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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검제-50화 (50/508)

50. 탈출은 지능 순

‘앞으로 평생……?’

윤종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천천히 송원교를 돌아보았다.

송원교가 사악한 미소를 그린다.

“물론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그 반대가 될 거라고 약속하지. 평생 호구냐, 아니냐의 선택이랄까?”

‘이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개새끼!’

하지만 그 생각만큼은 입 밖으로 꺼낼 자신이 없다.

지금도 자신의 어깨를 두르고 있는 송원교의 팔이 독사처럼 느껴져 소름이 끼친다.

마침 백리향이 소곤거리듯 말을 보탰다.

“설마 학관 생활이 끝나면 호구 짓도 끝날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앞으로 무림맹에서 일하게 되면 우리 인연이 계속 이어질 텐데.”

“……!”

“뭐, 그게 아니어도 무인으로서 살아가겠다면 세가나 명문정파와 교류는 필수일 테고.”

백리향의 태연한 협박에 윤종승의 표정은 흙이라도 씹은 것처럼 굳어졌다.

앞으로 평생 호구 짓을 해야 한다.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지금도 지옥인데, 그 지옥을 평생 벗어날 수가 없다니.

어찌 이리도 악독하단 말인가.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간 윤종승은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이를 꽉 다물고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게 용기라고 했던가.

남궁천 말이 맞다.

지금 이 순간 그 지옥 같은 일이 평생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니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니, 평생으로 끝이긴 할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혹시 남궁천처럼 모두의 멸시를 받으며 자라게 되진 않을까.

짧은 순간 너무나 먼 미래까지 떠올린 윤종승이었지만, 그만큼 공포감이 짙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하고 싶어진다. 삶보다 죽음이 더 쉽게만 느껴진다.

자신을 보고 이죽거리는 송원교와 백리향 그리고 독고진과 또 다른 생도의 얼굴이 몸서리쳐지도록 악랄하게만 보인다.

‘토할 것 같아.’

독사 같은 새끼들.

그때 백리향이 더없이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물론 이번 협조로 너는 더 이상 호구가 아니게 되겠지만.”

윤종승이 슬쩍 고개를 들자, 송원교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한 번의 협조로 평생 호구에서 해방인 거지.”

윤종승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주먹을 꼭 말아 쥐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송원교와 백리향이 정협관 생도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독고진이 피식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일단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윤 형.”

윤종승이 술잔을 들어 독고진이 따르는 술을 받아 마셨다.

독고진이 씨익 웃었다.

“윤 형이 할 일은 별것 없소. 지금처럼만 하면 되오.”

“지금처럼이라니?”

윤종승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자 독고진이 히죽 웃더니 다시 술병을 들었다.

윤종승이 얼떨결에 잔을 받아드는데, 독고진이 술을 따르는 것과 동시에 엄지만 한 약병을 은밀하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윤종승이 모른 척하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자, 독고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내가 따라준 술에는 그것과 같은 약물이 들어 있었소.”

“내가 마신 술에!”

“그렇소.”

“그게 뭐요?”

윤종승이 발끈해서 따졌다. 기껏 한배에 타겠다고 했더니 자신에게 약물을 먹여.

하나 독고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너무 걱정 마시오. 해독제가 필요한 독약 같은 건 아니니까. 난 그렇게 치졸하진 않거든.”

윤종승은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하다하다 이젠 이따위 음모까지 꾸미면서 치졸하지 않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먹은 게 뭐냐고 물었잖소.”

“공진분(功鎭粉)이오.”

“공진분……?”

공진분이라면 내공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가루약이라는 건데…… 일단 독약이 아닌 것은 다행이다. 대부분의 공진분은 시간이 지나면 약효도 사라지니까.

독고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걸 직접 보여주고 싶었소.”

“그러니까 공진분을 술에 타서 남궁천에게 먹이란 말이오?”

