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살려는 드릴게
남궁천은 불나방처럼 날아드는 열네 명의 생도를 보면서 모처럼 향수에 젖어들었다.
그래, 전생에는 이런 일이 흔했지.
과장 좀 보태면 눈만 마주친 인간이라면 죄다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그런데 가만, 왜 열네 명이지?
송원교를 빼도 열다섯이 되어야 할 텐데.
어지럽게 날아드는 불나방들 사이로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백리향이 보였다.
그녀는 차마 공격에 참여하진 못하고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는 중이었다.
남궁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야 지능이 돌아가나?’
저렇게 바짝 쫄아서 웅크리고 있는 가엾은 생물을 무턱대고 밟아댈 수도 없고.
생각을 끝낸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더니 그대로 바닥에 박아 넣었다.
콰아악!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납고 강맹한지 정신없이 달려들던 불나방들이 멈칫했다.
벽라검을 휘두르지는 않고 바닥에 거꾸로 박아 놓은 것도 이상했다.
반면 남궁천은 주춤거리는 생도들을 보니 마치 불길을 앞두고 주저하는 불나방들처럼 보여서 웃음이 터졌다.
바짝 쫄아서 웅크리고 있어도 부족할 판에 느닷없이 웃음까지 터뜨리니 생도들이 눈살을 구겼다.
‘뭐지? 미친놈인가?’
저마다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들이 스치는데, 일순 남궁천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진 눈길로 생도들을 훑었다.
“줄 서, 이 새끼들아. 처맞고 싶은 순서대로.”
“이 미친……?”
생도들이 잠시 넋 빠진 얼굴로 남궁천을 보더니 곧 사방팔방에서 날아들기 시작했다.
하여튼 요즘 새끼들은 말을 안 듣는다니까.
이런 반항기 가득한 녀석들을 가르치려면 교관들도 여간 고생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든다.
그러는 사이 가장 먼저 언호량이 달려와 주먹을 내질렀다.
황색 기운이 단전에서 치솟는 걸 보니 토의 기운. 게다가 전신으로 공력이 뻗어가는 길과 주먹에 집중되는 형태를 보니…….
‘진주언가로군.’
전생에 진주언가의 무인과 손을 섞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구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진주언가는 대체로 강시술에 사용되는 방식을 신체에도 적용시켜 몸을 강철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무공이 특징이다. 그래서 어설픈 공격으로는 상대에게 상처 하나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손모가지가 부러질 수도 있다.
전생에 이런 얘기를 누군가에게 했더니, 강호 십대세가에 들어가는 명문정파가 어째서 강시술을 익히겠냐며 말도 안 된다고 따진 놈이 있었지.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강호의 생리를 쥐뿔도 모르면서 편협한 사고에 사로잡혀 씨불대는 개소리다.
겉으로 번듯한 명문정파의 궁둥짝에는 호박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
어쨌거나 진주언가 놈이 제 피부를 철판때기처럼 만들어버린다고 해도 유일하게 단단해지지 못하는 부분도 있는 법.
파밧!
남궁천이 발을 미끄러뜨리듯 옆으로 반 보 정도 빠지자 파공성을 이끌며 날아들던 주먹이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언가권을 피한 남궁천이 그대로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손가락을 내질렀다.
푸욱!
물컹한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끄아아아악! 내 누우운!”
손가락을 뽑아내자 언호량이 비명을 터뜨리며 나가떨어졌다.
남궁천의 손속이 생각보다 잔인하자 거침없이 달려들던 불나방들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상황.
관성에 의해 날아들던 생도는 그대로 남궁천의 어깨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남궁천은 이미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더니 생도의 손목까지 덥석 낚아채며 그대로 이마를 들이박았다.
빠악!
“크어억!”
이마가 깨진 생도가 창을 놓치고는 그대로 튕겨 나갔다.
남궁천은 잠깐 사이에 이마를 문질렀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새끼야.”
“이여어업!”
이번엔 뒤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온다.
휘이이잉!
돌아보니 진태곤이 완만하게 굽은 만도를 휘둘러오고 있다.
남궁천이 그대로 고개를 젖히며 신법을 펼쳐 물러나자, 만도가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목을 스친다.
애초에 정말 죽일 생각으로 휘두른 건 아니겠지만, 남궁천의 대응이 워낙 살벌하다 보니 저절로 살초가 펼쳐진 것이다.
