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
일차시에서 압도적 일 위를 달성한 남궁천은 비교적 한적한 곳에 숙소를 잡았다.
별채로 떨어져 있어서 다른 생도들과 교류하기에는 다소 아쉽지만 후원이 있어서 방해받지 않고 내공수련하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뭐, 대살성의 자식과 교류를 원하는 생도가 없기도 하고.
어쨌거나 남궁천은 새벽같이 일어나 그 후원에서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단전에서 일어난 청랑한 기운이 혈맥을 따라 시원하게 내달린다.
전신에서 미증유의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니 장삼이 서서히 부풀어가면서 훈기를 뿜었다.
그렇게 얼마나 심법에 집중했을까.
천뢰제왕신공에 들어가니 묵직한 기운이 거침없이 질주하는 게 느껴진다.
‘확실히 달라.’
운기행공을 할 때마다 느끼지만 내공의 질이 전생과 판이하게 다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전생에는 이놈이 하던 것, 저놈이 하던 것 죄다 주워 모아서 따라했으니까.
공력의 흐름을 훤히 볼 수 있는 그로서는 어지간한 심공을 몇 번만 따라 해도 금방 체득했다.
물론 보인다고 해서 기의 흐름을 똑같이 운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보이지 않는 자에 비하면 훨씬 속성으로 체득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그때그때 좋아 보이는 심법은 망설이지 않고 주워 담았다.
당장 오늘 하루를 살아야 했으니까.
초견파공안 덕분에 주화입마에 걸릴 염려는 없었다.
‘그렇게 온갖 잡기를 익혀서 나름 강해지긴 했지.’
하나 한계가 있었다.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백도 무인들이 가끔 흑도나 마도 무인들을 향해 ‘야이, 근본 없는 놈아!’라고 소리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진짜 근본 없는 놈은 바로 나니까.
좋은 말로 표현하자면 그만큼 어느 것 하나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란 말씀.
다만 자유는 자칫 방탕해지기 쉬운 법이고 내 내공의 질은 방탕함 그 자체였다.
거칠고, 그만큼 소모도 빠르고, 뭐 가끔 주체가 안 돼 폭주하기도 하고.
한데 지금은 다르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은 정갈하고 단단하다.
힘이 넘친다.
찌릿…… 찌릿…….
전신의 솜털이 미세하게 곤두선다.
천뢰제왕신공에 들어서면서 내력에 뇌기가 담긴다.
아쉬운 건 내공이 부족하다는 것.
아직도 일 갑자가 채 되지 않는다.
물론 이 나이에 일 갑자의 내공을 보유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당우기처럼 영단이 넘쳐흐르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모를까.
평생 영단이나 영약 따위는 구경도 못 해보고 죽는 무인들도 허다한 게 사실이다.
남궁천은 그나마 안가에서 복용한 구룡철심단 덕분에 일 갑자에 가까운 내공을 쌓을 수 있었다.
‘그래도 원래 지니고 있던 공력이 적지 않은 게 다행이야. 어려서부터 눈칫밥은 먹었을지언정 그 영감이 어려워진 살림에도 나름 챙겨준 모양인데.’
하긴.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의 자식이 아닌가.
내가 아무리 미워도 손자마저 모질게만 대할 순 없었을 터.
어쨌거나 전생과 달리 근본이 생기니 내공의 질이 월등히 좋아졌다.
요즘 들어 남궁천이 내공 수련을 자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내공 수련하면 기분이 조크든요.’
그렇게 또 한참 동안 심법에 빠져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남궁천이 눈을 매섭게 뜨고는 옆에 둔 벽라검으로 손을 뻗었다.
쒸아아아앙!
찰나 벽라검이 뇌성을 울리며 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콰직.
“으헉!”
다르르르…….
나무기둥에 박힌 벽라검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아래에 윤종승이 주저앉은 채로 눈물을 글썽였다.
“뭐냐?”
남궁천이 무뚝뚝하게 묻자, 윤종승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더니 버럭 소리쳤다.
“야! 솔직히 이건 사과부터 해야……!”
“뭐?”
남궁천이 빤히 바라보자 윤종승이 흠칫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사과부터 해야…… 겠다. 내가.”
“무슨 사과?”
“이렇게 불쑥 찾아와 방해해서 미안하다.”
“됐고. 할 말 없으면 가라.”
“언, 언제 가르쳐 줄 거야?”
“뭘?”
“강해지는…… 방법.”
윤종승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간다.
남궁천이 빤히 보다가 다시 물었다.
“뭐 나한테 비급서 같은 거라도 맡겨놨어?”
“그, 그건 아니지만…… 아, 그래! 내가 강해져야지 우리 조가 조금이라도 유리하지 않겠어?”
“원래 하나 정도는 구멍이 생기게 마련이지. 없는 셈 치면 돼.”
