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살려는 드릴게
“다른 조가 연합을?”
당예설이 눈살을 찌푸리자 팽수혁이 연신 씨근거리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아예 작당을 해서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궁천 혼자 정협관 생도들을 상대하고 있다고? 산채 연공실에서?”
“그렇다니까요!”
팽수혁이 어깨까지 들먹이면서 식식거렸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성질대로 칼부림을 하고 싶은데, 당예설은 의외로 차분한 표정이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이나 생각만 하던 당예설이 무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렇다고 규정을 위반한 건 아니야.”
“뭐라고요? 그럼 용천관이 훨씬 불리하지 않습니까? 같은 동기들끼리 연합해 버리면 용천관은 자연히 세력이 제일 약해질 텐데요!”
“물론 그렇겠지만 그 또한 강호의 생리다.”
“그런 불공평한……!”
“본 맹은 그 불공평함을 공평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야. 한데 너는 애초에 공평한 곳에서만 싸우겠다는 생각인가?”
“그,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그런 뜻으로 들리는데.”
“이익……!”
팽수혁이 발끈해서 주먹을 쥐었지만 더 이상 말을 붙이진 못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지금 불공평함에 대해 투덜대고 있었으니.
당예설이 팽수혁을 직시했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고 억울한 거야. 그래서 본 맹이 존재하지. 본 맹은 불공평함을 공평하게 만들고 더는 억울한 자가 나오지 않도록 정의와 협의를 바로 세우는 걸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한데 이렇게 쪼르르 달려와서 시험이 불공평하다고 운운할 거라면 왜 무공을 익힌 거지? 양민들처럼 생업에나 종사하면서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노골적인 질타에 팽수혁의 얼굴은 귀까지 빨개졌다.
뭐라도 말을 하려고 입을 벙긋거렸지만 금붕어처럼 말은 나오지 않았다.
당예설이 피식 웃었다.
“학관과 본 맹은 단순히 무공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야. 살아가는 기술을 가르치는 거지.”
그러자 이번에는 듣고만 있던 진소홍이 차분한 얼굴로 나섰다.
“그래도 지금은 시험이 끝난 시점이니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연공실은 밖에서만 열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당예설이 그녀를 힐끗 돌아보았다.
의외였다.
특별히 외모가 뛰어나지도 않고, 성격이 유별나지도 않은 여생도. 그래서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차분한 표정으로 할 말을 다 한다.
오히려 팽수혁보다 이 상황을 냉철하게 받아들이는 모습.
‘그러고 보니 이 아이는 어디 출신이었더라?’
워낙 존재감이 희미하다 보니 용천관 생도라는 것만 기억해두고 있었다.
당예설은 나름 진소홍을 대견하게 여기며 대답했다.
“그래, 가봐야지. 시험이 끝났으니. 합격을 축하한다.”
말을 마친 당예설은 표정을 굳혔다.
팽수혁에게는 따끔하게 일렀지만, 그녀 역시 내심으로는 신경이 쓰였다.
지금까지 동기들끼리 연합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올해처럼 일방적인 경우는 없었다.
‘용천관은 올해 양극화가 심한 것 같군. 서둘러 가봐야겠어.’
부상당한 백리향을 제외해도 정협관 생도만 열네 명. 거기엔 강호 십대세가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매번 놀라게 하는 남궁천이지만 이번만큼은 어려울 거다. 애초에 남궁천은 정협관 생도들에게 너무 많은 비호감을 사 버렸다.
정말이지 금혈서에 관한 사실을 알고 나서는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정협관 생도들이 남궁천을 순순히 놔두진 않을 터. 더구나 삼차 시에 떨어지게 됐으니…….
‘얼마나 피 반죽을 만들어 놨을까? 일단 의원은 반드시 데려가야겠고…….’
희미하게 한숨을 내쉰 당예설이 고개를 들었다.
“부단주.”
“예, 단주!”
당예설 곁으로 부단주가 새처럼 내려서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약천당으로 가서 실력 좋은 의원을 데려와. 부상이 꽤 심할 것 같으니 응급약은 모조리 챙기라 하고.”
“존명!”