따앙!
남궁천이 손가락을 튕기자 만도가 연검처럼 휘청거리며 튕겨 나간다.
“크읏!”
칼을 놓치지 않기 위해 진태곤이 손목에 힘을 꽉 주는 순간,
“흡!”
자신의 안면으로 날아드는 커다란 주먹!
빠악!
“크아악!”
코뼈가 주저앉으며 그대로 두 눈이 주먹에 찍혀 버린다.
진태곤이 그렇게 날아가 버리자, 남궁천은 바로 옆에서 발을 뻗어오는 생도의 발목을 낚아채고는 그대로 관절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우드득!
“끄어업!”
생도가 눈이 뒤집히면서 비명을 터뜨린다.
남궁천은 생도의 발목을 쥔 채로 좌측에서 칼을 부리며 달려드는 생도에게 냅다 던졌다.
“우아악!”
쿠당탕탕!
생도 세 명이 한꺼번에 뒤엉켜 아무렇게나 구른다.
남궁천은 손끝을 가늘게 떨었다.
이 짜릿한 손맛이라니.
이렇게 구겨져서 날아가는 녀석들을 볼 때면, 가끔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길가에 널브러진 돌멩이 같달까? 알겠지만 돌멩이를 이유 없이 걷어차다 보면 굴러가는 모습이 꽤 재미있다.
지금이 딱 그렇다.
적절한 타격감과 기분 좋게 터져 나오는 비명, 아무렇게나 구겨져서 나뒹구는 돌멩이들, 돌멩이들, 돌멩이들……!
퍽! 뻐억! 퍽!
묘한 희열감이 전신을 휘감아 오른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도망자 시절의 배고픈 정신도 되살아난다.
그때는 이렇게 치고받고 싸우는 걸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하루 종일 마음 졸이며 도망만 치다 보면 신경이 굉장히 날카로워진다.
그땐 뭐든 부수고 싶어지는데, 이렇게 싸움이라도 대판 하면 차라리 속이 후련해지곤 했다.
과정은 대개 똑같다.
상대는 항상 지금처럼 분노해서 달려들다가,
퍼억!
“크악!”
이렇게 얻어맞고 튕겨 나간 후에는,
“끄으으.”
신음을 흘리면서 경계를 하다가,
퍽! 빠악! 뻑! 퍼억!
“크아악!”
“아악!”
동료들이 처맞는 걸 지켜만 보며 망연자실하게 된다.
그렇게 남궁천은 묘한 향수에 젖어 신명나게 주먹과 발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싸우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칠고 과감하며 패도적이었다.
남궁천의 두 눈에는 벌써 광기가 스며들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노오옴!”
남궁천은 배후를 공격해 오면서도 친절하게 소리를 질러 알려준 생도에게 뒤차기를 날려 감사 표시를 했다.
퍼억!
“크억!”
복부에 발자국을 새긴 생도가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굴러가자 더 이상 제대로 서 있는 생도가 없었다.
아, 저기 출입문에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백리향을 제외하곤.
남궁천은 한껏 만족감을 채운 듯 숨을 깊이 들이쉬고는 히죽 웃었다.
마음에 든다.
황금 기운은 확실히 체내에 자리를 잡고 적응을 끝냈다.
모든 움직임이 빠르고 경쾌해지면서도 무게를 더할 수 있게 됐다.
보통 이런 영물의 내단을 구하려면 어디 절벽에서 떨어졌다가 기적적으로 동굴을 발견하거나, 물에 빠져서 의식을 잃고 흘러 다니다 별천지에 이르러 기연을 얻어야 할 텐데…….
무림맹이 주최한 시험 도중에 이렇게 손쉽게 얻다니 그야말로 개꿀!
남궁천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했다.
“쓰러져 있지 마. 이겨 내. 아직 청춘이 아니더냐? 아프니까 청춘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씨불여댔더니 스스로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다만 마지막 말은 썩 마음에 든다.
그래, 아픔을 느끼던 그 청춘 시절이 없었다면 내가 여기 우뚝 서 있겠는가?
“끄으으…….”
“크윽……!”
여기저기 구겨져 있던 생도들이 응원에 힘을 얻었는지 비실비실 신음을 흘리며 일어난다.
역시 청춘이다. 이것이 바로 젊음이다.
