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금혈서(金血鼠)
“종승.”
“넵! 아, 어?”
남궁천의 부름에 윤종승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남궁천이 턱짓으로 진소홍을 가리켰다.
“다리를 다쳤으니까 지혈하는 것 좀 도와.”
“아, 알았어. 너는……?”
“나는 저기 동굴에 들어가서 이 녀석을 안전하게 옮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혹여나 다른 사람이 접근 못하도록 감시해.”
“그, 그래. 그런데 그거 정말 금혈서야?”
남궁천이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휘적휘적 걸어갔다.
마침 진소홍이 얕은 바위에 걸터앉는 걸 보고 얼른 달려갔다.
“맙소사…… 부상이 꽤 심한데?”
“금혈서 발톱에 찍혔어.”
진소홍이 미간을 살짝 구기며 말했다.
윤종승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정말 그게 금혈서야?”
“맞아. 금혈서.”
“도대체 어떻게 잡은 거야?”
“어떻게라…….”
진소홍이 중얼거리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시간을 앞서서 달렸다고 하면 되나.
그럼 믿기는 할까.
대답을 해줘봐야 질문이 꼬리에 꼬리만 물을 게 뻔하다.
그래서 대충 대답했다.
“그냥…… 정신없어서 나도 잘 몰라. 남궁천이 잡은 거니까.”
“도대체 그 녀석…… 못하는 게 뭐지? 나도 죽다 살아나면 그렇게 되려나?”
윤종승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 종아리에 물을 부었다.
피와 함께 이물질이 씻겨 나가니 뽀얀 종아리 피부가 달빛에 훤히 드러났다.
‘아…….’
품에서 금창약을 뒤적이던 윤종승이 내심 움찔거렸다.
미끈하게 뻗은 종아리를 보니 괜히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진소홍은 평범한 얼굴에 비해 굉장히 여성스러운 몸매인 듯했다.
“왜 그렇게 빤히 봐?”
“응? 아! 미, 미안.”
“……?”
윤종승이 허둥지둥 금창약을 꺼내 상처 부위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얏!”
“미, 미안! 아팠어?”
“괜찮아.”
“이제 다 끝났어.”
윤종승이 옷자락을 찢어서 종아리에 둘둘 감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진소홍이 슬쩍 물었다.
“뭔가 좀 알아냈어?”
“응? 뭘?”
“강해지는 방법?”
“아…… 아직 잘 모르겠어.”
지혈을 끝낸 윤종승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었다.
왠지 진소홍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새삼 자존심이 상했다.
‘다들 영물을 사냥하겠다고 나서서 이렇게 싸우는데 나 혼자만……!’
입술을 질끈 깨문 윤종승이 나직이 뇌까리듯 말했다.
“……거야.”
“응?”
“반드시 강해질 거야.”
“…….”
“나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 그래서 내 힘으로 호구에서 벗어날 거야.”
“아앗!”
진소홍이 비명을 지르자 윤종승이 황급히 천을 풀었다.
“미,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힘이 들어가서…… 괜, 괜찮아?”
“아으……! 나머지는 이제 내가 할게.”
“응…… 미안.”
윤종승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엉거주춤 서 있자, 진소홍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주제넘게 할 말은 아니지만, 네 동향 친구는 믿어도 될 것 같아.”
“어……?”
진소홍이 동굴 쪽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생각이 난다.
자신 앞을 막아선 채로 빠르게 지시를 내리던 그 모습이.
단지 등을 내보임으로써 누군가에게 완벽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을까.
진소홍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왕 남궁천에게 도박을 걸었다면…… 한번 믿어봐. 적어도 손해 보진 않을 거야.”
“그, 그럴까?”
윤종승이 동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남궁천은 금혈서를 안전하게 옮길 방법을 고민하기 위해 홀로 애쓰고 있지 않은가.
‘가만 보면 은근히 위험한 일에 앞장선다니까. 남궁천 너란 녀석은…….’
윤종승이 피식 웃으며 아랫배를 슬슬 문질렀다.
* * *
잡았다. 금혈서.
남궁천은 축 늘어진 금혈서를 보면서 히죽 입매를 치켜 올렸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영물인가.
게다가 특급 영물이다. 특급 영물.
