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무림맹도 물렁하구나
“시합 종료!”
당예설의 선언에 무림맹 동문의 수문장들이 일제히 문을 닫아걸었다.
간발의 차이로 늦은 생도들이 온 힘을 다해 달렸지만 결국 막힌 문을 뚫을 수는 없었다.
쾅쾅쾅!
“열어주세요! 영물을 잡아왔습니다!”
“문 좀 열어달라고! 기껏 잡아왔단 말이야!”
몇몇 생도들은 아예 욕지거리까지 쏟아내며 떼를 썼지만 육중한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예설은 대연무장에 모인 생도들을 훑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대부분의 생도들이 무맹관과 정협관 출신이었다.
‘시간 내에 도착한 조는 모두 스물인가? 제법 많이 남았군.’
확실히 올해는 인재가 출중한 편이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눈길을 잡아끄는 한 명.
‘저 멍청한 녀석은 왜 저런 몰골이야?’
동생 당우기가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딱히 연관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눈길이 자연스럽게 남궁천에게 향했다.
그녀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남궁천. 이번에도 붙었어?’
아슬아슬했지만 해가 뜨기 전까지 돌아온 모양이다.
동생 당우기가 속한 조보다 일찍 돌아왔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난 그녀였기에 간밤에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모른다.
당예설이 소리쳤다.
“그럼 지금부터 영물 검사를 하겠다.”
말을 마친 그녀가 제일 먼저 도착한 조 원들에게 다가갔다.
무맹관 생도들로 이루어진 조였는데 화산파 제자인 유현과 주연화가 속해 있었다.
그들이 잡아온 건 하급 영물인 흑각설토(黑角雪兎).
“통과.”
“감사합니다.”
유현을 비롯한 조원들이 일제히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당예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조로 걸음을 옮겼다.
‘유현 정도면 충분히 상급 영물에 도전할 만도 했을 텐데. 실리를 챙긴 모양이네.’
다음 조가 잡아온 것 역시 하급 영물이었다.
아무래도 빨리 도착한 생도들일수록 하급 영물일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꼼꼼히 검사하면서 이동하던 당예설은 마침내 열아홉 번째로 도착한 남궁천 앞에 섰다.
‘호오, 흑묘설아를?’
흑묘설아는 일류 고수들이 달려들어도 잡기가 쉽지 않은 상급 영물이다.
과연 남궁천에게 뭔가가 있는 걸까.
그게 아니면 함께 한 팽수혁이나 진소홍에게.
‘그도 아니면…….’
마지막으로 윤종승에게 눈길을 던진 당예설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재미있는 조다.
“통과!”
당예설이 선언하자 팽수혁과 윤종승이 저도 모르게 손을 짝 맞부딪쳤다.
“좋았……!”
동시에 쾌재를 부르던 두 사람이 서로를 보다가 곧 어색한 표정이 되어서는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도착한 조.
당예설의 동생이 속한 조이자 정협관의 최정예 생도들.
한데 그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제일 튼튼해 보였던 황보승은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당우기는 연신 씨근거리며 폭발이라도 할 것 같다.
당예설이 애써 무시하며 냉랭하게 물었다.
“영물은?”
악굉이 쭈뼛거리며 나서서는 축 늘어진 뭔가를 내밀었다.
“이건……?”
모용강이 감정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싸늘하게 대꾸했다.
“금혈서입니다.”
“뭐?”
당예설은 잠깐 헷갈렸다.
금혈서가 뭐더라.
그만큼 금혈서는 그녀의 안중에 없는 영물이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특급 영물 중 금혈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게 기억났다.
하나 금혈서라는 말을 여기서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당예설이 미간을 곱게 찡그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뭐라고?”
“금혈서입니다.”
모용강이 처음과 똑같은 어조로 대꾸했다.
워낙 당당하니 섣불리 의심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게 금혈서라니…….’
뱃가죽이 갈려서 축 늘어진 쥐새끼는 어디로 보나 평범해 보인다.