“바로 아셨소. 오늘 밤 남궁천에게 공진분을 먹이시오. 뭐, 지금 당장 저 자리로 가서 슬쩍 타 먹이셔도 되고. 수단과 방법은 윤 형에게 맡기지.”

“약효는?”

“내일 아침까지는 잠복기, 이후에는 만 하루 동안 약효가 유지될 거요.”

만 하루면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하나 당장 내일 있을 삼차시에서 공력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되리라. 이미 복용해 버린 자신도 마찬가지고.

“직접 마셨으니 알겠지만, 잠복기에는 어떠한 증상도 없어서 공진분을 복용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기 힘들지. 어떻소? 할 수 있겠소?”

윤종승이 선뜻 대답을 못하자 송원교가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뭘 망설여?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저 호구 새끼 뒤통수치는 게.”

“……!”

“뭐든 처음이 어렵고 두 번은 쉬운 법이지. 잘 해보라고.”

송원교가 등을 툭툭 두드린다.

윤종승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독고진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분해지면서 윤종승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래, 뭐든 처음이 어렵지.”

윤종승의 말에 앞에 앉아 있던 송원교가 활짝 웃었다.

“잘 생각했다. 호구 탈출을 축하……!”

하지만 송원교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창졸지간 윤종승이 손을 불쑥 뻗어 송원교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확 꺾은 탓이다.

“……!”

“누굴 보고 호구래?”

뒤이어 윤종승이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손에 쥔 약병을 송원교의 입에 콱 처넣더니 그대로 머리를 탁자에 찍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콰차앙.

송원교의 이마가 깨지고 피가 터졌다. 동시에 입에 물고 있던 약병이 깨지면서 이가 부러지고 피와 침이 섞여서 흘러나왔다.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누구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아니, 무엇보다 호구로만 여겼던 윤종승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게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커, 컥……! 이…… 새기익……! 미…… 미혀써……?”

입안이 걸레가 된 송원교는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못한 채 목을 쥐며 켁켁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리향이 벌떡 일어났다.

“미쳤어? 너 뭐야?”

파밧.

백리향이 순식간에 일수를 뻗어왔다.

하지만 윤종승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느려……!’

지난 열흘간 팽수혁과 함께 남궁천을 상대로 대련했던 게 효과가 있는 것일까.

예전에는 독사처럼 날렵하고 무섭게 느껴지던 백리향의 손길이 한 없이 느리게만 보인다.

윤종승이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자 백리향의 손이 옷깃을 스치고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팟.

찰나 윤종승이 재빨리 백리향의 손목을 낚아채고는 금나술을 펼쳐 꺾어버렸다.

우드득.

“아악!”

백리향이 기이하게 꺾인 손목을 쥐고는 비명을 터뜨리자, 주변의 생도들이 모두 시선을 모았다.

“뭐야? 싸움난 거야?”

“무슨 일이지?”

시선이 집중되자 독고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는 짐짓 준엄한 척 꾸짖었다.

“윤 형! 이 무슨 무례요! 술 한 잔 나누자는데 이런 실례를 저지르다니!”

“실례는 네가 먼저 날 호구라고 불렀을 때 이미 저지른 거고.”

윤종승이 차갑게 말을 뱉고 나서 속으로 생각했다.

‘왠지 남궁천 말투를 따라가는 것 같네.’

어쨌거나 그 한마디는 독고진을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독고진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무슨 모함을! 갑자기 찾아와서 그동안 당한 걸 앙갚음하겠다며 다짜고짜 공격하지 않았소?”

“허!”

윤종승은 기가 찼다.

하지만 송원교의 말대로 처음이 어려운 법. 한 번 호구에서 벗어나기로 몸부림치고 나니 이런 모략질이 가볍게 느껴진다.

“공진분을 주면서 남궁천에게 먹이라고 한 건 기억에서 지워 버리셨나?”

이쯤 되자 주변에 모인 생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은 무한의 삼대 학관 생도들이 고루 모인 장소였다.

