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금혈서(金血鼠)
윤종승이 버럭 소리쳤다.
“남궁천! 이제 어쩌려고 그래? 왜 굳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저 단순한 녀석을 자극한 거야? 벌써 자정이……!”
퍼억.
순간 남궁천이 손바닥을 내질러 윤종승의 복부를 쳤다.
“크억!”
일장을 얻어맞은 윤종승이 포탄처럼 튕겨 날아가더니 그대로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콰당!
윤종승이 고꾸라져서 구역질을 해댔다.
남궁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끼, 아까운 거 다 토하네. 하여튼 배부르게 처먹으면서 자란 것들이란. 고기 아까운 줄 모른다니까.”
결국 지켜보던 진소홍도 슬며시 나섰다.
“그래도 일리 있는 지적이잖아?”
“어째서?”
“영물이 알아서 기어 나오진 않을 거 아냐. 뭐라도 생각이 있어?”
“알아서 기어 나오면?”
“응? 그런 영물이 있어?”
진소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한 식경 남았다.”
“뭐가?”
“말했잖아? 영물이 기어 나올 시간.”
“정말 영물이 기어 나온다고?”
“그것도 아주 굉장한 놈이.”
“아주 굉장한 놈이라면…… 설마 금혈서(金血鼠)?”
진소홍을 돌아보는 남궁천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호오, 금혈서를 아는군.”
“당연하지. 두루마리에 적힌 유일한 특급 영물이잖아?”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진소홍의 말대로다. 두루마리에 적혔던 영물 중에서도 유일하게 특급으로 분류되는 영물이 금혈서다.
하지만…… 금혈서를 아는 게 당연하다고.
천만에.
금혈서는 어지간해서는 알기 어려운 영물이다.
일단 매우 희귀종인 데다 잡기가 상당히 어렵다.
경공술이라면 자면서도 하늘을 난다는 곤륜파의 장문인조차 금혈서보단 빠를 수 없다.
게다가 길들이기도 어렵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영물이다.
이놈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피해 다니지만, 운이 나빠서 눈을 마주치면 엄청난 공격성을 드러낸다.
때문에 금혈서와 만나면 일단 두 눈을 마주 보지 말아야 한다.
혹여 녀석의 금빛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면 그 순간 금혈서는 빛살처럼 날아들 것이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배에 구멍이 뚫려 있을 테니까.
왜 배에 구멍이 뚫리냐고.
금혈서가 눈 마주친 무인의 단전을 맛집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해서 금혈서는 배꼽으로 파고들어가 내장과 단전을 갉아먹는다.
남궁천이 바닥에 손질해 둔 노루 뿔을 주워 들었다.
‘옛 생각 나는군.’
전생에 땡전 한 푼 없이 도망치면서 어찌 그 많은 안가를 마련하고 영약이나 영단까지 비치해 두었을까.
그건 바로 노동의 힘이다.
여기서 노동은 곧 영약이나 영물 사냥을 말하는 거다.
인적 없는 오지를 오가다 보면 영약이나 영물을 발견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으니까.
그걸 어둠의 경로로 팔아서 돈도 벌고 영단도 사고 한 거지.
물론 거기에는 구룡철심단을 만든 천독노의 도움이 상당했다.
그 영감탱이가 온갖 영약이나 영물에 대해서는 빠삭했으니까.
금혈서도 그때 알게 된 영물이다.
길들일 수도 없고 공격적인 데다가 더럽게 빠르다는 그 영물.
딱히 이용가치가 없어서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녀석이다.
한데 그걸 무림맹이 가지고 있을 줄이야.
‘전생에도 못 만나본 영물을 이렇게 만나네. 아니, 아직 만난 건 아니지.’
남궁천이 노루 뿔을 진소홍에게 휙 던졌다.
얼떨결에 노루 뿔을 받아 든 진소홍이 물었다.
“어쩌려고?”
“어쩌긴. 금혈서를 잡아야지.”
“무슨 수로? 금혈서는 빛살처럼 빠른 영물인데.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
그게 문제긴 하다.
여느 영물들과 달리 금혈서는 평범한 쥐와 구분이 안 된다.
금빛 눈동자라고는 하지만 그저 노리끼리할 뿐이다.
야밤에는 야생동물의 눈동자가 대게 노리끼리하게 보이니 구분이 쉽지 않다.
