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쫄리면 말고
당우기의 표정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어, 어떻게 그걸……?’
남궁천의 표정이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 같다.
도대체 어떻게 눈치챈 걸까.
방금 던진 게 독이 들어 있는 특수 제작 암기라는 것을.
‘도대체 이 새끼는 정체가 뭐야? 정말 용천관 공식 호구 맞아?’
이쯤 되니 용천관 전체가 자신들을 속인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호구가 둘이나 포함되어 있는 조가 왜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진소홍을 상대할 때도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유성추를 이리저리 잡아 돌릴 때만 해도 겉멋이 가득 든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감히 본 가를 비무 상대로 찍다니?’
한데 막상 손을 섞어 보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정과 비도가 눈앞을 정신없이 오가는 동안 섣불리 암기를 뿌릴 생각조차 못할 정도였으니까.
이 정도로 유성추를 잘 다루니 당가와 붙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일견 이해가 됐다.
유성추가 암기류는 아니지만, 무기를 던진다는 개념에서는 비슷한 부분이 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정신없이 싸웠을까.
유성추가 아슬아슬하게 어깨를 베며 지나가기도 했고, 자신이 던진 비수가 진소홍의 옷깃을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유명한 자와 무명인 자가 싸우면 유명한 자의 마음이 다급해지게 마련이다.
그만큼 명성이란 실전에서 양날의 칼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길어지자 그 명성이라는 칼날이 당우기를 향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하나도 안 맞는……!’
짜증이 마구 일어났다.
벌써 암기를 몇 개나 날렸는지 알 수가 없다.
한데 진소홍은 얄밉게도 춤을 추듯 유연하게 움직이면서 수많은 암기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과 비도를 잇는 저 은잠사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분명 빈틈으로 암기를 날렸는데 어김없이 은잠사에 걸려 튕겨 나가거나 방향이 틀어졌다.
심지어 은잠사에 튕긴 암기가 자신의 요혈을 노리기도 했다.
‘거리를 좁혀야겠어!’
암기류의 명가인 당가가 거리를 좁히겠다니.
그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할 일이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따앙!
당우기는 정을 튕겨내는 것과 동시에 진소홍의 품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찰나 진소홍이 재빨리 비도를 날리면서 정을 회수했다.
즉, 앞에서는 비도가 날아들고, 뒤에서는 정이 노리는 상황.
‘어딜!’
파바밧.
바닥을 찬 당우기가 몸을 횡으로 눕히면서 수레바퀴처럼 회전했다.
츄핏! 핏.
정과 비도가 교차하면서 당우기의 아랫배와 어깨를 살짝 스쳤다.
미세한 상처가 남았지만 이 정도는 감수하고 있던 바.
탓, 빠악.
바닥에 내려선 그가 진소홍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악!”
진소홍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상처를 입었던 다리였다.
한데 그대로 주저앉을 줄 알았던 진소홍이 재빨리 은잠사를 끌어당기면서 비도로 배후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헛!”
깜짝 놀란 당우기가 얼른 몸을 돌렸지만 비도가 그의 왼쪽 팔을 깊게 베며 지나갔다.
츄파앗.
“크아악!”
선혈이 흩뿌려지면서 당우기의 눈이 뒤집혔다.
“이 개 같은……!”
당우기가 야차처럼 일그러진 표정으로 진소홍을 노려보았다.
하나 진소홍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착 가라앉은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도대체 이것들은 뭔가.
정협관에서도 자신이 비수를 들면 모두가 벌벌 떨면서 고개를 숙이건만.
한낱 용천관 생도 주제에 뭐가 이리 잘났단 말이냐.
‘이놈이고 저놈이고 본 가를 개똥으로 보지 않고서야!’
뱃속부터 끌어 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당우기가 품에서 암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너희들처럼 겁 모르고 날 뛰는 새끼들은 본 가의 진짜 무서움을 느껴봐야 해!’
표정이 팍 일그러진 당우기가 순간 진소홍을 향해 암기를 흩뿌렸다.
티티티티티잉!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저 지긋지긋한 은잠사가 암기를 마구 튕겨냈다.
‘하나 진짜는 이쪽이지!’
