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탈출은 지능 순
남궁검은 내심 냉소를 지었다.
황산에서 임무를.
같잖은 소리.
청랑단이나 되는 조직이 임무를 맡아서 움직였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
황산 인근이라면 더더욱.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지만 아직은 주변 소식에 어둡지 않다.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남궁세가가 아닌가.
비록 무림맹의 외면을 받는 입장이지만 암암리에 협조적인 세인들이 여전히 많다.
백번 양보해서 진짜 임무를 받았다고 한들 청랑단주가 굳이 본 가를 찾아와 남궁천을 보고할 이유가 뭔가.
게다가 겸사겸사 들러서 정보를 전한다는 건 역시 남궁천의 신상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는 뜻.
결국 청랑단주가 이곳에 온 것은 노리는 바가 있다는 의미다.
여기까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한때 무림맹 바닥부터 수뇌 자리까지 훑어 올라갔던 남궁검이었다.
정치와 모략질에 적극적으로 나선 적은 없지만 그치들의 권모술수는 눈과 귀가 닳을 정도로 보고 들었다.
어디 누굴 속여 보려고.
남궁검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젊은 단주의 당돌함이 가상하게 느껴지긴 했으나 동시에 불쾌감이 들 정도로 가소롭다.
아마 처음 후원에 제멋대로 들어온 무례함도 감정을 격하게 만들어 차분한 대응을 방해하겠다는 셈이었을 터.
그래서 더 신경 쓰지 않은 것이지만.
그나저나 금혈서라.
잡은 것도 놀라운데 복용을 했다니. 게다가 멀쩡하기까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남궁검의 표정은 모용신 이상으로 흔들림이 없었다.
때문에 모용신은 내심 난감했다.
‘그야말로 얼음덩어리로군.’
남궁검의 성품은 익히 전해 들은 바가 있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사람이지 않은가.
초반에 심리를 흔들어 놓는다면 빈틈이 어느 정도 생길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허락도 없이 후원으로 들어서는 무례를 범했다. 평정심을 최대한 흔들어서 실수를 유도하려고.
한데 이건 뭐 목석이 아닌가.
근래에 자신을 이렇게 난감하게 만든 상대가 또 있었던가.
동시에 김이 빠지기도 했다.
답이 너무 쉽게 나왔기에.
모용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셨군요. 오래전 추영단원으로 활약하셨다는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남궁검은 대답 대신 할 말만 이어갔다.
“영물을 죽이고서도 이차시를 통과하긴 한 모양이군.”
모용신이 머금은 미소에 씁쓸함이 더해졌다.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하나.
금혈서를 죽이긴 했으나, 그걸 들고 온 건 자신의 동생이지 않던가.
결국 이런 복잡한 사정을 접어두고 요점만 정리했다.
“전례가 없긴 하나 규칙을 어긴 건 아니기에.”
“향후 수정되겠군.”
“그리될 겁니다.”
모용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야기의 전개가 자연스럽게 일반적인 규정 문제로 넘어갔다.
하긴. 남궁검이 직접 복용법까지 알려주었다고 하니 더 이상 뭘 어찌해볼 것도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모용신은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한번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대살성의 자식이라 외면하시는 줄 알았으나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군요.”
“자네가 보기엔 그 아이도 대살성인가?”
“그건…….”
남궁검의 눈빛이 칼날 같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순식간에 말 한마디로 공수가 뒤바뀌었다.
남궁검은 모용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감히 어딜 떠보겠다고.
‘노부의 심중을 엿보려면 십 년은 더 구르고 와야 할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어서도 쉽진 않겠지만.
남궁검이 다시 차분하지만, 얼음장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아이도 대살성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남궁검이 무심히 대꾸하는 사이 복성이 차를 내어왔다.
남궁검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무심하게 권했다.
“드시게.”
“감사합니다.”
“황산에는 무슨 임무였나?”
“죄송합니다, 기밀 사항이라.”
“기밀이라. 그렇군.”
