼야. 먼저 때린 건 너야.”
“그건……!”
“한 번만 더 이따위로 깨우면 죽여 버린다.”
사내는 반박을 하려다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눈알을 부라리는 남궁천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진심이 느껴졌기에.
눈알이 번들거리는 게 제가 무슨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사고 칠 것만 같은 광기가 느껴진 달까?
“미친놈.”
결국 사내가 차갑게 한마디 뱉어내고는 앞장섰다.
남궁천이 뒤를 따라가며 투덜거렸다.
“그냥 회주에게 바로 데려다주지. 왜 여기서 깨워서 욕 처먹고 지랄이냐?”
“무거우니까.”
“그러면서 여자들은 잘도 옮기지?”
사내가 흠칫거리고는 슬쩍 돌아본다.
남궁천이 ‘뭐?’ 하는 표정으로 쏘아보자 사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불명회는 실제로 흑도인들이 납치한 처자들을 받아서 성노예로 부리거나 팔아먹기도 했다.
하여튼 못된 짓은 다 했다.
‘그중에서도 내 정보를 무림맹에 흘린 게 제일 못된 짓이지만.’
한참 묵묵히 걷던 사내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안 건진 몰라도 여자 문제는 본 회에 몸담은 자들 모두의 뜻은 아니오.”
이것 봐라?
꼴에 양심은 있다고 버티는 건가?
남궁천이 이죽거렸다.
“그럼? 회주의 뜻이냐?”
사내는 대답 대신 걸음만 옮겼다. 그렇게 복잡한 등하로를 얼마나 걸었을까?
다시 되돌아가라고 해도 헷갈려서 길을 잃을 정도로 한참을 이동했을 때, 마침내 사내가 개미굴 끝에 다다랐다.
개미굴 끝에는 계단이 있었다.
물론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이곳에만 있진 않으리라.
불명회 녀석들이 의뢰자에게 등하로를 보여주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들이 이만큼 대단하다는 걸 인정받기 위해서.
무한 지하에 이만한 개미굴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으니 믿고 맡기라는 뜻이다.
“다 왔소.”
사내가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문을 열고 나오자 강한 햇살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사방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장원이었는데, 정확히 어딘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지난번과 또 다르군.
회주가 거처를 옮긴 모양이다.
이렇게 자주 거처를 옮기니 어쩌면 불명회에 돈이 그리 많진 않겠단 생각도 든다.
안마당을 지나서 회랑을 지나고 모퉁이를 꺾어 돌자 방 하나가 나타났다.
입구에는 장정 둘이 서서 지키고 있었다.
사내가 장정들에게 다가가서 뭐라고 말하자, 장정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남궁천은 사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접견실처럼 보이는 장소가 있었고, 저만치 주렴이 쳐진 곳 너머로 그림자가 보였다.
살이 투실투실 찐 그림자.
그리고 나신으로 보이는 여인들의 그림자가 살찐 그림자에게 쉼 없이 엉겨 붙고 있었다.
강호에 몸담고 살면서 저리 여인에게 둘러싸여 살 찔 여유가 있다니. 참으로 상팔자가 아닌가?
살찐 그림자가 이쪽을 보더니 기름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서 기다려라.”
살찐 그림자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돌아섰다.
남궁천이 그런 사내를 얼른 불렀다.
“어이.”
“……?”
“너 이름이 뭐냐?”
사내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는 살찐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그림자가 가만히 있자, 사내가 툭 던지듯 대답했다.
“흑선(黑線)이라 부르시오.”
“그래, 흑선. 욕 봤다.”
“미친놈…….”
오랜만에 전생의 별호 같은 소리를 자주 들으니 기분이 좋아진다.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아가는 기분이랄까?
남궁천은 둥근 탁자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벽라검을 척 올려두었다.
“오랜만이다, 회주. 그사이에 살이 더 쪘구나.”
“……!”
주렴 너머의 살찐 그림자가 움찔거린다.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는 얼굴 다 내놓고 응대하더니, 이젠 신비주의 설정으로 바꿨나? 아니면 살이 너무 쪄서 쪽팔려서 숨었나? 그런데 그거 알아? 못생긴 새끼는 그림자도 못생겼다는 거.”
남궁천이 낄낄대자 주변에서 살기가 칼바람처럼 불어온다.
곧이어 천장에서 그림자 넷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더니 일제히 칼을 뽑아든다.
차차차앙!
남궁천이 네 사람의 기도를 빠르게 훑었다.
‘어디 보자…… 절정고수가 넷. 아직도 두 놈이 주렴 너머에 남아 있군. 그리고 회주도 절정.’
총 일곱 명의 절정고수. 그중 회주가 제일 강하다. 그다음으로는 회주를 밀착 호위하는 두 명이 강하고.
눈앞에 나타난 네 명은 가장 약하지만 역시나 절정은 넘어선 자들이다.
호위무사 아니랄까 봐 조금 뻣뻣하긴 하지만.
주렴 너머에서 기름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를…… 아는 분이시던가?”
“너무 잘 알지, 이 씹새끼야.”
내가 뒤끝은 없지만, 아주 가끔 티끌만 한 앙금이 남는 경우가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