잡기도 힘들고 길들이기가 어려워서 계륵 같은 녀석이지만, 금혈서가 가진 내단을 생각한다면 그리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남궁천이 벽라검을 들어 올리고는 축 늘어진 금혈서를 보았다.
“으흐흐흐. 고놈 때깔도 곱구나.”
침이 질질 흐를 지경이다.
그렇잖아도 공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던 차였는데 이 녀석의 내단을 취하면…….
으흐흐흐. 좋아라.
일 갑자는 훌쩍 넘어가리라.
내가 왜 굳이 이놈을 잡으려고 발악했겠나.
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지.
어디 보자, 천독노가 뭐라고 했더라.
“금혈서의 내단은 특이한 성질이 있어서 가공을 하면 안 돼. 소실되는 내력이 너무 많거든. 마치 육회를 먹듯이 잡은 그 자리에서 바로 복용해야 하지. 하지만 네놈도 알다시피 녀석의 내공 성질은 몹시 급하다. 한마디로 괜히 처먹다가 폭주해서 뒈지기도 딱 좋다는 거야. 뭐,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의 흐름을 빠삭하게 이해하는 놈이 아닌 이상에야.’
흐음.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의 흐름을 빠삭하게 이해하는 자, 그것이 바로 나다. 이 영감탱아. 하하핫.
전생을 살아오면서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의 흐름을 어디 한두 번 보았을까.
주화입마에 걸려 미쳐가는 놈들의 내력 흐름까지 속속들이 다 들여다본 이 몸이시다.
조금 고생은 할지 모르겠지만 기혈의 흐름에 대해서만큼은 웬만한 의원 싸다귀 후려칠 수준은 된다는 말씀.
자, 그럼 어디 한 번 시식을 해볼까? 우선 이 주둥이부터 빼내고…… 빼내야 하는데…….
“아오! 왜 이렇게 안 빠져! 도대체 얼마나 꽉 처문 거야?”
남궁천이 금혈서 모가지를 잡고는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얼마나 끙끙대며 사투를 벌였을까.
팍.
마침내 금혈서가 화살처럼 튕겨 나가면서 동굴 벽에 부딪쳤다.
퍼억.
캐애앵!
의식이 없는 중에도 금혈서가 비명을 터뜨린 모양이다.
괜히 깨면 골치 아프기 때문에 얼른 달려가서 금혈서 모가지부터 잡았다.
“자, 이제 내단을 내놔라! 내단!”
남궁천이 벽라검에 검기를 입히고는 금혈서의 배를 가르자, 아랫배에 황금빛 구슬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혈서의 내단.
‘드디어! 이 찬란한 모습이란.’
망설임은 내공 증진만 늦출 뿐.
지체 없이 내단을 꺼낸 남궁천이 한입에 꿀꺽 삼켰다.
동시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배 속에서 소화되기 시작한 내단이 용트림을 하듯 기운을 뿜어낸다.
“크읏!”
아랫배가 불에 댄 듯이 뜨겁다.
그나마 견딜 만한 것은 금혈서의 기운이 ‘화(火)’가 아닌 ‘토(土)’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기운은 곧 무겁게 가라앉는다.
‘제기랄. 이러다가 똥 싸겠네!’
아닌 게 아니라 빼 속에서 뿜어진 기운이 너무 무겁게 가라앉으니 괄약근이 다 풀릴 지경이다.
남궁천이 어금니를 꽉 씹었다.
절대 지지 않는다.
항문에 힘을 바짝 주고.
단전으로 몰아넣는다.
항문을 뚫고 쏟아질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던 기운이 이내 단전으로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파파파파팟!
단전에서 난리가 났다.
새로 들어온 황금 기운이 단전을 마구 부숴 버릴 것처럼 날뛰기 시작한다.
야생마가 따로 없다.
오로지 달릴 생각밖에 없는 것들이다.
하나 고삐를 놓치면 끝장이다.
아무렇게나 치고 달려간 내력은 기경팔맥과 십이경맥을 천방지축으로 날뛰게 될 터다.
그럼 언제 적엔가 보았던 광인처럼 물구나무를 서서 삼십 리를 달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잡는다! 반드시! 그리고 내 것으로 만든다! 길들인다!
남궁천은 황금 기운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 원래 있던 공력으로 천뢰제왕신공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파바바밧.