남궁검이 피식 웃자,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러시는지요?”
“뭐가 말인가?”
“웃으시기에.”
“별것 아닐세. 그저 자네 대답이 재미있어서.”
“어찌……?”
“기밀이라면서 임무 때문에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나?”
“……!”
“…….”
“내용만 기밀일 뿐이지요.”
남궁검이 말없이 차만 마시자 모용신은 내심 짜증이 일어났다.
남궁검의 속을 까보려고 왔더니, 자신의 속을 훤히 다 내보이게 생겼다.
확실히 만만한 자가 아니다. 아니, 굉장히 대하기 까다롭고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자다.
그렇다고 해도 뭐라도 캐야 할 터.
“한데 어쩌다 금혈서 복용법까지 알려주게 되셨는지요?”
“글쎄,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네.”
“그러고 보니 남궁천도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부분적으로 기억하는 내용도 있을 테지.”
모용신이 입매를 슬쩍 비틀었다.
남궁검의 표정을 가만히 살폈지만 어떠한 변화도 없다.
대신 남궁검은 예의 그 서늘한 시선을 던지며 무심히 말했다.
“그 아이에게 관심이 많군.”
“아무래도 전례가 없는 일을 과감하게 저지른 데다 일차시에서 일 위로 통과한 건 놀라운 일이죠. 하물며 그간 학관에서 호구로 지냈다고 하니 이변에 관심이 갈 수밖에요.”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를 던졌지만 남궁검은 냉랭하게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강호에 이변이라는 말만큼 부질없는 것도 없지.”
“하면 어르신께서는 놀랍지 않으십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자네가 죽는다 해도 놀라지 않을 걸세.”
“……!”
“죽었던 아이가 되살아난 마당에 무엇에 놀라겠나?”
그런…… 뜻이었나.
모용신은 하필 자신의 죽음을 예로 든 게 못내 불쾌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면 자신의 패배나 마찬가지다. 남궁검이 그랬듯 무던하게 넘겨야 한다.
“듣고 보니 그렇군요.”
“갈 길이 멀겠군.”
완곡하게 표현한 축객령.
모용신도 더 이상은 캐낼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잘 마시고 갑니다.”
“멀리 나가지 않네.”
“그럼 강녕하시길.”
모용신이 예를 차린 다음 수하를 이끌고 후원을 벗어났다.
배웅을 하고 돌아온 남궁화가 그제야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속에 예리한 칼날이 수십 자루 오고 갔다는 것을.
그 묘한 긴장감에 쉬이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남궁화가 여전히 얼음장 같은 남궁검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버지……?”
“그들이 그 아이를 주시하는구나.”
“역시 좋지 않은 쪽인가요?”
“좋은 쪽이면 여기까지 찾아올 이유도 없을 터.”
“도대체 천이가 어떻게 금혈서를 잡은 걸까요? 게다가 복용하고도 멀쩡하다니…….”
남궁화는 질문을 던지고 곧 후회했다.
아버지라고 알겠는가.
남궁검은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괜찮을 거다.”
“맹이 좋지 않은 쪽으로 주시한다면서요.”
“그렇겠지. 하나 모든 판을 그 아이 스스로 만들었다.”
“무슨 뜻이에요? 천이가 일부러 무림맹이 자신을 주시하게끔 만들었다고요?”
“그렇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말을 하던 남궁화는 뒤늦게 멈칫했다.
아…… 그런 건가.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건 남궁천이다.
일차시 일 위와 금혈서 사냥은 그저 이뤄지는 결과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이런 결과라면 무림맹이 주목할 것은 당연한 일.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남궁천은 스스로 튀어나온 돌이 됐다. 마치 힘껏 때려보라는 듯.
남궁검이 의미 모를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녀석이 세상과의 싸움을 시작했구나.’
* * *
삼차시가 시작되기 하루 전날.
남궁천은 조원들과 함께 무림맹 인근 객점으로 들어갔다.