“난 구멍이 되기 싫다고!”
“흐음.”
남궁천이 빤히 바라보자, 윤종승이 움찔거리면서도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
“뭐……? 왜……? 어, 어쩔 건데……?”
나름의 소심한 반항.
남궁천이 픽 웃었다.
“넌 혁련장이 왜 혁련장인지는 알아?”
“그야 연꽃 모양의 상흔이 남으니까.”
“만들 수는 있고?”
“뭘?”
“연꽃 말이다.”
“그, 그야 아직 내가 대성하지 못했으니까…….”
“그게 아니지. 대성하면 연꽃이 더 크고 진해질 뿐이야.”
“……!”
“중요한 건 희미하더라도 완전한 연꽃이다. 무식하게 힘만 쓰니까 안 되는 거야. 알아들었으면 꺼져.”
“어? 그게 끝이야?”
이것 봐라. 꼭 이렇다.
물에 빠진 놈 건져주면 항상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
남궁천이 눈알을 부라리려는데, 마침 여생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련은 다음에 해야 할 것 같아. 이차시 집결 시간이 됐어.”
남궁천이 돌아보니 어젯밤 팽수혁에 이어 나타났던 그 여생도였다.
여생도가 윤종승을 힐끔 보더니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설마…… 얘도 우리와 같은 조야?”
윤종승이 내심 발끈했다.
‘그 한심하다는 시선은 뭐냐! 그래도 한때는……!’
하지만 이내 어깨가 축 늘어진다.
뭐…… 한때도 아무것도 없었구나.
돌이켜보면 그저 송원교 무리에게 괴롭힘 당하기 싫어서 앞장서서 남궁천을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바보같이 뭐라도 된 줄 알고…….’
한숨을 길게 내쉬는데 이어진 여생도의 말이 다시 그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얘는 좀 약하지 않아?”
“이익! 약하긴 누가 약하다는 거야? 내가 아니면 누가 이딴 조에 들어오겠어? 대살성의 자식하고 같은 조가 되고 싶은 녀석이 어디에…….”
따악.
“크윽!”
뒤통수에 불이 난 윤종승이 머리를 싸매 쥐고는 끙끙거렸다.
“하여튼 매를 벌어요, 매를.”
남궁천이 윤종승의 뒤통수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애석하지만 이 싸가지 없는 새끼 말이 사실이야. 이런 병신 같은 놈 아니면 나하고 같은 조가 될 놈들이 없다.”
“그럼 우리 조는 호구만 두 명이네.”
여생도가 무심하게 중얼거린 말에 윤종승이 다시 발끈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남궁천이 기둥에 박힌 벽라검을 뽑아내면서 물었다.
“그런데 넌 누구야?”
“뭐? 설마 내 이름을 몰라?”
남궁천이 윤종승을 돌아보았다.
한데 윤종승도 슬쩍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여생도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도 내 이름을 몰라?”
“미안.”
윤종승이 먼 산을 보았다.
여생도가 기가 차다는 듯 투덜거렸다.
“천이야 기억을 잃었다지만, 넌 어떻게 일 년 넘도록 같이 지냈는데 내 이름도 모르니?”
“얼굴은 알겠는데…… 네가 워낙 조용했으니까…….”
“됐어. 진소홍. 내 이름이야.”
“아아.”
윤종승이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남궁천이 벽라검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진소홍. 왜 나하고 같은 조가 되려는 거야? 이 녀석은 호구라서 넘어가고, 팽씨 놈이야 원래 좀 모자란다 치고. 넌?”
만약 팽수혁이 이 말을 들었다면 길길이 날뛰었으리라.
진소홍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야 소문보단 내 눈을 믿으니까. 네가 압도적으로 일 위 하는 모습을 봤는데, 이왕이면 너한테 투자해야지. 위험한 도박일수록 고수익이 보장되잖아?”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니까 할 말이 없다.
하긴. 눈이 있으면 이 몸이 대단하다는 걸 봐서 알 테지. 일차시에서는 정말 전력을 쏟았으니까.
매사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방금 생긴 내 신념이다.
남궁천이 걸음을 옮기는데 또 마침 팽수혁이 모퉁이를 돌아 나오며 소리쳤다.
“왜 이렇게 꾸물거리는 거냐? 집결 시간이 다 됐는데!”
“가는 중이야.”
“남궁천! 똑똑히 새겨둬라. 이 몸이 너와 한 조가 된 건 어디까지나 너에게도 정당한 기회를 주고자 함이다!”
“밤사이에 적당한 핑계를 찾아냈구나.”
“시, 시끄럽다! 나는 결코 네 곁에 머물면서 뭔가 건질 게 있을까 봐 이러는 게 아니다! 난 결코 너에게 영감 비스무리한 것조차 바라지 않는다! 이건 절대적 진심이다!”