미쳐 날뛰는 내력이 원기에 갇혀서 서서히 독맥을 타고 회음부로 흘러들어가기 시작한다.
항문 근처인 회음부에 이르니 무거운 감각 때문에 배변감이 더 커진다.
한마디로 쌀 것만 같은 충동.
웃기지 마라. 이 정도로 지릴까 보냐.
항문에 힘을 바짝 주자 황금 기운이 생난리를 치면서 마지못해 끌려올라간다.
등줄기 쪽의 독맥을 타고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치고 오른다.
백회혈에 오르자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투타타타타타탕!
야생마 수백 마리가 머릿속에서 미쳐 날뛰는 것 같다.
“끄음……!”
코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남궁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른다.
‘조금만 더!’
마침내 백회혈에서 끌어내린 황금 기운이 임맥에 들어섰다.
독맥을 타고 오를 때보다는 확실히 편하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했다간 광인이 되고 말겠지만.
마침내 배꼽 근처에 다다르자 야생마의 저항이 더욱 심해진다.
파바바바바밧.
단전 부근에서 일어나는 기의 난동이 겉에서도 보일 지경이다.
탄탄한 배가 여기저기 울룩불룩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희미한 연기까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남궁천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좀 들어가!’
온 힘을 다해 황금기를 단전으로 밀어 넣는다.
마침내 미쳐 날뛰던 야생마들이 우리에 갇힌다.
말하자면 드디어 원주민이 이주민을 제압한 것이다.
미쳐 날뛰던 기운도 꽤 잠잠해졌다.
소주천을 통해 소약(小藥)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제압을 했으니 화합할 차례.
소약을 대주천시키면 화합이 이루어져 완전히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
대주천에 들어가니 확실히 수월해졌다.
이따금씩 난동을 부릴 조짐이 보이지만 그때마다 기경팔맥의 특징을 잘 이용해서 제 길로 돌아가게 다독였다.
남은 기운들은 십이경맥으로 넓게 퍼져 여차하면 비상사태를 대비한다.
그동안 초견파공안을 통해 무수히 관찰한 남궁천만의 비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후우.”
이제 동굴 안은 훈기로 가득 찼다.
* * *
“젠장!”
거친 욕설과 함께 팽수혁이 수풀을 헤치며 나타났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걸 보니 꽤나 고생을 한 흔적이다.
윤종승이 팽수혁을 돌아보고는 물었다.
“어떻게 됐어?”
“없어! 빌어먹을! 도통 영물이 보이질 않아!”
“하긴 이 넓은 산에서 고작 서른 마리니까.”
“아오! 짜증 나!”
팽수혁이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고는 수통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윤종승이 내심 혀를 찼다.
그러게 왜 청린은선사를 갖다 버려서는…… 쯧.
하지만 이젠 괜찮다.
남궁천이 그보다 더 대단한 영물을 잡아왔으니.
팽수혁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버럭 소리쳤다.
“남궁천 이 한량은 어디로 간 거야?”
“아, 저기 동굴에.”
“동굴에 처박혀서 뭐 하는데?”
“걱정 마. 남궁천이 금혈서를 잡아왔어.”
“금혈서? 그게 뭔데?”
“특급 영물이래.”
“특급…… 영물?”
팽수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진소홍을 휙 돌아보았다.
진소홍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니 팽수혁이 도끼눈을 뜨고는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그놈이 무슨 재주로 특급 영물을 잡는단 말이냐! 이 나도 청린은선사만 잡았는데!”
사실 그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무척이나 좋았던 게 아닐까 싶지만.
“진짜 잡았어. 지금 안전하게 이동할…….”
“직접 보기 전엔 못 믿어!”
“어어?”
팽수혁이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쫓아가서 말리려던 윤종승이 엄두가 나지 않아 그만두었다.
“뭐, 별일이야 없겠지.”
그런데 팽수혁이 동굴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때.
“으아아아아! 야이, 미친 새끼야! 지금 무슨 짓을 한 거냐?!”
윤종승과 진소홍이 동시에 동굴 쪽을 돌아보자, 팽수혁이 헐레벌떡 뛰어나오더니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저, 저 미친 새끼가 특급 영물을 처먹었어!”
“뭐……?”
윤종승이 들고 있던 금창약을 툭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