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탈출은 지능 순
“이제 저길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팽수혁이 산채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삼차 시를 치르기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산채다. 실전을 가장한 시험이기에 제법 그럴싸한 산채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도상 표시된 출입로는 모두 세 군데. 어디로 가든 기관이 설치되어 있을 터다.
남궁천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다른 조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조금 뒤처진 조도 있을 거고 다른 출입로를 선택한 조도 있을 거다.
분명한 건 일행 이외에는 모두 정협관 생도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송원교와 백리향이 포함된 조도 있지만, 그들에게 동기의식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하고.
“들어가자.”
남궁천이 망설임 없이 말을 뱉고 성큼 걸음을 옮기자 팽수혁이 얼른 나섰다.
“잠깐.”
“왜?”
“윤종승 말대로 다른 녀석들의 반응이 심상찮아. 이 녀석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그래서라니? 만약 이놈들이 작정하고 우리를 매장시키려고 마음먹는다면…….”
뒷말을 진소홍이 이었다.
“굳이 기관장치를 뚫어가면서 들어갈 필요가 없겠지. 우리가 인질을 구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덮칠 수도 있고.”
“그래, 아마 맹에서도 바라는 게 그런 걸 거고.”
팽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 자체는 인질을 구해오는 것이지만, 그 인질 쟁탈전이 벌어진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실제 임무에서도 인질을 무사히 데려나오면 수많은 고비를 겪게 될 테니 그에 대한 훈련인 셈이기도 할 터.
문제는 지금 이곳에 조원이 세 명 뿐이라는 거다.
윤종승은 어제 공진분을 복용하는 바람에 내공을 쓸 수 없어서 대연무장에서 대기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저쪽에서도 송원교가 빠졌다지만, 어쨌든 다른 조들이 규합했다면 십오 대 삼으로 싸워야 할 상황.
단 세 명이 과연 인질을 지켜가면서 놈들의 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그냥 싸움도 힘들 텐데 인질까지 지키려면…….
“역시 무리야. 차라리 우리도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보는 게 어때? 그럼 어느 한 조는 들어가겠지.”
팽수혁의 말에 진소홍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좋겠어. 출입로가 모두 세 군데니까 각자 흩어져서 매복하자. 인질을 구해오는 조가 보이면 신호를 보내기로 하고.”
“좋아, 그럼 나는 동쪽을 맡고 넌…… 음? 야! 남궁천! 어딜 가는 거냐? 우리 말은 안 듣냐?”
하지만 남궁천은 거침없이 산채로 걸어가면서 손을 흔들었다.
“너희들은 그러고 있든지. 나는 기다리는 걸 싫어해서. 먼저 들어간다.”
“저, 저……! 아오! 하여튼 제멋대로라니까!”
팽수혁이 씨근거리는데, 진소홍이 피식 웃었다.
“직진남이네.”
“이게 웃을 일이야?”
“일단 따라가자. 생각이 있지 않을까?”
진소홍이 남궁천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남궁천을 꽤나 신뢰하는 눈치였다.
하긴 이차 시에도 남궁천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듯했지만, 결국 특급영물을 잡지 않았던가?
“쳇!”
팽수혁이 혀를 차고는 뒤를 따랐다.
“남궁천. 기억해라. 네가 대장이라서 따라가는 게 아니다. 나도 기다리는 건 딱 질색이니까 가는 거다. 그럼에도 아까 그런 의견을 낸 이유는 혹시나 조원들이 다칠까 봐 염려한 거다. 알겠냐? 나 정도 되면 기관장치 따위는 하나도 무섭지 않거든.”
“그래? 마침 잘됐네. 난 기관장치가 영 까다로워서. 네가 앞장서라.”
“사, 사양한다! 나는 너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까!”
“명령이 아니라 부탁인데?”
“부탁처럼 하는 명령 같은데?”
“할 수 없군.”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끔 보면 생각보다 똑똑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은 건가?
아무튼.
네 사람은 신중하게 산채 후문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후원 마당을 조심스럽게 가로지르는데, 마침 진소홍이 발을 디딘 곳이 한 뼘 정도 쑥 꺼졌다.
철컥!
“엇! 피햇!”
진소홍이 소리쳤지만 그건 잘못된 지시였다.
철컹, 철컹, 철컹……!
지붕과 벽, 바닥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리더니 일제히 화살이 날아들었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곳이 없는 상황.
“어림없지!”
콰앙!