당우기가 몸을 휙 돌리더니 팽수혁을 향해 조금 전에 꺼낸 그 암기를 날렸다.
쒸이이잇.
유난히 흑광으로 반짝이는 암기가 팽수혁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당우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본 가의 무서움을 뼈에 새겨라!’
한데 또 변수가 일어났다.
“물러나라! 팽수혁!”
느닷없이 남궁천이 나타나 암기를 쳐내더니 흩뿌려지는 독을 말끔히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닌가.
파라라라라!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자신을 노려보면서 맹수처럼 으르렁대고 있다.
대체 어떻게 알고.
그 의문에 대답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남궁천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사천당가의 병기 중에는 흑표(黑鏢)라는 게 있지. 흑표는 독을 넣어둔 암기야. 일부러 잘 부서지는 재질로 만든 이 암기는 조금 더 크고 반짝이지. 누구든 보면 무기를 휘둘러 막아내기 좋게 생겼어. 하지만 그걸 쳐내는 순간 진짜 공격이 드러나. 바로 맹독.”
“……!”
“하나의 흑표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정성과 시간, 돈이 있기에 마비 독처럼 값싼 독을 넣진 않아. 열이면 열,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 독을 넣지. 그걸 지금 저 개새끼가 시험 도중에 던진 거고.”
남궁천의 스산한 말투에 당우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남궁천은 그런 당우기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놀랐을 거다.’
너무 자세히 알고 있어서.
하나 나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안다. 빌어먹게도 내가 저 독에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때 해독제를 찾아서 강호 곳곳을 얼마나 싸돌아다녔는지 모른다.
덕분에 천독노를 만나는 계기가 됐지만.
당우기가 흠칫거리고는 말했다.
“그, 그게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시험이 끝나면 해독제를 줄 생각이었다.”
“아, 그러신가? 그나마 양심이 있다니 다행이군. 나도 이 시험이 끝나면 약 정도는 지어드릴게.”
“뭣?”
파앗.
순간 남궁천이 바닥을 차더니 질풍처럼 쇄도했다.
누군가 끼어 들 틈이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
파바밧.
당우기가 황급히 물러났지만 남궁천의 경공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잖아도 빠른 남궁천이었는데, 금혈서의 내단을 복용한 후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콱.
“컥!”
순식간에 당우기의 품으로 파고들어 멱살을 잡은 남궁천.
“네 입으로 말했잖아. 우린 하늘이 돕는 자라고.”
“커컥……! 이, 이건…… 반칙……! 왜 네놈이…… 끼어 들어서……!”
빠악.
순간 남궁천이 검집채로 휘둘러 당우기의 얼굴을 가격했다.
쿠당탕탕!
그대로 튕겨 나간 당우기가 바닥을 한참이나 굴렀다.
남궁천이 그런 당우기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반칙……? 애초에 멋대로 두 명이 나선 건 너희들이야. 이번엔 내 마음대로 끼어든 거고. 네가 하면 정당하고 내가 하면 부당하냐?”
“그렇다고 갑자기 이렇게 끼어든…….”
“시끄럽다.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한 세상에서 공평한 걸 찾으려고 하다니. 아직 유아기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쉬이익, 빠악!
남궁천이 그대로 검집을 들어 올리더니 사정없이 후려쳤다.
당우기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어찌나 아픈지 제대로 일어서서 반격조차 못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남궁천이 뿜어내는 투기가 숨이 막히도록 사나웠다.
실제로 남궁천은 화가 났다.
다른 누군가가 공평한 세상을 운운하는 꼴을 봐줄 수가 없었기에.
자신이야말로 불공평함의 제물이 아니었던가.
그 어떤 잘못도 없이 단지 가진 재주가 위험하다 하여 낙인찍히고 평생을 죽음에 맞서 고독하게 싸워야만 했다.
그런 게 세상이다.
그게 강호다.
그런데 뭐? 불공평해.
진정한 불공평을 너희들이 제대로 느낀 적이나 있더냐.
하찮은 쓰레기들.
쉬이이잇, 따앙!
순간 검집이 검날에 막히면서 멈췄다.
검신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손바닥을 따라 팔뚝까지 쭈욱 올라온다.
