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1화 (41/508)

41. 금혈서(金血鼠)

동굴 안으로 달려온 윤종승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 정말로 먹었어……?”

저만치 배가 갈린 금혈서가 축 늘어져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 앞엔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남궁천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윤종승이 달려갔다.

“남궁천!”

한데 그가 남궁천의 어깨를 잡기 직전 팽수혁이 소매를 확 낚아챘다.

“미쳤어?”

“왜 그래? 저 녀석이 진짜 금혈서를 잡아먹었잖아?”

“지금 운기하는 거 안 보여? 이 새끼 지금 내단 처먹었다. 지금 건드리면 좆 되는 거야. 당장 두드려 패고 싶지만 일단 지켜보자.”

“아…….”

윤종승이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하고는 주춤 물러났다.

확실히 남궁천의 전신에서 후끈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팽수혁이 당장 남궁천을 어쩌지 못하고 동굴 입구에서 서성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들어 두드려 패고 싶은 기색이 역력하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황당함과 분노도 어느 정도 식어버릴 때쯤, 마침내 남궁천의 전신에서 퍼져 오르던 기운이 체내로 흡수되듯 갈무리됐다.

스으으으읏.

이윽고 남궁천이 두 눈을 뜨자 정광이 어렸다.

“끄으어억!”

길게 트림까지 뽑아내는 남궁천.

“자알 먹었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다.

멈칫거리고 지켜본 팽수혁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린다.

“어, 왔어?”

대수롭지 않게 인사를 건네는 남궁천.

결국 꼭지가 돌아 버린 팽수혁이 한달음에 달려가 남궁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야이 새끼야! 영물을 잡아 죽이면 어떡해!”

“내가 잡은 거잖아? 네가 잡았냐?”

“그, 그건 아니지만…… 너는 조 원 따위는 생각도 안 하냐?”

“알겠지만 내단을 쪼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야. 게다가 금혈서는 내단을 가공하는 순간 효력이 떨어져서…….”

“그 말이 아니잖아!”

“그럼? 말을 정확하게 해야 알아듣지. 얘, 왜 이러냐?”

오히려 남궁천이 어이없다는 듯 윤종승을 돌아보았다.

윤종승이 멍한 표정만 짓고 있자, 진소홍이 나섰다.

“지금 우린 영물을 한 마리도 못 잡은 상태야. 그래서 그러는 거야.”

“한 마리 잡았잖아.”

남궁천이 죽어 나자빠진 금혈서를 가리켰다.

팽수혁이 으르렁거렸다.

“그래, 한 마리 잡았지. 그것도 특급 영물을. 근데 네놈이 처먹었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가죽은 남았는데.”

“뭐?”

“너희들도 들었을 텐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잡아오라는 말.”

“그렇다고 죽여도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아!”

“말은 바로 해야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잡아오라고 했지.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진 않았지.”

“그건…….”

말문이 막힌 팽수혁이 인상만 잔뜩 찌푸렸다.

진소홍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직 비관할 상황은 아니야. 남궁천의 말도 일리가 있어.”

“흥! 만약 영물을 잡아 간 걸로 인정받지 못하면 다 네놈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영물을 잡고 다시 놔준 누구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그 책임은 어쩌고?”

“크익! 그건 네놈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팽수혁이 버럭 소리치다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몸을 홱 돌려 버렸다.

그가 동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윤종승이 허탈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안전하게 옮길 방법을 고민하겠다더니…….”

“그래서 더 없이 안전하게 만들었지.”

“하아…… 확실히 안전하긴 하겠네.”

윤종승이 몸을 축 늘어뜨린 금혈서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내단을 잃은 금혈서는 이제 붉은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눈동자도 평범한 검은색으로 변했다.

더 이상은 영물 같지도 않은 모습.

남궁천이 윤종승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 챙겨라. 귀한 녀석이니까.”

귀하긴 개뿔. 좋은 건 저 혼자 다 처먹었으면서.

구시렁거리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가죽만 남았지만 그래도 영물을 잡았다는 유일한 증거니까. 게다가 아직도 맞은 배가 욱신거리고 있었으니까.

동굴 밖으로 나온 남궁천이 단전을 한 차례 문질렀다.

확실히 든든하네.

그리고 빠르다.

기의 흐름이 이전보다 확연히 빠르다.