그녀로서는 이게 정말 금혈서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
“부단주.”
그녀의 부름에 적랑단 부단주가 날렵하게 곁으로 내려섰다.
“예, 단주.”
“가서 추영단주에게 협조 요청해.”
“존명!”
대답을 마친 부단주가 제비처럼 몸을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당예설이 축 늘어진 금혈서의 사체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금혈서라고 해도 어째서 죽여서 데려온 거지?”
“문제가 됩니까?”
모용강이 무뚝뚝하게 되묻자 당예설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어.”
“전례가 없었더라도 규칙을 어긴 건 아닐 텐데요.”
“뭐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잡아올 것. 여기서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거나, 죽여서는 실격이라는 말씀은 없었습니다만.”
모용강이 따박따박 말대꾸하자 당예설은 침음만 흘렸다. 모용강의 말이 틀린 점은 없기에.
다만 무림맹이 준비해 둔 영물을 겁대가리 없이 저렇게 죽여서 데려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더구나 그것도 특급 영물을.
아니지, 정말 저게 금혈서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지.
사실 죽어버린 금혈서는 일반 쥐와 구분하기도 어려워 전문가의 확실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때 잠자코 기다리던 당우기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에이씨, 뭐가 이렇게 까다로워? 애초에 죽이니 살리니 하는 말 따위는 없었잖아! 이제 와서 말을 바꾸겠다는 거야, 뭐야?”
“시끄럽다. 죽인 건 그렇다 쳐도 이게 진짜 금혈서인지 아닌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눈깔이 삔 게 아니면 똑똑히 보라고! 세상에 저렇게 큰 쥐새끼 본 적 있어? 저건 분명히 금혈서란……!”
쒜에엑, 따악!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암기가 눈 깜빡할 사이에 당우기의 이마를 때렸다.
다행히 암기의 옆면에 맞은 것이기에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공력이 담겨 있어 당우기는 그 자리에서 대자로 뻗으며 기절했다.
모용강이 내심 긴장하며 당예설을 보았다.
‘암기를 일부러 옆면으로 날리다니.’
암기를 넓은 면으로 던져서 상대를 기절시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당예설의 공력과 기술이 심후하다는 뜻이리라.
당예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과 사도 구분하지 못하는 멍청한 놈 같으니. 못난 녀석 데리고 다니느라 네가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모용강이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때 옆에서 남궁천이 짐짓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영물을 저렇게 잔인하게 죽여서 데려 오다니.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
그 순간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던 모용강도 어금니를 꽉 씹으며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남궁천이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솔직히 좀 그렇지 않나? 죽여서 데려와도 되는 거면 너무 쉬운 것 같잖아? 생포해서 데려온 사람들을 뭐 전부 바보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혼잣말인데 분명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남궁천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오히려 같은 조 원들이 입을 딱 벌릴 지경이었다.
윤종승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궁천…… 넌 정말 무서운 놈이다. 처세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구나! 만약 우리가 저 금혈서 사체를 내밀었다면…… 넌 분명 다른 소리를 했겠지?’
윤종승이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비아냥을 이어갔다.
“하여튼 요즘 것들은 말꼬리 잡는데 고수라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했다고 죽여서 가죽만 들고 오다니. 쯧쯧. 이래서 애새끼들 보는 앞에선 말도 함부로 못 해요.”
‘그러는 너도 애새끼잖아!’
모두가 같은 생각을 떠올렸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는 자는 없었다.
대신 황보승이 참다못해 불쑥 나섰다.
“어차피 최종결정은 단주님이 내리실 문제다! 네가 이러쿵저러쿵 할 말은 아니다!”
“나참, 혼잣말도 못 하나? 아이고, 무섭네. 무서워.”
“시끄럽다! 이게 다 네놈이……!”
황보승이 말을 하다 말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차마 조원들끼리 싸우다가 패배해서 영물이 바뀌었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다.
다른 조 원들도 지켜보는 상황에서 용천관 호구들에게 정협관 정예가 당했다는 말을 어찌 하겠나.
