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탈출은 지능 순
윤종승은 대연무장 한쪽 벽에 서서 내내 서성거렸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서녘으로 해가 꽤 기울어진 상황.
‘잘하고 있겠지? 그래, 남궁천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남궁천이니까.’
스스로 되뇌다가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남궁천이기 때문에 믿는다니.
언제부터 남궁천이 이런 존재가 됐나?
멸시하고 핍박하던 존재가 어느 순간 경계의 대상이 되더니 이제는 신뢰의 대상으로 격상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 관계라는 게 참 희한하다.
“제길! 공진분만 아니었어도!”
초조한 마음에 눈을 감고 공력을 끌어올려 보려고 했지만 역시 단전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공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공진분 때문에 운기가 안 되는 것이다.
하루 동안 효력이 지속된다고 했으니 적어도 내일까지는 공력을 사용할 수 없으리라.
‘이게 다 저놈 때문에……!’
윤종승이 벽에 등을 기댄 채 태연하게 기다리고 있는 송원교를 보았다.
윤종승과 달리 그는 별로 불안한 눈치가 아니었다. 오히려 뭔가를 기대하듯 하늘을 힐끗거리며 시간을 재고 있는 것만 같다.
마침 송원교가 시선을 돌리다가 윤종승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젯밤 송원교에게 한 방을 먹인 윤종승이었지만, 학습된 공포라는 것이 쉽게 날아가진 않는 모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던 윤종승이 오기가 생겨서 다시 송원교를 노려보았다.
송원교가 피식 웃더니 저벅저벅 걸어온다.
‘어……? 왜 오는 거야?’
갑자기 송원교가 다가오자 윤종승이 어쩔 줄을 몰라 당황했다.
하지만 곧 ‘내가 왜 당황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버텼다.
“불안하냐?”
대뜸 던져온 질문에 윤종승이 말뜻을 가늠하느라 눈살을 슬쩍 구겼다.
송원교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불안하겠지. 그 원조 호구 새끼가 갑자기 강해지긴 했지만 상대는 정협관 생도들이니까. 혹시나 해서 말인데 괜한 기대는 하지 마라. 어차피 네놈들 운도 여기까지니까.”
“그건 두고 봐야 알지.”
“뭐?”
송원교가 가소롭다는 듯 눈을 부라리자, 윤종승이 다시 눈을 내려 깔았다가 얼른 부릅떴다.
송원교가 헛웃음을 지었다.
“너 이 새끼, 어제 날 기습해서 한 대 쳤다고 눈깔에 뵈는 게 없구나? 네놈이 기습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당했을 것 같아?”
“누가 비열하게 공진분을 먹이랬어?”
윤종승이 지지 않고 따지자 송원교가 눈을 부라렸다.
“뒈지고 싶어?”
“너야말로 아직도 내가 네 호구로 보이냐?”
“허! 이래서 실수로도 맞아주면 안 된다니까. 이 미친 새끼가…….”
“뭐? 어쩌라고? 덤, 덤벼!”
윤종승이 얼른 기수식을 취하자, 이번엔 송원교가 움찔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에 윤종승의 눈이 반짝였다.
‘뭐야? 이 새끼도 쫄고 있잖아?’
분명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그 말은 적어도 경계는 한다는 뜻.
그래,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록 부상 상태라고는 하나 강호 오대세가 출신인 황보승도 이기지 않았나?
반면 송원교는 눈썹을 꿈틀거리면서 잔뜩 경계하는 낯빛으로 윤종승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 뭐야? 눈빛이 달라졌잖아.’
기수식을 취한 윤종승의 눈에 기광이 서려 있다. 예전처럼 호구 짓을 할 때나 보이던 죽은 눈빛이 아니다.
이건 마치…….
‘남궁천 같군.’
기분이 팍 상한다.
호구는 호구다워야 하건만. 요즘 다들 왜 이러나?
이놈이나 저놈이나 본분을 망각하고 제멋대로 망아지처럼 설쳐대다니!
자꾸만 짜증이 치미는데 윤종승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다.
“불안하냐고 물었냐?”
“……?”
