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등하불명(燈下不明)
진소홍이 두 눈을 찢을 듯 부릅떴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다행히 헛짚은 건 아니군. 이름이 그대로여서 오히려 조심스러웠는데. 역시 이름을 바꾸지 않은 건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걸까?”
그제야 진소홍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아뿔싸.
표정 관리를 했어야 했다.
들켜도 모른 척했어야 했다.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바라봐야만 했는데…….
’하지만 너무 정확히 콕 짚어버려서 차마 반응을 감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또래의 생도가 아닌가?
다른 누구도 아닌 생도가 이렇게 빨리 눈치챌 거라곤 예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게 남궁천이라면…….’
역시 그럴 만한 걸까?
물론, 불과 몇 개월 전까지의 남궁천을 떠올린다면 절대로 이상한 일이지만.
최근 그녀가 보고 겪은 남궁천이라면 그리 놀랍진 않다.
금왕.
장강 이남의 모든 자금 흐름을 손에 쥐고 있다는 남자.
그를 지칭하는 말은 많다.
금왕, 상왕, 만금진인 등.
하지만 공식 명칭은 만금상회주(萬金商會主)다.
오죽하면 장강 이남에서는 길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워도 금왕에게 절을 한다고 할까?
그만큼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돈이 없다는 뜻이다.
돈이 너무 많아서 황제가 직접 금왕을 찾아간 일이 있다고 하니 말 다 한 셈이 아닌가?
경악한 진소홍과 달리 남궁천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굳이 내공을 소모하면서까지 역용술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 신분. 밝혀지면 상당히 피곤해질 수 있을 테고, 또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 뿐만 아니라 신분을 가려야 더욱 철저하게 타인을 관찰할 수 있을 테고. 금왕도 실제론 역용술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지? 하긴 그러지 않으면 온갖 사기꾼이 다 달려들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금왕도 참 대단해. 아직까지 금왕의 진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다던데. 아, 갑자기 궁금해지네. 넌 아빠의 진짜 얼굴을 알아?”
“어…….”
뭘 멍청하게 대답한 거야? 지금?
진소홍은 다시 한번 정신이 퍼뜩 들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물었다.
“그래서 인피면구는 구해줄 수 있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넋이 나가 있던 진소홍도 조금 진정이 됐다.
정말 믿기 힘들지만 남궁천은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꿰뚫었다.
사실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아는 사람은 용천관주뿐이었다.
남궁천의 말대로 아버지가 금왕인데 가짜 신분 하나 못 만들겠는가?
강호에서는 사문을 숨기려고 할 때는 묻지 않는 게 예의다.
하나 가짜 신분을 만드는 게 밥 먹기보다 쉬운 금왕에게는 굳이 딸의 신분을 숨기고 자시고할 필요가 없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신분을 만들면 되니까.
그래서 아무도 몰랐다.
용천관주만을 제외하곤.
그런데 남궁천이 알아 버렸다.
정말 정교하게 만든 인피면구까지.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남궁천이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왜, 왜 그래?”
“정말 정교해서. 의심을 하고 봐서 눈치를 챈 거지, 그냥 봐선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거야. 아, 인피면구 말하는 거다.”
“아…… 응. 그런데 왜 인피면구가 필요해?”
처음으로 질문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지 않은가?
다음 시험은 아직 열흘 이상 남았다.
그리고 사차 시는 승자결 방식으로 이뤄지는 공개 비무.
한데 도대체 인피면구는 어디에 쓰려고?
남궁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대답해줄 수 없어.”
“그럼 나도 줄 수 없어.”
“그건 좀 아쉽네. 그래도 상인이라면 호기심 충족보다는 실리를 따져야 하지 않을까?”
진소홍의 눈이 반짝였다.
실리를 따져?
금왕의 딸인 자신에게 실리를 따지라고?
아무리 그래도 어려서부터 상인으로서의 자세를 뼈에 새기도록 듣고 자란 그녀였다.
실리를 따진다면 더욱 남궁천은 어려워질 거다.
자신의 마음을 흔들 만큼 제대로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까.
진소홍이 입매를 살짝 말아 올리며 물었다.