대답을 마친 부단주가 다시 몸을 날려 사라졌다.
당예설이 팽수혁과 진소홍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그제야 팽수혁도 씨근거리면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당예설은 두 사람을 따라가면서 생각했다.
‘정협관 녀석들이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남궁천을 불구로 만들진 않겠지. 아니, 그럴 수도 있으려나?’
남궁천은 왠지 모르게 격장지계가 몸에 밴 것 같으니 매를 벌지도.
마음이 급해진다.
‘서둘러야겠어. 정말로 더 큰 사고가 터지기 전에.’
* * *
“끄으으……!”
“아으윽……!”
여기저기 널브러진 생도들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온다.
백리향은 덜덜 떠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면서 버텼다.
남궁천은 그야말로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였다. 벽라검을 바닥에 거꾸로 꽂아 넣고 다섯 보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싸움은 압도적이었다. 생도들은 제 몸이 타 죽을 줄 모르는 불나방처럼 남궁천에게 몸을 던져갔다.
아니, 생도들은 알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면 타 죽는다는 것을.
하지만 갈 수밖에 없었다.
안 가면 그가 올 것이기에.
남궁천이 움직이면 그야말로 재앙이 펼쳐질 것만 같았으니까.
백리향이 덜덜 떨며 시선을 옮겼다.
누구 하나 몸이 멀쩡한 자가 없다.
관절이 기이하게 꺾여서 앓는 소리만 낸다.
저벅저벅.
남궁천이 백리향을 향해 다가왔다.
“아…….”
다리에 절로 힘이 풀려 휘청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당장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백리향은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내가 알던 그 남궁천이 맞나? 원래 저렇게 얼음장보다 차가운 눈초리를 지녔던가? 용천관 공식 호구 남궁천이 정말 맞나?
가죽만 덮어쓴 다른 사람 같다.
백리향은 이제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떨었다.
심심하면 남궁천의 뺨을 때리고, 남궁천이 먹는 음식에 침을 뱉거나 흙을 뿌리고, 엎드린 남궁천을 밟아 마차에 오르고, 남궁천의 허벅지를 불에 달군 부지깽이로 지져 버리던 시절도 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소비했던 지난 시간들이 이젠 공포로 다가온다. 그야말로 거대한 죽음이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만 같다.
마침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남궁천이 다다랐을 때, 백리향은 잔뜩 쉰 소리를 힘겹게 끄집어냈다.
“흑…… 죄,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모르겠다.
그런데 이 순간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그녀의 머리를 완전히 짓누르고 있었다.
남궁천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싸늘하게 웃는다.
“살려는 드릴게.”
순간 남궁천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이마에 꿀밤을 맞은 백리향이 포탄처럼 튕겨 날아갔다.
쿠당탕탕!
그녀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궁천이 자신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배를 슬슬 문질렀다.
“배고프네.”
* * *
‘용케도 다치지도 않았구나.’
당예설이 산채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하필이면 남궁천이 속한 조가 선택한 길이 그리 만만한 편은 아니었다.
마당이 푹 꺼지고 사방에서 암기가 날아들고 불이 이글거렸을 텐데도 침착하게 잘 대응한 모양이다.
그러니 인질도 잘 구해왔을 테지.
함께 온 윤종승도 기관이 작동하는 바람에 난장이 된 산채를 둘러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대단해. 이런 기관을 다 뚫고 들어갔다 온 거야?’
그런 와중에 자신은 홀로 대연무장에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미안한 마음과 함께 조바심이 일어났다.
‘나도…… 반드시……!’
그런데 연공실로 향하는 낭하로 들어섰을 때였다.
당예설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더니 눈살을 구겼다.
‘이건……?’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화살이 양쪽으로 날아가 벽에 처박혀 있었다.
벽이 파손된 정도를 보니 강궁이다.
게다가 바닥에는 길게 끌린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정도면 상당한 위력이 실렸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전의 세침이나 암기류와 달리 저 시커먼 화살촉은…….
‘살상용…….’
당예설이 미간을 곱게 찡그리고 서 있자 뒤따르던 부단주가 슬며시 불렀다.
“단주님?”
당예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팽수혁과 진소홍을 보았다.