“불안하다. 내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남들이 달리고 있을 때 서 있어야 한다는 게 불안해. 내 불안은 그쪽이야, 병신아.”
“이 새끼가…….”
송원교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다가 이내 픽 웃었다.
“너, 그 원조 호구 새끼가 성공할 것 같아? 틀렸어. 그 새끼는 여기에 돌아오지도 못할 거다.”
순간 윤종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이 새끼들…… 역시 뭔가 꾸미고 있었구나!”
“네놈들이 속한 조만 빼고 모두가 남궁천을 공격할 거다. 그 원조 호구 새끼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놈들을 건드렸거든.”
“비겁한 새끼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조가 연합해서 공격하다니!”
“그게 강호다, 이 새끼야. 지금쯤이면 한바탕 하고 있으려나? 피떡이 되었을지도?”
송원교가 이죽거리자 윤종승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후 윤종승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덤벼, 이 새끼야.”
“응?”
“또 기습으로 졌네 뭐네 씨불여대지 말고 덤비라고!”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아무렴 내가 너 같은 호구 새끼한테 질까 보냐!”
송원교가 버럭 소리치면서 바닥을 차고 달려갔다.
어차피 두 사람 다 공력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
부우우웅!
송원교가 디딤 발을 딛는 것과 동시에 강하게 왼 주먹을 휘둘렀다.
찰나 윤종승이 오른발을 앞세우고 왼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왼손이라서 졌다고 징징댈까 봐 나도 왼손으로 상대하마!”
뻐어억!
꾸드드득!
권장이 부딪치면서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찰나 송원교의 표정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크읍! 크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송원교의 몸이 붕 떠오르더니 한참이나 튕겨 나갔다.
왼팔이 흐물흐물해진 그는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아,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윤종승이 왼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물든 손바닥.
공력을 발출하진 못했지만 지공을 펼치듯 손가락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혁련장의 묘리를 다한 셈이었다.
‘이겼다!’
윤종승이 왼 주먹을 콱 쥐고는 고개를 들었다.
“남궁천은 네깟 놈이 호구니 뭐니 함부로 부를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그놈은…….”
윤종승이 고개를 돌려 남궁천 일행이 달려간 방향을 물끄러미 보았다.
“……정말 대단한 놈이라고.”
그래, 녀석은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하든 뚫고 나타날 거다!
* * *
“이거 좀 이상한데?”
산채 후문에 모인 정협관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남궁천이 후문으로 들어간 지가 벌써 두 시진이 훌쩍 넘었다. 지금쯤이면 인질을 등에 업고 나타나고도 남았을 시간.
한데 깜깜 무소식이다.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침 다른 출입로를 살피러 갔던 언호량과 진태곤이 돌아왔다.
“정문은 기관장치가 작동한 흔적도 없소.”
“측문도 마찬가지.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은 없었소.”
두 사람의 말에 독고진이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그럼 이 새끼들이 들어갔다가 아직도 안 나왔다는 건데…….”
“혹시 인질을 못 구한 게 아니겠소?”
언호량의 말에 독고진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섣불리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놈이 어쩌면 우리를 기다리는 걸 수도 있다.”
“우리가 연합했다는 걸 안다는 말이오?”
“그럴 수도 있지.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놈이라면.”
“그럼 어쩔 생각이오?”
독고진이 하늘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기다린다. 어차피 놈들은 나올 수밖에 없어. 인질을 데리고 귀환하려면.”
“하긴.”
언호량과 진태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긍했다.
독고진의 말대로 삼차 시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산채에서 인질을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다.
만약 다른 통로로 나간다고 해도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테니 대비만 철저히 하면 된다.
그런데…….
안 나온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는데 남궁천 일행은 코빼기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정협관 생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혹시 기관장치에 당한 것 아냐?”
“아니면 정말 인질을 붙잡고 우리가 들어오길 기다리는 건가?”
“이대로면 해가 저물어버리겠는데?”
“이 새끼 다 죽자는 심보 아냐? 어차피 우리에게 인질을 빼앗길 것 같으니 아예 전원 탈락을 노리는 걸지도 모르잖아?”