둘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하지만,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는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른다.

독고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호구라 불리는 당신들을 견제하겠소? 말이 되는 핑계를 대시오.”

“그럼 제발 우린 신경 쓰지 말고 너희들끼리 놀아라. 그리고 한 번만 더 그 주둥이로 호구니 뭐니 나불대면 더는 안 참아.”

“……!”

독고진이 두 눈에 힘을 잔뜩 실었다.

‘뭐야? 이 새끼. 진짜 호구 맞아?’

송원교와 백리향을 단숨에 제압한 것도 그렇고, 지금의 눈빛은 흡사 맹수 같지 않은가.

윤종승이 혀를 차고는 몸을 휙 돌려 걸어갈 때였다. 누군가 윤종승의 어깨를 턱 잡았다.

윤종승이 멈칫거리고 돌아보니 송원교가 그대로 일장을 뻗어오는 게 아닌가.

“이 호우 새이가아!”

하지만 이번에도 송원교의 손은 너무 느렸다.

윤종승이 자연스럽게 오른발을 뒤로 빼면서 일장을 맞부딪쳐 갔다.

‘손가락에 힘을 실어 분명한 연꽃을!’

꽈아앙!!

두 사람의 손바닥이 충돌하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우드드득.

“으아아악!”

뼈마디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송원교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쿠당탕!

그대로 튕겨 나간 송원교가 탁자까지 부수며 쓰러졌다.

이쯤 되자 독고진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앙!

“이 무슨 짓인가!”

“저놈이 먼저 뒤통수를 치려고 했어.”

“아무리 그래도 시합 전에 부상을 입히다니! 애초에 폭력을 먼저 행사한 건 네놈이 아니더냐!”

이쯤 되자 주변 생도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특히 정협관 생도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하나둘 일어나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정협관 생도들이 투기를 드러내며 윤종승에게 일렀다.

“이유 불문 폭력을 먼저 행사했다면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우리 정협관을 무시하는 건가?”

순식간에 정협관 생도들이 둘러싸자 거침없이 나가던 윤종승도 은근히 두려운 마음이 일어났다.

‘너무 많은데…….’

“어서 사과해라!”

독고진이 버럭 소리쳤다.

윤종승이 어금니를 꾹 씹고 있자, 동기들을 등에 업은 그가 검을 치켜 올렸다.

“끝내 사과하지 않겠다면 행포를 부린 대가는 치러야겠지!”

그때였다.

쒸에에엑, 콰직.

빛살처럼 날아든 한 자루의 검.

윤종승과 독고진 사이에 박힌 벽라검이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도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남궁천 일행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남궁천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을 뱉었다.

“사과를 하려면 그쪽이 먼저 해야지.”

“무, 무슨 소리냐?”

“가만히 있는 호구를 건드렸으니까.”

“뭐?”

“아무리 호구라도 자꾸 호구, 호구 해대면 듣는 호구 기분 나쁘거든.”

성큼성큼 걸어온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들자, 그 자체만으로도 위협을 느꼈는지 생도들이 우르르 멀어졌다.

남궁천 일행이 윤종승 곁으로 서자 자연스럽게 정협관 생도들과 용천관 생도가 대립한 모양새가 됐다.

독고진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씹어뱉듯 말했다.

“아까 말했듯이 내가 먼저 호구라는 말을 입에 올린 적이 없다.”

정말이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던져대는 거짓말에 윤종승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남궁천은 화를 내는 대신 피식 웃었다.

“결국 누구 말이 사실인지 알 길이 없네. 하면 무인답게 한바탕 드잡이 질을 해서 잘잘못을 가리던가?”

이제 현장의 분위기는 당장 피바람이 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벌해졌다.

남궁천이 생도들을 훑어보다가 한쪽에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백리향에게 시선을 멈췄다.

남궁천이 싸늘한 웃음을 그렸다.

“탈출은 지능 순이라더니……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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