팽수혁이 진각을 밟으면서 대도를 사납게 휘둘렀다.
따다다다다앙!
사방에서 날아들던 화살들이 마구 튕겨 나갔다.
진소홍 역시 현란한 동작으로 유성추를 휘두르면서 화살들을 막아냈다.
하지만 애초에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내기에 유성추는 적절한 무기가 아니었다.
피츗! 피츗!
두 자루의 화살이 그녀의 어깨와 허벅지를 스치듯 지나갔다.
“큿!”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중심을 잡기 위해 발을 뻗었는데 그곳이 또 기관장치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쿠구구궁……!
갑자기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더니 먼지가 풀썩 일어나면서 푹푹 꺼지는 게 아닌가?
“달려!”
남궁천이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고는 소리치자, 팽수혁과 진소홍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확실히 빠르다.’
팽수혁은 어기신풍을 펼치면서도 빨라진 속도를 다시 한번 체감했다.
일전에 남궁천의 조언을 받아들인 후로 한 단계 상승한 걸 체감했지만, 최근 열흘간 수련을 통해서 또 빨라진 것이다.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변화였다.
운기의 흐름을 살짝 비트는 것만으로 이만한 효과를 낼 수 있을 줄이야.
다만 이 경우에는 칼을 휘둘러도 예전 같은 무게감이 실리진 않을 터. 한마디로 달릴 때와 싸울 때의 공력 흐름을 달리해야 한다.
지금은 달릴 때.
파바바밧, 촤악!
팽수혁이 대청으로 미끄러지듯 멈춰 서자, 벌써 도착한 남궁천과 진소홍이 보였다.
남궁천은 금혈서의 내단을 복용한 이후로 짜증 날 만큼 빨랐고, 진소홍은 유성추로 대청 한쪽 기둥을 찍어 줄을 당겨 건너온 참이었다.
쿠구구구구우웅!
바닥이 완전히 무너지듯 주저앉자, 디뎌도 꺼지지 않는 바닥이 군데군데 보였다.
삼 장 정도 아래에는 목봉 같은 것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는데, 그대로 떨어졌다면 목숨엔 지장이 없겠지만 크게 다칠 수는 있었다.
팽수혁이 바닥을 내려 보다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네. 어쩐지 우리만 쳐들어온 것 같지 않냐?”
진소홍도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 어딘가로 지금 들어오고 있다면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쯤은 들릴 만도 한데.”
“제길, 죽 쒀서 개 주는 건 아니겠지? 막말로 이제 후문으로 들어오는 녀석들은 우리가 닦아놓은 길을 편하게 지나올 것 아니냐?”
“굳이 들어올 필요도 없겠지. 아까 말대로 밖에서 기다렸다가 습격을 노려도 될 테니까.”
진소홍의 말에도 남궁천은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놈들이 무슨 작당을 하든 신경 쓸 것 없어. 우린 정해진 길을 가면 돼.”
나는 직진남이니까.
한 번 정한 길은 결코 의심하지 않지.
더구나 다른 이들의 모략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이건 도망자로서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추격자가 무슨 생각을 할까? 왜 갑자기 조용해졌을까? 언제 어디서 습격을 해올까? 등등.
이따위 걱정을 해대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게 도망자 신세라는 거다.
뭐가 됐든 도망자는 움직여야 한다. 그러다가 천라지망에 걸려들면 뚫어야 한다.
실제로 몇 번 뚫은 적도 있고.
하지만 적의 속셈에 머리통을 굴리는 순간, 놈들이 짜놓은 판에 놀아나는 셈이 되는 거다.
“그놈들에게 끌려가지 말고 내가 끌고 가면 된다.”
“그러니까 그걸 무슨 수로?”
“내가 살아 나가지 못할 바엔 다 같이 죽자는 수로.”
“그게 뭐야?”
“독기가 오기보다 강한 법이지. 광기는 독기보다 강하고.”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팽수혁이 투덜거리자,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어젠가 너도 이해할 거다.”
“재수없는 새끼.”
팽수혁이 으르렁거렸지만 남궁천은 대꾸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후로도 기관장치가 작동하면서 불덩이가 날아들거나, 세침이 무수히 발사되는 등 온갖 장애물이 나타났다.
하지만 남궁천 일행은 큰 부상 없이 복도를 가로질러 마침내 인질이 갇힌 방 앞에 다다랐다.