오로지 피가 금빛이라는 건데…….
한마디로 죽이기 전까지는 알 방법이 없다는 것.
하지만 내가 누군가.
전생에 산전수전 다 겪으며 온갖 영물과 영약을 죄다 찾아다녀본 대살성 아니신가.
남궁천이 노루 뿔 끄트머리를 모닥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렇게 빠른 영물을 무림맹이 풀어놨어. 그 말은 다시 잡을 방법도 있다는 뜻이지.”
“듣고 보니 그렇네.”
“그 방법으로 잡으면 돼. 금혈서가 잠에서 깨어나 활동하는 시간은 축시초(丑時初). 하루 중 딱 반 시진이야.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냄새가 바로 노루 뿔 타는 냄새지. 거기에 공력을 살짝 주입하면 금상첨화.”
“아……!”
“지금부터 반 시진 동안 산 중턱을 중심으로 돌아다녀. 물을 싫어하는 녀석이니 습하지 않은 곳만 찾아다니면 돼. 말라비틀어진 풀이나 바짝 마른 낙엽이 무성한 곳 위주로. 평범한 쥐는 달아나겠지만 금혈서는 오히려 쫓아올 거야. 놈을 발견하면 절대 눈 마주치지 말고 이곳으로 달려오도록. 조별로 나눠준 신호탄은 가지고 있겠지?”
“응. 그런데 하나 물어봐도 돼?”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소홍이 노루 뿔을 들어보며 물었다.
“굳이 금혈서를 잡아야 하는 이유가 뭐야?”
“없어.”
“뭐?”
“이유 같은 건 없으니까 다른 영물을 잡으러 가고 싶으면 그래도 돼. 대신 난 이놈을 잡을 거야.”
사실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
다만 그 이유를 지금 말할 필요가 없을 뿐.
게다가 금혈서를 잡을 방법도 사실 따로 있다.
어디까지나 나만 가능한 방법이지만.
진소홍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곧 어깨를 으쓱였다.
“이왕 잡을 거라면 금혈서 한 번 잡아보지, 뭐. 적어도 무림맹 간부들에게 눈도장은 확실히 찍겠네.”
“그건 확실하지.”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마침 상황을 지켜보던 윤종승이 넌지시 나서며 물었다.
“나, 나는?”
“어차피 방해만 되니까 배나 문지르고 있어. 혹시 아냐? 아픔을 되새기다 보면 길이 보일지.”
남궁천이 노루 뿔에 공력을 주입하며 미련 없이 돌아섰다.
* * *
흑립을 눌러 쓴 추영단주(追靈團主)는 목란산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그가 곁에 선 부단주에게 물었다.
“얼마나 잡혔나?”
“현재 열한 마리 잡혔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이번엔 꽤 질 좋은 생도들이 많은 모양이야.”
“예, 영물에 대한 이해도 높은 편이고, 무엇보다 개개인의 기량이 출중한 편입니다. 중급 영물도 두 마리나 잡혔다는 보고입니다. 예년보다 많은 합격 조가 나올 것으로 판단됩니다.”
“잘 됐군. 봐가면서 영입 대상 물색도 해봐.”
“예, 단주.”
“혹여 영물들이 목란산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잘 감시하고.”
“물론입니다. 그거야 본 단이 늘 하는 일인 걸요.”
부단주가 씩 웃었다.
추영단.
약천당 소속인 그들은 강호 각지를 돌아다니며 영물을 찾아 수집하는 임무를 지니고 있다.
총 이백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투 조직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물을 상대하는 분야만큼은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
실제로 이들이 몸에 두른 피풍의 안에는 영물을 사로잡을 수많은 도구가 숨겨져 있다.
추영단주가 검지로 흑립을 밀어올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축시초군.”
“금혈서가 깨어날 시간이군요.”
추영단이 풀어둔 영물 중에서 유일한 특급 영물.
그나마 금혈서는 사람과 마주칠 확률이 매우 적기 때문에 특급 영물들 중에서도 안전한 편이다.
“어차피 아무도 잡지 못할 걸 왜 풀어두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색 갖추기지. 무림맹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아닌가? 사마외도들이 보기에 결코 우스워 보여서는 안 될 테니.”
“그도 그렇군요.”