누군가 외친 그 한마디는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언호량과 진태곤이 독고진을 보았다.
“독고 형. 어쩔 거요? 이대로면 정말로 전원 실력이 될 수도 있소.”
“젠장! 이 개 같은 남궁천! 정녕 이딴 짓을 한단 말이지?”
독고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확실히 산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아무래도 좁은 곳에서 싸우게 될 테니 수적 우위를 앞세우기가 어렵다.
하나 그래도 이쪽은 열다섯. 상대는 인질을 지켜야 하는 셋이다.
이러나저러나 저쪽이 이길 가능성은 희박한데 끝까지 고분고분 당하진 않겠다는 건가?
‘오냐, 그렇다면 원대로 들어가서 짓밟아주마!’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다.
제한 시간을 넘겨 버리면 인질을 데려가도 전원 실격당할 수 있다.
차앙!
독고진이 검을 뽑아 들었다.
“가자!”
마침내 열다섯 생도가 우르르 후문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이제 정말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
팽수혁이 초조한 표정으로 다그쳤다.
하지만 남궁천은 가부좌를 튼 채로 운기행공을 하면서 태연히 대꾸했다.
“기다려라. 기다리면 복이 있나니.”
“아으! 도대체 언제까지! 곧 해가 저문다고!”
“기다려. 반드시 때가 도래할 것이니.”
“미치겠군!”
팽수혁이 손톱을 물어뜯으며 연공실 입구에서 연신 서성였다.
한편 진소홍 옆에 서 있는 인질 역할 생도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돌아갈 줄 알았는데, 벌써 두 시진이 넘도록 저러고 있다.
이유를 물어도 아무도 대답을 안 하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때였다.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은 역시 남궁천이었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그가 눈을 번쩍 떴다.
그다음으로 팽수혁과 진소홍이 동시에 흠칫거리고는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인질 역할을 하던 생도도 바깥에서 몰려오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마치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열 명도 훌쩍 넘을 것 같은 인원이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수혁, 소홍! 준비!”
“명령하지 마라! 남궁천!”
팽수혁이 말을 뱉으면서도 얼른 인질을 허리춤에 끼고는 출입문 위쪽으로 몸을 날렸다.
진소홍도 재빨리 유성추를 날려서 허공에 거미처럼 매달렸다.
잠시 후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한 무리의 생도들이 등장했다.
콰다앙!
동시에 열다섯 명의 생도가 우르르 연공실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왔다.
생도들이 정중앙에 앉아 있던 남궁천을 재빨리 포위했다.
독고진이 남궁천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남궁천! 인질은 어디 있나?”
“이야, 이러고 있으니 정말로 인질 잡고 버티던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나는구나.”
“뭐?”
독고진이 미간을 구기는데, 남궁천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 너하고 관련은 없고.”
실제로 남궁천은 전생에 이런 경우가 허다했다.
도망치다가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는 무림맹원을 붙들고 인질로 삼기도 했으니까.
그럴 때면 무림맹 수뇌 놈들이 꼭 쫓아와서 저렇게 말하곤 했지.
‘남궁천! 인질은 어디 있나?’라고…….
지금이 그때와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다, 팽수혁.”
탓!
그가 입을 열자 출입문 위쪽에 매달려 있던 팽수혁이 순식간에 인질을 데리고 빠져나갔다.
곧이어 진소홍이 새처럼 날아가면서 빠져나가더니 육중한 문을 곧장 닫아 버리는 게 아닌가?
“뭐, 뭣……!”
정협관 생도들이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거친 쇳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끼이이익, 쿠웅!
철컥! 철컥! 철커덩!
잠긴 문을 멀거니 바라보던 생도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긴? 네놈들 참교육하는 짓이지.”
남궁천이 히죽 웃자, 독고진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이 미친 호구 새끼가…… 삼차 시에 통과하겠다고 아주 목숨을 내놨구나. 이러면 우리가 널 죽도록 팰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냐?”
“응, 안 했는데.”
“미친놈. 어디 불구가 되어서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보마! 뭣들 해? 밟아!”
파바밧!
성난 생도들이 일제히 남궁천에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