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
생도들이 앞다투어 목란산으로 달려가고 남궁천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길 때, 이 모든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무림맹주 묵천악.
그는 높은 전각 지붕 위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생도들을 묵묵히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올해는 괜찮은 떡잎들이 많이 보이는군.”
“다행한 일입니다.”
“글쎄. 그건 어떨지…….”
묵천악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자, 모용신이 예의 그 얼음장같은 표정으로 슬쩍 돌아보았다.
“신경 쓰이시는 거라도?”
묵천악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무한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평화롭지 않은가?”
모용신이 묵천악의 시선을 쫓았다.
무림맹 아래로 펼쳐진 무한의 시가지 전경은 그야말로 평화로웠다. 저잣거리에서 호객하는 상인들, 좌판의 노리개를 보며 호호 웃는 여인들,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다가 넘어지는 철부지들.
묵천악이 말을 이어갔다.
“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네.”
“…….”
모용신은 듣기만 했다.
묵천악은 모용신의 침묵이 마음에 들었다.
만약 모용신이 ‘알고 있다’고 대답하거나 ‘이해한다’는 말 따위를 했더라면 필히 실망했을 것이다.
자신의 노력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기에.
특히나 세가의 힘을 등에 업은 자들이라면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오래전, 전대 맹주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강호의 명문세가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들로 변해 버렸다.
무림맹주라는 자리는 문파나 가문의 세를 강성하게 키우기에 너무나 좋은 먹잇감이었으니까.
치열한 정치 싸움 끝에 그들은 결국 배경이라고는 내세울 게 없는 묵천악을 맹주로 추대했다.
하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지 못했다.
허수아비로 앉혀 놓은 묵천악의 처세술이 뱀처럼 유연하고 강하며 독할 줄이야.
묵천악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무림맹을 장악해갔다.
맹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부정부패를 척결했고, 이따금씩 분란을 일으키는 사마외도를 응징해가면서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갔다.
마침내 그는 명문세가의 입김보다 우위에 선 진정한 맹주로 거듭났다.
이제 명문세가의 어느 누구도 묵천악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는 강호의 정의였고, 백도의 얼굴이었으며, 명실상부한 무림맹주였으니까.
늘 분열을 일삼던 백도의 무인들이 무림맹주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모두의 존경을 받는 무림맹주를 명문세가들이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
“평화란 무릇 내부의 균열에 민감한 법일세. 외부의 위협은 오히려 결속을 다지게도 하지만, 내부의 균열은 만악의 근원이 되지.”
“새겨듣겠습니다.”
“아니야. 듣는 것보단 느끼는 것이 중요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저 아이.”
묵천악의 시선을 쫓은 모용신이 나직이 대꾸했다.
“남궁천 말씀이시군요.”
“대살성의 사생아가 일차시에서 일 위를 했더군.”
“그렇잖아도 주의 깊게 살피는 중입니다.”
“사람들은 이변을 좋아하지. 반전을 좋아하고, 의외성을 좋아해. 뭐든 떠들기 좋은 소재가 마련되면 배척하기보단 기꺼워하는 편일세. 더구나 본 맹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더욱. 왜 그런 줄 아는가?”
“본 맹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네. 그간 본 맹이 지켜낸 평화를 믿으니까.”
“남궁천이 주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다면 그 자체로 반기게 될 거라는 말씀이군요.”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걸세. 아비의 죄악을 아들이 만회한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듣기 좋은 것도 없을 테니. 부정적인 자들도 있겠으나 아닌 자들도 있을 터. 그 자체로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은 소재 아닌가?”
“그건 미세한 균열을 불러오겠군요.”
모용신의 눈빛이 짐짓 날카로워졌다.
“역시 자네는 이해가 빠르군. 나는 이 평화를 지키고 싶네.”
“청랑단주로서 반드시 그 균열을 막겠습니다.”
묵천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의외성은 혼란을 낳게 될 것이고, 혼란이야말로 사마외도의 가장 큰 먹잇감이 될 걸세.”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야지. 이변이 없어서 다소 지루하더라도 평화로운 게 백번 낫지 않겠는가?”
묵천악이 모용신을 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개 숙인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여미며 생각했다.
‘강아, 이제 네가 나설 차례다.’
* * *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간다.
따닥, 딱…….
모닥불이 장작을 태우면서 이따금씩 소리를 지른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을 물리며 주변으로 온기가 퍼져나간다.