“그러시든지.”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뱉고는 걸어가자, 팽수혁이 콧방귀를 뀌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문득 옆에서 나란히 걷는 진소홍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왜 남궁천을 선택한 거냐고?”
“아니…… 넌 누구지?”
순간 진소홍의 이마에 핏대가 살짝 솟았다.
* * *
대연무장에 일차시를 통과한 이백 명의 생도가 모였다.
결코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개회식에 참여했던 생도들과 양민들을 떠올린다면 무척 적은 인원처럼 느껴졌다.
높은 단상에 오른 당예설이 생도들을 둘러보다가 남궁천에게 시선을 던졌다.
‘결국 조를 만들었단 말이지?’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남궁천.
처음부터 흥미를 끌더니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물론 일차시 통과자가 이백 명이니까 사인일조를 만들면 낙오자가 나오긴 어렵다.
하지만 용천관 공식 호구라는 별칭과 대살성의 사생아라는 딱지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자칫 함께 호구로 전락하기 딱 좋으니까.
‘그래서 차라리 낙오를 선택하는 생도들이 있을 거라고 봤더니…….’
오히려 상대가 먼저 찾아왔다던가.
그녀의 시선이 팽수혁과 진소홍에게 향했다.
‘뭐, 이런 게 대회의 재미지. 지켜보마. 남궁천.’
생각을 갈무리한 당예설이 목청을 높였다.
“이차시는 목란산(木蘭山)에서 내일 아침까지 진행된다! 너희들은 동이 트기 직전까지 이곳 대연무장으로 다시 집합하면 합격이다! 단!”
생도들이 이목을 집중한다.
당예설이 그런 생도들을 내려다보다가 입매를 슬쩍 말아 올렸다.
쉬팟.
그녀가 휙 돌아서면서 손을 뿌리자, 두 자루의 비수가 귀빈석 쪽으로 섬광처럼 날아갔다.
귀빈석 난간에는 커다란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당예설이 날린 비수가 정확히 두루마리를 묶은 천을 깔끔하게 끊어냈다.
파팟.
촤라라라라락, 펄럭.
커다란 두루마리가 펼쳐지자 생도들의 시야에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온다.
두루마리 안에는 낯설면서도 한 번쯤은 들어본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청린은선사(靑鱗銀線蛇)
은혈인면지주(銀血人面蜘蛛)
홍염지주(紅焰蜘蛛)
화정충(火精蟲)
은설학(銀雪鶴)
동우령조(銅羽靈鳥)
…….
…….
술렁거리는 생도들을 보며 당예설이 말을 이었다.
“현재 목란산에 풀어둔 영물들이야. 보다시피 하급 영물이 제일 많지만, 특급 영물도 한 마리 포함되어 있지. 모두 서른 마리. 등급 무관하게 조별로 한 마리씩만 잡아오면 통과다! 수단과 방법은 자유!”
생도들이 더욱 술렁거렸다.
황보승이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하급이든 특급이든 잡아오기만 하면 차등 없이 대우해주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 잡기 쉬운 녀석들부터 빨리 잡아야겠지? 안 그러면 다른 조가 다 잡아갈 테니까.”
그제야 생도들이 슬금슬금 서로 눈치를 본다.
목란산은 넓다.
영물은 고작 서른 마리.
그마저도 이름이 생소하고 어떻게 생겼는지 감도 안 오는 것들이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학관에서 졸지 말고 공부 좀 하는 건데.
영물의 생김새를 잘 알아도 문제다.
중급 이상의 영물은 경공을 펼쳐도 잡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한마디로 목란산에 서른 마리가 있다지만, 모두 잡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결국…….
‘최대한 빨리 가서 제일 잡기 쉬운 녀석들부터 찾아야 해!’
합격 조는 절대 서른이 안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생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뛰엇!”
“가자!”
파바바바밧.
팽수혁도 움찔거리고 돌아섰다.
“이 녀석들!”
그가 막 바닥을 차려는데.
“으읏차, 가볼까?”
남궁천이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게 아닌가.
팽수혁의 눈썹이 사정없이 꿈틀거렸다.
“너…… 뭐 하냐?”
“뭐 하긴. 목란산으로 가는 중이지.”
보다 못한 윤종승이 끼어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빨리 가서 잡아야 할 것 아냐!”
“괜찮아. 서른 마리나 풀어놨다잖아. 마음을 편히 가져.”
남궁천이 혀를 찼다.
사람은 모름지기 여유가 있어야 한다.
모두가 뛸 때 홀로 걷고,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홀로 ‘아니오’를 외칠 줄 알아야 하건만. 쯧쯧.
남궁천이 세월아 네월아 걷자, 단상 위에서 지켜보던 당예설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남궁천. 도대체 어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