“화살을 막은 게 누구지?”
“남궁천입니다.”
팽수혁이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뒷말을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뜻이 좋다지만 사람 죽일 생각으로 설치한 것도 아니고, 쳇!”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 뜻이 있겠죠. 강호는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요. 목숨 절반은 내놓고 덤벼야 한다는 뭐 그런 가르침.”
팽수혁이 약간 빈정거리듯 말했지만, 당예설은 생각에 잠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기관장치를 고의적으로 조작했나? 하지만 남궁천이 이곳에 들어올 걸 어찌 알고? 혹시 정협관 생도들이 단합을 한 것도 그 배후의 짓이려나?’
그렇다면 확실히 계획적일 수도 있다.
사실 시험에서는 이렇게 위험한 살상용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푹 꺼진 안마당과 세침이 날아드는 복도, 갑자기 치솟는 불길도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단, 저 강궁은 꽤나 위험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 저기만……?
이유는 하나다.
표적이 반드시 나타날 장소라는 것.
연공실로 향하는 길은 모두 셋.
그중 표적이 어떤 길로 들어설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떤 길로 들어서든지 연공실 문은 반드시 열게 되어 있다.
그리고 생도들이 단합을 해서 남궁천이 연공실에 제일 먼저 나타날 것을 알았다면?
물론 여기에서도 문제는 있다.
문을 연 사람이 팽수혁이나 진소홍이 됐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오면 확률은 삼 할 이상이다.
그런데 일차 시와 이차 시에서 모두 눈에 띄는 행동을 한 게 남궁천이었으니, 조를 앞장서서 이끄는 것도 남궁천일 가능성이 높다.
즉, 연공실 문을 앞장서서 열 사람도 남궁천일 거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 있다.
확률이 좀 더 올라간다.
당예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누군가…… 남궁천을 노리는 건가? 왜?’
그나저나 저 강궁을 막아낸 남궁천도 어지간하다.
‘도대체 이 아이는 어디까지 날 놀라게 할 셈인지.’
그때 부단주가 다시 불렀다.
“단주님? 서두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래.”
당예설이 상념에서 빠져나오면서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이 갈라진 화살로 향했다.
“부단주, 저 화살을 챙겨.”
“갈라진 화살 말씀입니까?”
“그래.”
“알겠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팽수혁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팡팡 치며 소리쳤다.
“지금 뭐 하십니까? 당장 남궁천이 피떡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겁니까?”
“그리 걱정되면 같이 싸우지 그랬나?”
“이익! 누, 누가 그 녀석을 걱정한답니까? 그놈은 본 가 원수의 자식이라고요!”
“원수의 자식이라…….”
당예설이 가만히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이미 팽수혁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에선 원망이나 증오를 찾아볼 수 없었기에.
사실 그녀 역시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뭔가 심상찮다.
저 화살도 그렇고.
왠지 주변에서 묘한 파문이 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파문의 중심에는 남궁천이 있는 것 같고.
마침내 연공실 문 앞에 다다르자 부단주가 얼른 다가가 잠금장치를 열기 시작했다.
당예설이 의원을 향해 말했다.
“준비하세요.”
“예, 단주님.”
의원이 얼른 침통과 갖가지 비상약을 꺼내 들었다.
당예설은 잠금 장치가 하나씩 열리는 걸 보며 말했다.
“많이 다쳤을 겁니다. 혹시 많이 심각한 상황이면 응급처치만 하세요. 부단주가 바로 옮길 겁니다.”
“알겠습니다.”
의원이 긴장한 채로 연공실 문을 쳐다보았다.
마침내 부단주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의원은 물론 당예설과 팽수혁, 진소홍도 얼음처럼 굳어서 눈만 퉁방울처럼 부릅떴다.
처참한 몰골로 잔뜩 널브러져 있는 생도들.
그중 엎어져 의식을 잃은 독고진의 등짝에 남궁천이 걸터앉아서는 손을 흔들며 웃었다.
“늦으셨네요.”
의원이 침통을 툭 떨어뜨리고는 울 것처럼 말했다.
“단주님…… 이렇게 많다고는 말씀 안 하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