그 옆에서는 팽수혁이 팔짱을 낀 채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서성인다.
“이야, 냄새 좋다.”
남궁천이 모닥불 위에서 익어가는 노루고기를 보며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을 윤종승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고, 진소홍은 흥미롭다는 듯 지켜봤다.
그리고 팽수혁은…….
“아오! 더 이상은 못 참겠군! 도대체 어쩌자는 거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남궁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손을 맞비비며 노릇노릇 익어가는 노루 고기만 뚫어져라 보았다.
“어쩌긴. 맛있는 고기 먹자는 거지.”
“이 상황에 노루 고기라니! 지금 그깟 고기가 목구멍으로 넘어 가냐?”
“넌 안 넘어가? 저녁 먹었어?”
“이익……! 저녁을 누가 먹어? 지금 이차시를 치르는 중이잖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배부터 채워야지.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하여튼 요즘 것들은 배가 불렀다니까.
내가 전생에 도망자로 살면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게 바로 끼니는 거르지 말자는 거다.
뭐라도 먹어야 힘이 생기고, 힘이 생겨야 싸우든 도망을 치든 할 게 아닌가.
하물며 영물을 잡으려면 더욱 먹어야지.
“오오, 잘 익었군.”
남궁천이 벽라검에 꿴 두툼한 고기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후후 불었다.
벽라검이 기껏 고기 꼬챙이로 쓰이는 이 참담한 현장을 봤더라면 남궁검이 노발대발했겠지만, 남궁천은 지금 그저 맛있게 먹을 생각밖에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노릇노릇 익어서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보고 있자니 윤종승과 팽수혁도 구미가 당기긴 했다.
팽수혁이 침을 꿀꺽 삼키다가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매를 치켜 올렸다.
“그렇군. 네 계획을 알겠어.”
“뭔데?”
오히려 윤종승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팽수혁이 남궁천 맞은편에 털썩 앉더니 노루 고기 한 점을 집어 들며 말했다.
“다른 놈들이 영물을 잡으면 그걸 빼앗으려는 속셈인 거지.”
“그, 그래도 되는 거야?”
윤종승의 말에 팽수혁이 피식 웃었다.
“못 들었냐? 수단과 방법은 가리지 말고 잡아오라는 말.”
“아아……!”
진소홍이 남궁천을 보았다.
“정말 그런 거야?”
“아닌데?”
너무나 태연한 대답에 세 사람이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팽수혁이 노루 고기를 한 점 뜯어먹다 말고 이맛살을 팍 구겼다.
“아니라고?”
“응. 아닌데.”
“그럼 대체 어쩔 생각이냐?”
“직접 잡아야지. 조잔하게 남의 것 뺏을 생각이나 하고 그러면 안 돼. 사람이 마음을 넓게 가져야지, 쯧쯧. 너 생각이 아주 못됐구나?”
남궁천이 열심히 노루고기를 뜯어 먹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순간 팽수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치 남궁천의 표정이 ‘그러고도 네가 백도 무인이냐?’ 하고 힐난하는 것 같지 않은가.
결국 팽수혁이 꼬챙이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벌떡 일어났다.
“빌어먹을! 그럼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벌써 저녁인데 죽치고 앉아 있으면 영물이 제 발로 기어 나와? 아니면 역시 호구 새끼라서 다른 녀석들한테 쫄아 버린 거냐?”
“어이.”
순간 남궁천이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입을 열자 주변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글거리는 눈으로 팽수혁에게 다가갔다.
“내가 그렇게 우스워?”
“그럼 우습지 않은 대책이라도 말해보든지.”
팽수혁도 지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윤종승이 내심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야단났군. 호구라니. 자존심을 건드려 버렸어.’
그런데 남궁천이 바닥에 떨어진 고기를 주워들고는 흙을 털어냈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고기 던지면 가만 안 둔다.”
‘그쪽이냐!’
모두가 어벙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남궁천이 고기를 후후 불어내면서 중얼거렸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 부위인데. 쯧. 아까운 줄도 모르고.”
하여튼 배부르게 자란 것들이란.
남궁천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리로 돌아가자, 잠시나마 긴장했던 팽수혁이 버럭 소리쳤다.
“제길! 알아서 해라! 내가 너 같은 녀석을 믿은 게 멍청했지! 아니! 믿은 적 없지! 그저 뭔가 있을 줄 안…… 아니지! 그래!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진작 알았지! 그저 공정한 기회를 주려고 한 배를 탄 것일 뿐이니까!”
