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압도적 일 위
“남궁천이 일 위를?”
모용신이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질풍대주 초립표를 돌아보았다.
초립표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놀랐습니다. 압도적 일 위가 그 남궁천일 줄이야.”
“압도적…… 일 위?”
“예. 다른 생도들과 차이가 상당했지요.”
“그럴 리가. 모용…….”
모용강은 어찌 되었느냐고 물어보려던 모용신이 입을 다물었다.
하나 그의 속내를 이 자리에서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당예설이 피식 웃으며 모용신이 들으라는 듯 물었다.
“모용강은 몇 등이었어?”
그러자 모용신이 관심을 보이면서도 불쾌하다는 듯 당예설에게 쏘아붙였다.
“그대는 이미 누선에서 결과를 확인하지 않았소?”
“아, 그랬죠. 그치만 일 위만 신경 쓰느라. 뭐 그 아래로 떨거지들은 별로 관심도 없었고요.”
당예설이 생글 웃는다.
뭇 남성들의 마음을 녹여 버릴 만큼 상큼한 미소지만 모용신에게는 그저 얄밉게만 보일 뿐.
초립표가 불안한 듯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어째 이 두 사람은 한 공간에서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불꽃이 튄다.
하긴 무림맹에서도 최대 전투 조직의 수장들이니 그 알력다툼이 어지간하겠는가.
다만 적랑단은 새외지역의 대규모 전투를 도맡았고, 청랑단은 관내의 사건사고를 도맡았기에 약간의 임무 차이는 있었다.
초립표가 얼른 말을 붙였다.
“모용강은 이 위였습니다.”
나름 모용신을 안심시키려고 꺼낸 말이었는데, 오히려 모용신의 표정이 와락 굳는다.
‘젠장, 괜히 말했나? 모용강에게 질풍대를 권했다는 것까지 말하면 죽일 기세로군.’
물론 질풍대가 결코 호락호락한 조직은 아니지만, 모용신의 눈에는 턱없이 부족하리라.
“얼마나 차이 나던가?”
모용강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이로만 따지자면 초립표가 열댓 살은 많았지만, 그의 하대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그게…… 좀…….”
당예설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어엄청 차이 났다던데요? 남궁천이 한숨 자고 일어나도 될 만큼.”
빠직.
모용신의 이마에 핏대가 선다.
하나 농담처럼 건넨 말에 정색하고 따진다면 자신만 옹졸한 사람이 되고 말리라.
모용신이 냉소를 지었다.
“흥, 그럼 우리 대단하신 사천당가의 자제분은 몇 위나 했지?”
“다른 배로 승선했습니다만…… 대략 오십 위권으로 확인됐습니다.”
“훗. 오십 위권이라…….”
빠직.
이번엔 당예설의 이마에 핏대가 선다.
그녀가 품에서 비수를 꺼내더니 던졌다가 받길 반복하며 말했다.
“뭐, 괜찮아요. 본 가는 원래 뛰어다니기보단 던지길 좋아하니까. 아무래도 발보단 비수가 빠르지 않겠어요? 다들 왜 그리 죽어라 뛰는지 몰라.”
“떼로 몰려드는 적들 앞에서 비수만 던지다간 죽기 딱 좋지. 그럴 땐 부디 죽어라 달리시길.”
쉬이이익.
순간 당예설의 손을 떠난 비수가 그대로 모용신에게 날아갔다.
땅.
모용신이 잽싸게 수도로 쳐내자 비수가 그대로 튕겨 날아가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히익!’
초립표가 헛바람을 삼키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당예설이 가녀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머, 실수.”
“무슨…… 짓이오?”
“실수라니깐. 손이 미끄러졌어요.”
“강호에선 실수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소. 그리고…… 죽을 수도 있지.”
“에이, 천하의 모용신 단주님께서 이 정도 실수로 죽으실 분은 아니죠.”
모용신이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대살성의 자식이 일 위를 하다니. 맹주님 심기가 불편하시겠군.”
“그 아이가 대살성도 아닌데 불편할 게 있나요?”
“모양새가 썩 좋지 않을 테니까.”
“음……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여기까지겠죠. 내일부터 있을 시험은 조별 대결이니까요.”
“하긴…….”
모용신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합격자명부를 훑어보았다.
내일까지는 생도들이 직접 조를 정하는 기간이다.
용천관 공식 호구라고 알려진 남궁천이 누구와 조를 이룰 것인가.
시간 내에 조를 짜는 것도 어렵겠지만, 기적처럼 조를 이룬다고 해도…….