“좋아, 그럼 내가 구해줬을 때 얻을 수 있는 건 뭐지?”
“비밀 유지.”
“뭐?”
“네 정체가 밝혀지지 않겠지.”
진소홍이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건 내게 이득이 아냐.”
“손해도 아니지.”
“나는 이득을 원해.”
“욕심을 버려. 상인의 기본은 손해를 보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나를 협박하는 거구나?”
“난 널 죽이겠다거나 해하겠다고 한 적 없어. 네가 누군지 알릴 수 있을 뿐. 그게 협박으로 느껴졌다면 어쩔 수 없고.”
“그렇게까지 비열한 짓을 하겠다고?”
“네가 협조하면 비열해지지 않을 거고.”
“비열해질 수는 있고?”
“글쎄? 어떨까?”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바라본다.
진소홍은 심장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이 아이…… 할 수 있어!’
어쩜 사람이 이렇게 다른 모습이 될 수가 있을까?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된 기분이다.
분명 협조를 구하러 온 사람인데, 어느새 협박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그 협박을 충분히 실행할 수 있을 사람으로 보인다.
진소홍은 심호흡을 하고는 말했다.
“네 말에는 어폐가 있어. 내가 널 위해 인피면구를 구하게 되면 그만큼 손해가 커. 최고급 인피면구라면 전각 한 채 정도의 값이야. 그런데 손해가 없다니?”
“확실히 그건 그렇군.”
남궁천이 너무 순순히 수긍하자 진소홍은 오히려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녀가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정도의 손해가 발생한다면, 네가 내 정체를 밝히는 것까지도 감수할지도 모르지.”
“과연. 그럼 협박이 먹히질 않겠어.”
역시 협박이었던 거냐!
진소홍이 내심 발끈했지만 속으로 화를 삭였다.
남궁천은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진소홍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자못 깊어 보였기에 진소홍은 괜히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치 사람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네.’
만약 진소홍의 생각을 남궁천이 들었다면 망설이지도 않고 수긍했으리라. 실제로 남궁천은 지금 진소홍의 내기를 살피는 중이었으니까.
이윽고 남궁천이 입을 열었다.
“그럼 네 무공도 손을 좀 봐줄게.”
“내 무공을? 어떻게?”
“더 발전시켜 줄 수 있다. 지금보다 더 강하게.”
“그게 가능…….”
“직접 봤으니 알 텐데. 윤종승과 팽수혁을.”
진소홍이 흠칫거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나에게 투자를 하기로 하지 않았나?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 같은데.”
“내가 투자하기로 하다니?”
“맹주전으로 불려갔을 때, 너는 날 거들었어. 금왕의 따님이 아무 생각 없이 날 도왔을 리가 없잖아?”
‘도대체 이 인간은 어디부터 알고 있는 거야?’
이쯤 되면 눈치가 백단이 아니라, 독심술이라도 쓰는 게 아닐까 싶다.
사실 진소홍은 이미 마음을 정해두긴 했다.
남궁천을 도울 것이다.
남궁천 말대로 이미 맹주전에서 그에게 투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항상 말씀하셨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잠룡과 인연이 닿게 된다면 큰 투자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진나라 황제를 세운 여불위처럼 말이다. 알겠느냐? 잠룡을 알아보는 눈. 그것이야말로 상인이 갖춰야 할 최고의 덕목이니라.”
춘추전국 시대에 여불위가 안국군의 아들 영이인을 알아본 것처럼, 자신은 지금 대살성의 아들 남궁천에게서 검제의 기운을 보고 있었다.
잠룡.
남궁천은 분명 잠룡이다.
잠룡이 가져야 할 모든 덕목을 다 갖췄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자신을 협박하고 회유하는 과정까지 겪고 나니…….
‘내 생각보다 더 대단한 잠룡이었어!’
그래, 금맥보다는 인맥이다.
진소홍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스리며 고개를 들었다.
“협조할게.”
“고마워.”
“인피면구는 언제까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사흘 후까지 구해줄게.”
“그 정도면 괜찮아.”
“외모는 상관없어?”
“남자면 돼.”
“알겠어.”