대주천까지 마쳐서 금혈서의 기운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다시 내공을 일주천 했을 때 분명히 느꼈다.

공력의 흐름이 훨씬 빨라졌다는 것을.

이는 금혈서의 내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부분이다.

전생에 자신이 금혈서를 그토록 찾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청석유, 만년설삼, 만년하수오 등. 이런 귀한 영약들은 상당량의 내공을 선물하지만 운기 속도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하나 금혈서는 다르다.

한 번 자기 것으로 완전히 만들면 공력의 흐름이 빨라진다.

내공의 성질이 바뀐 거다.

그만큼 몸은 가벼워지고 모든 무공이 빨라진다.

경공을 펼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효과가 좋다.

그러니 도망자에게는 금혈서의 내단보다 귀한 보약이 없다.

어디 그뿐인가.

운기가 빨라지니 심법을 수련할 때 내공 증진에도 큰 도움이 된다.

가령 열흘을 수련해야 쌓이는 내공이라면, 이제 아흐레 만에 쌓을 수 있는 셈이 된 거다.

남궁천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좋군, 좋아.’

쾌와 중을 고루 중시하는 남궁세가의 검법을 익히기에도 더없이 좋은 신체가 만들어 진 셈.

‘애초에 쾌와 중을 고루 중시하다니. 너무 무리한 것 아니냐고.’

금혈서라도 잡아먹지 않는 이상에야 어찌 그게 가능할까.

중에 중점을 두면 쾌가 아쉬워지고, 쾌에 중점을 두면 중이 아쉬워지는 것이 자연의 이치건만.

한데 남궁세가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한다.

뭐, 그래서 제왕의 검형이라고 자부하는 것이겠지.

분명 남궁세가의 검법을 창안한 선조 놈은 금혈서를 잡아먹었거나 지나친 이상주의자였으리라.

어쨌거나 무림맹 덕분에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동이 트기 전에 돌아가려면 지금 출발해야 한다.

* * *

목란산에서 무림맹으로 올 때 가장 빠른 길을 이용한다면 북문으로 통해야 할 것이다.

하나 무림맹은 북문이 없기 때문에 동문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지금 동문 입구에는 네 명의 생도들이 길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검신을 달빛에 비춰보는 자는 모용강, 바위에 걸터앉아 비수를 만지작거리는 자는 당우기, 연신 창을 휘두르며 화려한 동작을 취하는 자는 악굉, 그리고 바닥에 배를 드러내고 누워서 코를 고는 건 황보승이었다.

당우기가 비수 두 자루를 스릉 스릉 비벼대며 중얼거렸다.

“설마 이것들, 영물을 못 잡아서 못 오는 건 아니겠지?”

“그럼 할 일이 줄어드니 나쁠 것도 없지 않소?”

악굉이 연신 창을 현란하게 휘두르며 대답했다.

호흡이 가빠질 만도 하건만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기껏 기다리고 있는 게 아깝게 됐잖아. 게다가 이번에야말로 이 새끼들 확실하게 응징해야지.”

당우기가 코를 골며 자는 황보승의 부러진 팔을 보았다.

남궁천에게 팔이 부러진 후 어지간히 응급처치를 한 것 같지만 아직 통증은 남아 있을 터.

황보승이 잠을 자면서도 당우기의 말을 다 들은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흠냐아. 괜찮아, 괜찮아. 내가 워낙 무골이라 이런 건 금방 나아. 다 방심해서 그래. 흠냐…….”

마침 모용강이 검신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한 식경만 더 기다려보고 안 오면 들어간다.”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당우기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손목에 묶어두었던 줄을 잡아당겼다.

하아악!

바위 뒤쪽에서 잔뜩 성난 짐승 소리가 들린다.

적갈색 털에 유독 하얀 송곳니가 도드라진 고양이, 적묘설아(赤猫雪牙)다.

무림맹이 풀어놓은 상급 영물.

‘하악’ 소리를 내면서도 겁에 잔뜩 질려 있는지 털을 곤두세우고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우기가 줄을 잡아당기자 뻣뻣하게 버티던 적묘설아가 질질 끌려왔다.

“뭐, 그 오합지졸이 잡아와봐야 흔해빠진 하급 영물이겠지.”