나는 이렇듯 무공이 만개하여 활짝 핀 꽃보다는 약속에 찬 봉오리가 좋다. 꽃봉오리 터뜨리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
남궁천은 제대로 청춘을 즐기는 생도들을 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이젠 줄 설 거냐?”
“이 지독한 새끼……!”
독고진이 검을 콱 움켜쥐고는 이를 간다.
그러고 보니 쟤는 언제 나한테 처맞았지?
워낙 신명나게 손발을 휘두르다 보니 기억도 안 난다. 저 녀석이 저렇게 희미한 존재감이었다니 새삼 실망이다.
그나저나 지독하다니. 말이 심하네.
한 명을 몰매하려고 작당해 놓고 지독하단 말을 꺼내다니. 이쪽에서 해야 할 말이 아닌가?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신명이 가라앉았다.
그 순간 남궁천도 모르게 전성기에 뿜던 기운이 사방으로 훅 퍼져 나갔다.
후우우웅!
“……!”
대살성이라 불리던 그 시절의 기운.
물론 당대에 비하면 순한 양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실전 경험이 전무한 생도들은 야수의 송곳니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섬뜩하기만 하다.
낯선 감각에 몸이 뻣뻣하게 굳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남궁천이 한 걸음 내딛자, 독고진을 비롯한 모든 생도들이 움찔거리며 물러난다.
순간 독고진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남궁천의 발끝을 보았다.
‘설마 저 새끼……?’
확실하다.
남궁천은 지금 벽라검을 거꾸로 꽂아 놓고선 반경 일 장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혼자 자신들을 모두 상대한 것도 놀라 자빠질 지경인데, 상처는커녕 제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싸웠다고?
이제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들이 남궁천을 포위한 게 아니라, 남궁천이 자신들을 가둬 버렸다는 것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손발이 더욱 굳는다.
하지만 남궁천은 기다리지 않았다.
“안 오면 내가 갈까?”
“아니!”
“……?”
독고진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치고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남궁천이 직접 움직이게 되면 더 위험하다. 특히 저 미친놈이 벽라검을 뽑아 휘두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사신이 따로 없으리라.
독고진이 어금니를 까득 갈고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명령을 내렸다.
“우, 우리가 먼저 간다. 다들 쳐, 쳐라!”
“……!”
“뭣들 해! 치란 말이야!”
독고진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갔다.
순간 남궁천이 눈앞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검이 허공을 베는 순간, 턱 아래에서 주먹이 솟구쳤다.
빠악!
“커억!”
쿠당탕탕!
그대로 튕겨 나간 독고진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그는 가물가물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동기들을 보았다.
‘아…… 이왕이면 줄 서서 치라고 할 걸 그랬나……?’
* * *
“끄응.”
얼마나 퍼질러져 있었던 걸까?
겨우 의식이 돌아온 송원교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통증에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귀가 멍멍하다. 아무래도 쓰러지면서 머리를 다친 모양이다.
흐린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니 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곧 삼차 시가 종료될 상황.
얼른 몸을 일으키려던 송원교는 왼팔이 부러진 것을 깨닫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악! 젠장!”
뒤늦게 윤종승에게 당한 기억이 떠올랐다.
“어째서 내가 그딴 호구 새끼한테……!”
무심결에 말을 뱉다가 흠칫거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윤종승은 보이지 않았다.
시험은 어떻게 됐을까?
지금쯤이면 독고진이 도착할 시간이어야 할 텐데.
“끙……!”
송원교가 비척거리며 일어나서는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저쪽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다만 여전히 시야가 뿌옇고 귀까지 멍멍하니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손을 흔들면서 뭐라고 하는 것 같은데…….”
상대방의 목소리가 동굴에서 듣는 것처럼 웅웅 울리기만 한다.
이 시간이면 분명…… 독고진이 인질을 구해서 데려오는 거겠지.
송원교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고생하셨소! 역시 독고 형이 해낼 줄 알았소! 남궁천은 지금쯤 개박살이 났겠…….”
한데 출입로까지 달려온 상대가 느닷없이 날아오르면서 무릎으로 턱을 쳐올리는 게 아닌가?
퍼억!
“크아악!”
그대로 나동그라진 송원교를 노려보곤 팽수혁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이 병신 같은 놈이 뭐라는 거야? 길 막지 말고 비키라니까. 시간도 없는데. 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