속만 바글바글 끓이고 있는데, 당예설은 뭐가 웃긴지 풋 웃음을 터뜨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점점 재미있네, 남궁천.’
* * *
시커먼 그림자들이 추영단주 곁으로 속속 내려섰다.
“단주, 찾지 못했습니다!”
“여기도 없습니다!”
“없습니다, 단주!”
수하들의 연이은 보고에 추영단주의 표정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어금니를 빠득 갈다가 한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짜악! 짜악.
“큭!”
“윽!”
검은 피풍의를 두른 추영단원 두 사람이 뺨을 얻어맞고는 휘청거렸다.
그 두 사람은 금혈서 감시 임무를 맡았던 단원들이었다.
“이 멍청한 새끼들! 금혈서 하나 감시하지 못해서 이 사달을 벌여?”
“죄송합니다, 단주!”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네놈들이 받는 봉급을 몇 년 치 삭감해도 금혈서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것 알아, 몰라!”
“죄송합니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추영단주가 몸을 홱 돌렸다.
수하들에게 윽박을 질렀지만 그로서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다.
도대체 금혈서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추영단원들이 일제히 목란산에 흩어져 공력을 주입한 노루 뿔을 태우고 다녔다.
거기에 잠든 금혈서를 일각 정도 깨울 수 있는 특수 제작한 피리도 불었다.
한데 나타나지 않았다.
흔적도 없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추영단원들이 단주 곁으로 날아들었다.
파라라라!
피풍의를 펄럭이며 나타난 추영단원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일제히 보고했다.
“금혈서의 혈흔을 발견했습니다!”
“마지막 혈흔이 동굴에서 끊어졌습니다!”
“뭐?”
추영단주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섰다.
“어디냐? 앞장서!”
“존명!”
추영단원이 몸을 돌리고 달려가려는데, 마침 붉은 무복을 갖춰 입은 자가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추영단주!”
“자네는…… 적랑단 부단주가 여긴 어인 일인가?”
“잠깐 협조 요청을 부탁드립니다.”
“협조 요청이라니? 급한 용무가 아니면 나중에 얘기하세. 지금 우린 금혈서를…….”
“그 금혈서에 관한 얘깁니다.”
“금혈서에 관해서……?”
추영단주가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자, 적랑단 부단주가 일단의 사정을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추영단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 * *
“금혈서가…… 틀림없소.”
추영단주가 뱃가죽이 갈린 금혈서 사체를 보며 참담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살다 살다 뱃가죽이 갈린 금혈서 사체를 보게 될 줄이야.
당예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정말 금혈서란 말이죠?”
“그렇소. 틀림없소.”
추영단주의 확신에 주변 생도들이 술렁이면서 동요했다.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특급 영물을 잡은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그 영물을 아예 죽여 버렸다.
뱃가죽이 갈린 걸 보면…….
‘설마 누가 내단을 처먹은 건가? 아니, 그걸 처먹고도 멀쩡하다고?’
추영단주가 머리털을 쥐며 혼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가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누구냐? 대체 누가 이렇게 간 큰 짓을 저질렀느냐?”
추영단주가 윽박을 지르자, 당예설이 만류했다.
“그건 차차 알게 될 테죠. 우선은 그보다 합격 여부인데…….”
당예설과 추영단주가 머리를 맞대고 상의를 시작했다.
생도들도 연신 웅성거린다.
특급영물을 잡은 조라니. 그 자체로 화두가 될 만한 사안이다.
마침내 당예설이 생도들을 향해 돌아섰다.
“합격 여부를 발표하겠다. 영물을 죽여서 잡아온 건 전례가 없는 일이긴 하나 규칙을 어긴 것은 아니다. 고로 합격을 선언한다!”
어느 정도 짐작을 했던 것인지 생도들이 웅성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사람만 빼고.
“이야, 이렇게 느슨한 규칙이라니! 무림맹도 물렁하구나!”
남궁천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하지만 어디까지나 혼잣말을 떠들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