남궁천이 눈을 부릅뜨고 돌아보자, 모용강이 검을 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쯤 하지.”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궁천이 피떡이 된 채 널브러져 있는 당우기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내가 좀 과했나?”
“곧 해가 뜬다.”
모용강의 말에 남궁천이 동녘을 슬쩍 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조금 있으면 해가 떠오를 것만 같다.
남궁천이 모용강을 흘깃 쳐다보았다.
“그래서? 너도 나서서 마지막까지 한 번 해보려고?”
“……!”
순간 모용강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남궁천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살기에 맞서기 위해서다.
‘뭐지……? 이 감각은……?’
단순한 살기가 아니다.
남궁천의 살기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삭막함이 있다.
모든 살기가 삭막할 수밖에 없겠지만, 남궁천은 또 다르다.
순식간에 지금 이곳을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바꿔 버린 듯하달까.
주변으로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그만큼 살벌하고 삭막하며 오싹한 살기가 전신의 피부로 파고든다.
어지간한 범인이었다면 두 다리로 서는 것조차 힘들었으리라.
겨우 약관도 지나지 않은 생도가 어찌 이런 살기를 드러낸단 말인가.
반면 남궁천은 남궁천대로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이 녀석도 보통은 넘는군.’
그래도 아주 멋모르고 날뛰는 천방지축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쯤이면 오금이 저릴 텐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다.
눈길을 피하지도 않는다.
속이 바글바글 끓었을 텐데도 감정 역시 드러내지 않는다.
이쯤 되니 기특하다 못해 가엾다는 생각마저 든다.
저 어린 나이에 이만한 담력과 냉담함을 기르려면 얼마나 엄하고 고된 훈련을 했을까.
물론, 남궁천이 그런 사정을 감안해서 상대를 부드럽게 대할 위인은 아니다.
“싸울 거 아니면 꺼져, 씹새끼야.”
모처럼 옛날 성질이 그대로 올라와서 거칠게 한마디 해줬다.
거기에 가래침까지 추가.
“카아악, 퉤!”
이건 일종의 마침표 같은 역할을 한다.
전생에도 추격자들을 난도질한 다음에는 항상 가래침을 뱉어줬으니까.
그러고 나면 겨우 숨만 남은 것들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줄행랑을 치곤했지.
그렇다.
나의 가래침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상대에게 ‘목숨만은 살려 드릴게’ 라는 아량의 표현인 것이다.
이 얼마나 관대한 가래침인가.
어쨌거나 모용강도 남궁천의 의미를 알아들은 것인지 한 걸음 물러났다.
남궁천은 바닥에 쓰러진 당우기를 힐끔 보고는 저만치 넋 놓고 서 있는 동료들에게 턱짓을 했다.
“가자.”
“어? 아, 어…….”
“종승이는 그 고양이 챙기고.”
“아, 알았어.”
윤종승이 적묘설아를 얼른 챙겨 오는데, 팽수혁이 그 뒤를 따르며 구시렁거렸다.
“나한테 명령하지 말라고. 남궁천.”
“그럼 여기 남아서 일출이나 감상하던가?”
“이익……!”
“자자, 서둘러 시간 없어.”
“명령하지 말라니까!”
“그럼 여기서 일출이나…….”
“시끄럽다!”
남궁천 일행이 옥신각신하며 동문으로 들어갔다.
악굉이 모용강 옆으로 다가왔다.
“모용 형, 죄송합니다.”
“됐고. 저거 챙기고 애들 깨워. 곧 해가 뜬다.”
“하지만 저 쥐새끼는…….”
모용강이 악굉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싸늘하게 말했다.
“금혈서다. 한낱 쥐새끼가 아니란 말이다.”
“예? 정말 그럼……?”
“특급 영물이다.”
“아…… 그런데 죽은 것도 괜찮을까요?”
“일단 가져간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란 말도 있었으니.”
“알겠습니다.”
그제야 악굉이 안도의 표정으로 돌아와 금혈서의 사체를 챙겼다.
반면 모용강은 여전히 찬바람이 쌩쌩 부는 표정으로 남궁천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남궁천……!’
우우우웅.
그가 쥔 검이 나직이 울음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