‘떨거지들밖에 없겠지.’
제법 재능은 가진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강호가 그런 곳이니까.
혼자서는 살아남기 힘든 곳.
그게 강호다.
* * *
남궁천은 무림맹 인근 객잔에서 저녁을 먹었다.
개회식이 있었던 만큼 객잔에는 많은 생도들로 붐볐다.
일차시에서 떨어져서 신세한탄과 함께 술을 마시는 이도 있었고, 합격한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이도 있었다.
남궁천은 홀로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귀왕반장까지 가서 먹을까도 생각했지만 귀찮아서 가까운 곳으로 왔더니 너무 시끄러운 게 단점이었다.
하필이면 남궁천 바로 옆 탁자에 앉은 생도가 제일 시끄러웠다.
그는 술병으로 나발을 불더니 급기야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에라이! 일 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사앙! 내가! 내가! 경공 빼고느은! 돠아! 자신이 있는데 말이야! 히꾹!”
“자자, 그만하고. 일어나지. 취한 것 같은데.”
“놔! 오늘은 취할 그야! 더러븐 세상! 개 가트은 세사앙!”
“허참! 그만해. 그래 봐야 대회일 뿐이잖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동료로 보이는 생도가 주정뱅이를 부축하면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놓으라니까!”
“엇!”
주정뱅이가 팔을 거칠게 휘두르면서 하필이면 남궁천이 있는 식탁으로 털썩 쓰러졌다.
다행히 밥은 거의 다 먹은 상황이어서 상관없었지만 수저와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어이쿠! 이거 미안하오. 내가 오느을 가슴이 아파서…… 히꾹! 이 내가…… 오느을…… 어……? 어? 너…… 맞지! 용천관 공식 호구! 남궁천! 일차시 일 등!”
주정뱅이가 소리치는 바람에 객잔에 있던 생도들이 일제히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졸지에 주목을 받은 남궁천이 혀를 차고는 싸늘하게 읊조렸다.
“곱게 처마시고 가라.”
마치 먹잇감을 앞둔 맹수와 같은 눈빛.
순식간에 한기가 스며든 주정뱅이는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
“아……? 어…… 넵.”
그가 얼른 일어나서 동료와 함께 객잔을 빠져나가자,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저자가 남궁천이군.”
“용천관 공식 호구라더니. 어떻게 일 등을 했지?”
“그것도 압도적이었다던데.”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많은 이들의 시선은 썩 달갑지 않다.
아마 도망자로 살던 기억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젠 익숙해져야 하리라.
그때 누군가 불쑥 소리쳤다.
“염병! 일 등이면 뭐 하나? 어차피 이차시는 치르지도 못하고 실격일 텐데.”
생도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당우기가 비아냥거리듯 웃었다.
그 의미를 대충이나마 짐작한 생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누가 대살성의 사생아와 한 조가 되려고 하겠나.
그때 당우기와 마주 앉아 있던 모용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단정할 일은 아니지.”
다시 생도들의 시선이 모용강에게 향했다.
당우기도 당황한 듯 모용강을 쳐다보았다.
모용강이 희미한 냉소를 짓고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더니 남궁천을 마주 보며 앉았다.
“내 술 한 잔 받지.”
“그러지.”
남궁천이 잔을 들자, 모용강이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조는 정했나?”
“아직.”
“쉽지 않을 텐데.”
“그래서?”
“우리와 한 조가 되겠나?”
뜬금없는 제안에 주위 생도들은 물론 당우기도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모용……!”
당우기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치려다가 모용강이 손을 들어 제지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모용강이 비워진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물었다.
“어떤가?”
“그건 부탁인가?”
“음?”
모용강이 미간을 살짝 구겼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부탁은 모름지기 급한 사람이 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자네가 부탁한다면 우리가 긍정적으로 고려해보겠다는 제안일세.”
그제야 당우기도 안도의 숨을 쉬며 냉소를 지었다.
모용강의 의도를 알아챈 것이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남궁천에게 한 방 먹이려는 속셈이다.
남궁천이 고개 숙이고 부탁을 하면 그것대로 좋은 것이고, 거절한다고 해도 어차피 조를 편성하지 못할 테니 실격 처리될 거다.
당연히 용천관 공식 호구 주제에 모용강의 제안을 거절하긴 어려울 터.
게다가 모용강과 한 조가 되면 이차시는 무조건 통과라고 봐야 하지 않겠나.
‘과연 굳이 힘쓰지 않고도 고개를 조아리게 만들다니. 역시 모용…….’