“자네 말대로 금혈서를 잡을 수 있는 생도는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잘 지켜보게.”
“철저히 지시해두었습니다.”
추영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혈서는 결코 잡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생도들은 금혈서의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하리라.
워낙 희귀종인 데다 딱히 길들이기도 어려워 학관에서도 배운 적이 없을 터. 그럼에도 이런 명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
생도들의 안전 때문이다.
혹여나 잠에서 깬 금혈서가 밖에서 돌아다니다 생도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야단날 테니까.
배에 구멍이 뚫린 생도의 시체는 누구도 보고 싶지 않으리라.
때문에 지금도 목란산 곳곳에는 추영단원들이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는 중이다.
그래도 투입된 인원이 많지 않기에 사고가 터지는 걸 완전히 막기엔 역부족이다.
그런 염려를 짐작한 것인지 부단주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기껏해야 반 시진입니다. 금혈서가 알아서 사람 기척을 피해 다닐 테니까요.”
단주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시험 도중에 괜히 노루를 잡아서 그 뿔을 태우고 다니는 미친놈은 없을 테지.
거기에 공력까지 불어넣는 미친놈은 더더욱 없으리라.
하지만 추영단주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미친 연놈들이 둘이나 있다는 것을.
* * *
파바밧.
진소홍은 날듯이 달렸다.
새벽 공기가 싸늘한데도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빠, 빨라!’
처음에는 금혈서가 아닌 줄 알았다.
생각보다 일찍 나타나서 더 그랬다.
한데 엄청난 기운을 가진 뭔가가 빛살 같은 속도로 달려온다는 걸 깨닫고 나서는 확신했다.
이건 금혈서다.
그 직후 곧장 몸을 틀어 윤종승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한데 금혈서는 소름 끼치도록 빨랐다.
슈파파파팟.
풀잎을 가르며 번개처럼 내달린다.
좌! 우! 상! 하! 다시 좌! 우…….
슈파파파파팟!
놀랍게도 금혈서는 진소홍을 관찰이라도 하듯 그렇게 사방을 왔다 갔다 하며 달리고 있었다.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빠를 줄이야.
그러던 어느 순간 묵직한 것이 종아리를 타고 올라온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푹.
금혈서의 발톱이 진소홍의 종아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아악!”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촤르륵.
“헉!”
쿠당탕탕.
균형을 잃은 진소홍이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종아리에 달라붙어 있던 금혈서가 어디론가 떨어져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진소홍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일어났다.
윤종승에게 가려면 좀 더 남았다.
‘침착해야 해! 침착!’
금혈서는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된다.
종아리를 공격당한 건 그저 노루 뿔을 향해 타고 오르려다가 우연히 찍힌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드는 건 미지의 생물이 가공할 만한 기도와 속도를 지녔기 때문이리라.
마른침을 꿀꺽 삼킨 진소홍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샤샤샤샤샷!
“헛!”
샤샤샤샤샷!
“……!”
안 돼! 동요하지 마.
금혈서도 자신을 염탐하는 것일 뿐이다.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돼.
진소홍은 다시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윤종승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삼십여 장 정도 남았다.
‘조금만 더 가면……!’
진소홍이 공력을 끌어 올려 경공을 펼치려고 할 때였다.
“헉!”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꿈쩍도 하지 못했다.
정면 나뭇가지 위에서 빛나는 금빛 눈동자.
작은 생물의 두 눈이 사신처럼 번뜩인다.
눈을…… 마주쳐 버렸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드는 순간.
슈팟.
금혈서가 허공을 달리듯 날아든다.
‘이대로…… 죽는 건가?’
빌어먹을. 노루 뿔 따위 들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었어.
때아닌 후회가 밀려든다.
몸은 굳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역설적으로 모든 현상이 느릿하게 펼쳐진다.
바로 앞에 다다른 금혈서가 앞발을 쭉 내뻗으면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배꼽을 파내려는 순간.
까아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금혈서가 그대로 튕겨 나가는 것이 아닌가.
촤아아앗!
혜성처럼 나타난 그림자가 그녀 앞을 막아서며 버럭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눈 마주치지 말라니까!”
“남궁천……?”
진소홍이 멍하니 입을 여는데, 남궁천이 벽라검을 앞세우며 소리쳤다.
“물러나 있어! 절대 엎드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