“뭐가 됐든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모용강의 말에 당우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들이 시간 내에 복귀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부숴 버리자고.”

“방심하지 말고.”

모용강의 싸늘한 언질에 당우기가 끙 소리를 내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일각 정도가 흘렀을 때, 아직까지 화려한 창무를 추던 악굉이 멈칫거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가 어둠 속을 빤히 응시하더니 바닥에 창을 거꾸로 꽂고는 그 위로 훌쩍 올라섰다.

용하게도 중심을 잡는 모습이 묘기를 보는 듯했다.

“저기 오는군.”

“호오? 영물을 잡은 모양이지?”

당우기가 얼른 몸을 일으키자, 악굉이 눈살을 슬쩍 구기며 답했다.

“뭔가를 들긴 했소. 미동이 없는 것 같지만.”

“뭐 기절시켜서 들고 오는 걸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게 뭐든 우리와 관계없는 일. 쓰러뜨리면 그만 아니겠소?”

악굉이 씨익 웃으며 바닥으로 내려섰다.

잠시 후 악굉의 말대로 남궁천 일행이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가 뜨려면 대략 한 식경이 더 남은 상황.

당우기가 길목을 막아서며 이죽거렸다.

“용케도 영물을 잡은 모양이군. 그런데 그건…… 응? 쥐? 뭐야? 죽었어?”

모용강도 눈살을 찌푸리고는 축 늘어진 금혈서를 보았다.

지금껏 자다가 일어난 황보승이 눈을 비비며 말했다.

“저거 영물 맞긴 맞아? 평범해 보이는데?”

“이 새끼들, 이거 그냥 쥐새끼 잡아와서 영물이라고 우기는 것 아냐?”

“그러게 말이오. 저렇게 생긴 영물은 금시초문이군.”

창을 현란하게 휘두르며 악굉도 나섰다.

그러자 진소홍이 한 걸음 나서며 따졌다.

“그게 당신들과 무슨 상관이죠? 길이나 비켜요.”

“어허, 소저가 입이 거칠구려. 엄연히 시험 도중인데 우리가 고분고분 비킬 이유는 없을 것 같소만?”

당우기가 비아냥거리자 이번엔 남궁천이 나섰다.

“그래서 한번 붙자는 건가?”

“확실히 용천관 공식 호구는 눈치가 빠르구나. 그게 바로 눈칫밥이라는 거야?”

당우기의 말에 황보승이 낄낄거린다.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눈칫밥 하면 또 이 몸이지. 그런데 그렇게 불러도 되겠어?”

“안 될 이유는?”

“아무래도 용천관 공식 호구한테 줘 터졌다고 소문나면 더 쪽팔릴 텐데. 하긴 뭐 이미 줘 터졌지만.”

“너 이 새끼…… 우리가 방심한 걸 가지고…….”

당우기가 이를 빠득 갈고 나서는데, 남궁천이 손을 척 들어 올렸다.

“됐고. 너희들은 뭐 좀 잡았어?”

“당연하지. 네놈들처럼 죽어 나자빠진 쥐새끼가 아니라 진짜 살아 있는 영물이다. 그것도 상급으로.”

당우기 입매를 비틀어 올리고는 줄을 잡아당기자, 바위 뒤에서 적묘설아가 잔뜩 성을 내며 끌려 나왔다.

하아악!

그 모습을 본 남궁천이 감탄한 표정을 짓더니 축 늘어진 금혈서를 불쑥 내밀었다.

“오오, 우리랑 바꾸자!”

“뭐…… 인마……?”

“이래 봬도 이게 특급이거든. 더 좋은 거야. 바꾸자.”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누굴 호구 새끼로 아나?”

당우기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이 낭랑하게 말한다.

“호구한테 처맞았으니까 호구 새끼도 맞는 것 아닌가?”

“이……!”

순간 황보승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운 좋게 한 방 먹였다고 기고만장하는 꼴이라니! 와라! 묵사발을 내주마!”

“난 병신은 상대하지 않아. 종승.”

“어, 어?”

윤종승이 얼떨결에 대답하며 다가왔다.

남궁천이 턱짓으로 황보승을 가리켰다.

“네가 상대해.”

“내, 내가……?”

윤종승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무림칠대세가의 황보승을 나보고 상대하라고.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만큼 아픔을 되새겼으면 이제 길이 보일 때도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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