“살다 살다 그런 거지 같은 제안은 또 처음 들어보네.”
“……!”
모용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궁천이 입매를 말아 올리고는 술잔을 들이켰다.
“자고로 부탁이란 급한 쪽이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야. 그런데 지금 먼저 말을 꺼낸 건 너님 아닌가?”
“지금 그런 말을 할 입장이 아닐 텐데.”
“참고로 난 내일 걱정을 미리 하지 않는 성격이야. 오늘 최선을 다했다면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
“그게 무슨…….”
“이해할 생각도 말고 꺼져. 술맛 떨어진다. 어차피 너희들이 무릎 꿇고 부탁을 해도 들어줄 생각은 없으니까.”
술병을 쥔 모용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존심인가?”
“자존심? 일 등이 왜 이 등한테 자존심을 내세우나? 가만있어도 우월한 게 증명된 셈인데? 안 그래? 이 등?”
이제 술병에 담긴 술이 저절로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격분한 모용강의 내공에 반응한 탓이다.
남궁천이 술병을 힐끔 보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거 깨지면 네가 사야 된다.”
마침내 모용강이 예의 그 얼음장 같은 얼굴로 돌아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심하군. 기회를 발로 차다니.”
그가 술병을 제자리에 내려두려고 할 때였다.
“남궁처언!”
갑자기 객잔 문이 벌컥 열리면서 팽수혁이 불쑥 나타났다.
그가 객잔을 휘휘 둘러보더니 남궁천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역시 그 주정뱅이 말이 맞았군. 여기 있었구나!”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내가 이 시간까지 널 찾아다닌 거야 뻔하지!”
“또 비무냐?”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흐음…… 네놈을 더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위한 방법으로…… 결코 네놈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아! 네놈이 내게 영감 비스무리한 걸 줘서도 아니고! 그러니 착각하지도 말고! 그러니까…… 음…… 제길!”
말을 하다 만 팽수혁이 모용강의 손에 들린 술병을 휙 뺏어 들더니 벌컥벌컥 마시는 게 아닌가.
모용강의 미간이 구겨졌지만, 팽수혁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술 한 병을 완전히 비우고 나서야 버럭 소리쳤다.
“이 몸이 너와 같은 조가 되려고 왔다!”
순간 장내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모용강은 방금 술병을 빼앗겼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팽수혁을 보았다.
‘이 녀석…… 하북팽가라고 했던가?’
모용강이 이내 피식 웃었다.
하긴 하북팽가 사람들을 괜히 돌 머리라고 부르겠나? 이러니 놀림감이 되는 거겠지.
‘이걸로 낙오자가 둘이 됐군.’
모용강이 냉소를 짓고 걸음을 막 옮길 때였다.
다시 객잔 문이 열리더니 한 여인이 들어왔다.
후줄근한 차림에 주근깨가 양쪽 뺨에 빼곡한 여생도.
‘저 여자는 분명…….’
용천관 생도임에도 비교적 빨리 누선에 도착했던 자.
분명 팽수혁보다도 빨랐던 기억이 난다.
마침 여생도가 이쪽을 돌아보더니 성큼성큼 다가오며 말한다.
“괜찮다면 나와 같은 조가 되어주면…….”
“아…… 미안하오. 난 이미 얘기가 된 동료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하던 모용강이 눈을 치떴다.
여생도가 그대로 자신을 지나쳐 남궁천에게 다가간 것이다.
그녀가 남궁천에게 재차 물었다.
“괜찮을까? 내가 같은 조가 되어도.”
“뭐, 상관없어.”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자 여생도가 연신 고맙단다.
다들 미친 건가.
모용강이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대살성의 사생아와 한 조가 되겠다고.
‘이제 보니 용천관에 미친 것들이 둘이나 더 있었군.’
그래 봐야 남궁천을 포함해 셋이다.
사인일조가 되지 못하면 실격.
이걸로 세 명을 거른 셈인가.
하나 모용강은 알지 못했다.
지금 남궁천 숙소 앞에는 미친 인간이 한 명 더 대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 * *
윤종승이 무릎을 꿇고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남궁천, 부디 나, 나랑…… 한 조가 되어줄래? 으악! 이건 너무 닭살이잖아! 무슨 애정 고백이냐고!”
벌떡 일어난 윤종승이 짐짓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야이, 호구 새끼야. 같은 호구끼리 편먹자! ……라고 하면 뒈지도록 처맞겠지? 으아아아! 어떡하지? 졸지에 일차시를 합격했더니 또 다른 고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