마지막 휴식인 만큼 가볍게 술 한잔하면서 여유를 즐기자는 조원들의 강요에 떠밀린 셈이었다.
한데 객점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 보니 송원교와 백리향이 다른 생도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윤종승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리고는 중얼거렸다.
“저 녀석들이 왜 여길…….”
그러자 진소홍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몰랐어? 쟤들도 나름 준수한 성적으로 이차시까지 합격했어.”
“아…….”
그제야 윤종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강민이 부상으로 무연회에 불참하는 바람에, 자연히 송원교와 백리향도 불참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일차시는 워낙 얼떨결에 운이 좋아서 합격한 터라 그들의 존재를 몰랐고, 이차시에서는 금혈서를 죽인 일 때문에 바짝 긴장해서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을 호구 취급하던 두 사람이었으니 달가운 마음이 들 리 없었다.
애써 무시하고는 창가의 자리를 잡아 음식을 주문한 후였다.
마침 송원교와 백리향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뭐라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앉은 이들은 정협관 생도들이었는데, 아마도 같은 조원인 듯했다.
윤종승은 괜히 신경 쓰여서 힐끔거리며 보다가 마침 송원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종승! 이리 와봐!”
송원교가 손짓을 하며 불렀다.
순간 윤종승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저것들이 또 뭘 하려고…….’
안색이 굳은 윤종승이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마음으로 남궁천과 팽수혁을 보았다.
하지만 남궁천과 팽수혁은 남의 일이라는 듯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하긴, 이들이 언제 자신의 호구 짓을 말린 적이나 있던가.
송원교가 이 두 사람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을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일 터.
주먹을 꾹 말아쥔 윤종승이 마지못해 일어나서는 송원교에게 다가갔다.
“불…… 렀소?”
“그래, 이 새끼야. 왜 이렇게 굼떠?”
따악.
송원교가 습관처럼 윤종승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윤종승이 이를 악물고는 송원교를 노려보았다.
‘이 씨발……!’
발끈하는 마음에 주먹까지 꽉 말아 쥐었지만, 이내 송원교가 부라리는 눈을 보고는 스르르 꼬리를 말았다.
학습된 공포.
송원교의 사나운 눈빛만 봐도 독사 앞에서 굳어버린 쥐새끼처럼 전신이 뻣뻣해진다.
윤종승이 살짝 주눅 든 목소리로 물었다.
“왜…… 불렀소?”
“여기 독고 형께서 너한테 물어볼 게 있으시다고 한다.”
눈길을 돌려 보니 의자에 삐딱하게 걸터앉은 생도가 히죽 웃으며 일어났다.
“반갑소. 독고진이오.”
“윤종승이오.”
윤종승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독고진이라면 역시 강호 십대세가에 속하는 독고세가의 자제일 터.
눈이 족제비처럼 찢어진 독고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정말이오?”
“뭐가 말이오?”
“용천관 공식 호구라던데.”
말을 뱉은 독고진이 면전에서 대놓고 낄낄거렸고, 송원교와 백리향도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윤종승이 주먹을 꽉 말아 쥐는데, 독고진이 다가와 어깨를 토닥였다.
“아아, 너무 기분 나쁘게는 듣지 마시고.”
“물어볼 말이 그거요?”
“설마. 그럼 내가 굉장히 결례를 저지르는 거고.”
“그럼 뭐요?”
“정확히는 저치에 대한 건데.”
독고진이 턱짓으로 남궁천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원래 공식 호구는 저기 앉은 남궁천이라던데. 어떻소? 이번 기회에 다시 호구 자리 넘겨줄 생각 없소?”
“그게 무슨 소리요?”
윤종승이 눈살을 찌푸리자 송원교가 또다시 뒤통수를 세차게 후려쳤다.
따악!
“새끼가 말귀를 왜 이렇게 못 알아 처먹어?”
그러더니 돌연 윤종승에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귓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네놈이 협조만 한다면 약속하마. 앞으로 평생 널 호구로 대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