“이왕 말 나온 김에 네 진짜 얼굴도 궁금하긴 하군.”
진소홍이 멈칫했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신뢰의 증표로 보여주지.”
어차피 남궁천을 밀어보기로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확실히 손을 잡는 거다.
진소홍이 섬섬옥수를 들어 목 언저리의 살결을 잡아 뜯었다.
그 모습은 마치 제 살을 거칠게 뜯어내는 것 같았기에 언뜻 엽기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어디 놀라지나 마시라.’
쫘아아악!
주근깨 빼곡한 살가죽이 뜯어져 나가자 놀랍게도 백옥처럼 희고 맑은 피부가 드러났다.
기다란 속눈썹과 맑고 깊은 눈동자, 오뚝한 코와 앵두처럼 붉은 입술, 갸름한 턱 아래로 매끈하게 이어지는 목선까지.
절세가인(絶世佳人)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그야말로 세상에 견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고운 달빛마저 질투할 만큼 예쁘다.
인피면구를 벗어낸 진소홍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그런데…….
‘뭐야? 이 반응은…….’
당황스럽다.
지금껏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고 이렇게 목석같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침을 흘리거나,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리거나, 심지어 그 자리에서 주저앉는 남자까지 있었다.
한데 이 인간은 반응이 전혀 없다.
아니, 한마디 하긴 한다.
“예상대로 예쁜 얼굴이네.”
그게 끝……?
이봐. 나 진소홍이야.
금왕의 외동딸!
하나 정말 끝이다.
이 기분은 뭐지? 오기인가? 자존심인가? 아니면 그저 낯선 상황에 당황한 건가?
마음이 복잡하게 일렁이는데, 남궁천이 자리에서 슥 일어난다.
“어디 가……?”
“할 말이 더 있어?”
오히려 남궁천이 되묻는다.
할 말이…… 더 없구나.
뭔가 김이 빠진다. 이내 진소홍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사흘 후까지 구해줄게.”
“그럼 부탁할게.”
“또 필요한 건 없어?”
“없어. 아! 혹시 사람 좀 구할 수 있을까?”
“사람이라면?”
“점소이 일을 좀 가르칠 만한.”
“점소이를……?”
“그것도 좀 부탁하지.”
그 역시 별로 어려운 부탁이 아니기에 진소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남궁천이 돌아가고 나서 진소홍은 문에 등을 기대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만만하게 인피면구를 벗겨낸 일이 뒤늦게 부끄러움으로 몰려왔다.
‘으으으……! 남궁천……! 진짜 넌……!’
참 이상한 애구나!
* * *
사흘 후 진소홍은 약속대로 인피면구를 구해줬다. 제법 싹싹해 보이는 점소이도 한 명 같이 보내왔다.
점소이를 귀완 반장에 데려다준 후 귀왕과 귀소이들을 철저히 교육시키도록 했다.
그리고 곧바로 벽라검을 검은 천으로 둘둘 말고, 인피면구를 덮어 쓴 다음 저잣거리로 향했다.
이미 귀왕이 정보를 물어왔기 때문에 불명회와 접선할 장소는 알고 있었다.
저잣거리에서도 변두리에 위치한 주루.
남궁천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대낮부터 술을 마시던 사람 몇 명이 보였다.
그들은 남궁천을 한 번 힐끔거렸지만 곧 별 관심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남궁천이 자리에 앉자 점소이가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쇼! 나리, 뭘 드릴…….”
“닥치고 데려와.”
남궁천이 싯누런 금화 한 닢을 올려두자, 점소이가 재빨리 행주로 탁자를 훔치더니 몸을 숙였다.
금화는 이미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점소이가 물러가고 나서 한참이나 사람이 오지 않았다.
슬슬 짜증이 일어나서 한바탕 뒤엎을까 싶은 찰나, 웬 거구가 문을 열고 나타나더니 남궁천을 보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공자님, 여기 계셨습니까? 한참 찾았습니다요. 어서 가시지요.”
일면식도 없는 거구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나 남궁천은 그것이 불명회의 암어라는 것을 눈치챘기에 군말 없이 일어났다.
“앞장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