팽수혁이 구시렁거리며 걸어가자, 윤종승이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뭔가 자아가 붕괴되는 과정을 지켜본 느낌이다.’
팽수혁이 떠나고 나서 주변이 고요해지자 진소홍이 다가오더니 단검으로 고기 한 점을 썰어 먹기 시작했다.
남궁천이 힐끔 보며 물었다.
“너는 안 가?”
“응. 왜? 아까워?”
“뭐, 조금.”
“…….”
“아, 그 부위는 내가 먹을 건데.”
“…….”
그렇게 두 사람의 저녁 식사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윤종승은 손바닥을 펴보면서 남궁천이 했던 말을 되뇌었다.
사실 이차시가 시작된 후로 윤종승의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는 건 남궁천이 던진 한마디였다.
“중요한 건 희미하더라도 완전한 연꽃이다.”
확실히 자신이 사용한 혁련장은 완전한 연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어딘지 찌그러졌거나, 잎이 몇 가닥 떨어져 나간 모습이다.
힘을 더하면 더할수록 연꽃은 더욱 일그러진 모양이 되곤 했다.
‘무조건 세게 할 것이 아니라, 정교함이 필요하단 건가?’
생소하다.
무릇 장법이나 권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이니까.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는 만큼 강맹한 힘을 동반하지 않으면 위력은 크게 떨어지게 마련이다.
한데 힘보다 정교함에 신경을 쓰라고.
쉬이잇, 팍!
윤종승이 돌연 옆의 나무 기둥을 향해 일장을 내질렀다.
나무 기둥에 얇고 기다란 상처가 생겼다.
마치 수도로 내려친 것 같다.
연꽃 모양이 되려면 좀 더 둥글고 넓은 자국이 남아야 할 터.
다시 해볼까.
쉬이이잇, 파악!
이번에도 마찬가지.
일그러진 연꽃이다.
다시.
윤종승은 연거푸 나무 기둥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퍽! 퍽! 퍽…….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남궁천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원 하나는 홀로 뛰쳐나갔고, 다른 하나는 애꿎은 나무를 때리고, 다른 하나는 소중한 고기를 뺏어 먹고 있다.
이 대책 없는 자유분방함이란.
모처럼 도망자 시절의 향수가 느껴진달까.
노루 고기를 다 먹고 나서도 남궁천은 빈둥거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진소홍은 그런 남궁천을 그저 흥미롭게 지켜보았고, 윤종승은 계속 나무 기둥만 때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시간이 더 지났다.
나무를 때리던 윤종승도, 태연하게 지켜보던 진소홍도 슬슬 조바심이 생겨날 때, 마침내 팽수혁이 씨근거리며 나타났다.
“이것들아! 헉, 헉! 내가 잡았다!”
윤종승과 진소홍이 동시에 돌아보니, 피투성이가 된 팽수혁이 뱀 한 마리를 쥐고는 흔들어댔다.
푸른 바탕에 은빛 실선 무늬가 화려한 뱀. 녀석이 팽수혁의 굵은 팔뚝을 휘어 감으며 달아나지 못해 안간힘을 쓴다.
청린은선사.
영물을 잡기 위해 난투를 벌인 탓인지, 팽수혁의 장삼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너덜거렸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몰골만 보아도 얼마나 개고생을 한 건지 짐작이 간다.
제일 먼저 윤종승이 반색했다.
“우와! 진짜 잡았어! 이제 돌아가만 하면 되겠다!”
팽수혁이 잔뜩 지친 와중에도 어깨에 힘을 딱 주는데,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다.
“청린은선사네. 나 같으면 쪽팔려서 그런 하급 영물은 내밀지도 못할 듯.”
“뭐……? 이익……!”
고개를 푹 숙인 팽수혁이 바들바들 떤다.
윤종승이 불안한 눈빛으로 그런 팽수혁을 보았다.
에이, 설마…….
하나 슬픈 예감은 역시 틀리질 않는다.
“흥! 누가 이딴 걸 가져간다고 했냐? 청린은선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멍청한 놈이 있을까 봐 가져와 봤다!”
팽수혁이 버럭 소리치더니 청린은선사를 냅다 던져 버리는 게 아닌가.
청린은선사가 어둠 속 별이 되어 사라지자 윤종승이 머리를 감싸 쥐며 절규했다.
“으아아! 그렇다고 그걸 던지면 어떡해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