제법 너른 방이었는데, 산채에서 연공실로 사용되는 곳처럼 보였다.
당연히 문은 밖에서만 열고 닫을 수 있는 구조.
아직까지 굳건하게 닫혀 있는 걸 보니 먼저 도착한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들어가자.”
남궁천의 말에 팽수혁과 진소홍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금 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는 순간,
쒜에에엑!
강궁 한 자루가 정확히 남궁천을 향해 날아왔다.
“위험!”
팽수혁과 진소홍이 동시에 소리쳤고, 남궁천은 재빨리 뒤로 물러나면서 검을 내질렀다.
따아앙!
검첨과 화살촉이 정확하게 맞부딪치면서 고막을 찢을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렸다.
쏴아아악, 쿠콰앙!
화살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양쪽 벽으로 날아가 작렬했다.
어찌나 강맹한 힘을 품고 있었는지 벽 일부가 허물어져 내렸다.
팽수혁이 버럭 소리쳤다.
“이런 미친! 진짜 사람 죽이려고 작정한 것 아냐?”
그도 그럴 것이 후원 마당에서 쏘아진 화살이라든가, 바닥에 꽂힌 봉대, 세침 등은 부상을 입힐지언정 목숨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 지금 날아든 강궁은 자칫하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수준이 아닌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든다.
‘나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
팽수혁이 검을 앞세운 남궁천을 가만히 보았다.
기가 막히도록 빠른 반응 속도와 묵직한 중검. 그것이 남궁천을 살린 것이다.
한데 자신이라면?
“쳇! 조심해라, 남궁천!”
“난 항상 조심한다.”
“더 조심하라고! 뒈질 뻔했잖아!”
“하긴. 나여서 살았지.”
“닥쳐! 나였어도 살았다!”
“그런데 방금 내 걱정한 거냐? 귀엽네.”
“미, 미친놈아! 누가 걱정을 해? 네놈이 죽으면 실격 처리당할까 봐 그러는 거지!”
팽수혁이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치는데, 마침 진소홍이 연공실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인질이야.”
네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더 이상의 기관장치는 없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인질 역할은 이차 시에서 탈락한 생도 중 한 명이 맡고 있었다. 그 생도 역시 조금 전에 남궁천을 향해 발사된 강궁을 보고 놀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끔뻑이기만 했다.
“자, 데리고 나가자.”
“아니, 기다려.”
팽수혁이 움찔거리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뭔 소리야? 뭘 기다려? 기다리는 건 질색이라며?”
“상황에 따라 다르지. 패를 우리가 쥐고 있을 땐 기다려야지. 서두를 필요 없잖아?”
남궁천이 싸늘하게 웃으며 연공실 문 쪽으로 돌아섰다.
“너희 둘은 인질 데리고 준비해.”
“쳇, 나한테 명령하지 말라고. 그래서 뭘 준비하면 되는데?”
* * *
“확실히 이쪽으로 들어갔군.”
독고진이 후문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와 함께 온 진주언가의 언호량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마 지금쯤 인질을 먼저 차지했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겠소.”
“단순한 것들. 밖에서 우리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덮치면 놀라자빠지겠군.”
광동진가의 진태곤이 이죽거리자, 독고진이 주의를 주었다.
“그래도 방심하진 말게. 결코 만만한 자는 아니니까.”
“명심하겠소. 독고 형.”
진태곤의 대답을 들으며 독고진은 어제 손을 잠깐이나마 손을 섞었던 남궁천을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모용강이 경계할 만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한꺼번에 덮친다면…….
독고진이 후문 출입구에 모인 정협관 생도들을 훑어보았다.
열네 명에 백리향까지 더하면 열다섯.
반면 저쪽은 겨우 세 명이다. 게다가 인질을 지켜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있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그리 어려운 싸움이 되진 않을 거다.’
독고진이 검파를 꽉 말아 쥐는데, 언호량이 목을 우드득 꺾으며 말했다.
“놈들이 나오는 즉시 우리가 덮칠 테니, 백 소저는 인질을 탈취해서 맹으로 가시오.”
그렇게 되면 독고진과 언호량이 속한 조는 살아남게 되리라.
“네, 알겠어요.”
백리향이 대꾸했다.
그런데…….
“…….”
“…….”
…….
….
.
“아니, 이것들 들어간 지가 언젠데 왜 이렇게 안 나와?”
언호량이 버럭 소리쳤다.
독고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인질을 구하지 못한 건가?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