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압도적 일 위
모용강 이후로는 한참 동안 누선에 올라서는 자들이 없었다.
두 사람과 나머지 생도들의 차이가 제법 컸던 탓이다.
특히 물가에 도착해서는 그 차이가 더 벌어졌다.
남궁천은 모용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모용강인가?’
이미 윤종승으로부터 정협관 일인자라는 소리를 들은 바 있었다.
오래전에 만났던 모용백과 확실히 닮은 얼굴이다.
외모를 평가하자면 뭐랄까.
그래, 싸가지 없게 생겼다는 말이 딱이겠군.
남궁천이 한참이나 빤히 바라보자 모용강이 기분 나쁘다는 듯 돌아보더니 싸늘하게 물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니. 너무 깨끗해서 먼지도 미끄러질 지경이야.”
남궁천의 너스레에 모용강이 냉소를 흘리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싸가지가 없다.
모용세가의 내력인가 보다.
그러는 사이 한 명이 난간 위로 솟구쳐 오르더니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는 잠깐 호흡을 고르더니 남궁천과 모용강을 힐끔 보았다.
남궁천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출신은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곤륜파로군.’
곤륜이라면 역시 경공술 아니겠는가.
앞서 두 번이나 매몰차게 거절당한 초립표는 더 이상 생도에게 다가가지도 않았다.
이후로도 하나둘 생도들이 갑판 위로 도착하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다른 누선에도 생도들이 올라타고 있을 터였다.
마침내 난간을 넘어 유현이 도착했다.
그는 처음과 달리 주연화의 손을 잡고 있었다.
주연화가 유현에게 생글 웃어 보이며 말했다.
“사형, 고마워요.”
“다음에는 네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거야. 다 큰 녀석이 물 공포증이라니. 쯧.”
“헤헤. 왠지 오늘부터 극복한 것 같아요! 사형 덕분에.”
“너 설마…… 일부러?”
“에이, 아니에요. 무슨 소리를.”
주연화가 손사래를 치며 딴청을 부렸다.
남궁천이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혀를 찼다.
‘저치도 어지간히 눈치 없는 맹탕일세.’
딱 봐도 사매가 사형을 마음에 품고 있는데 그걸 눈치 못 채나.
이제 도착하는 자들은 대체로 무맹관 생도들이었다.
합격률로 보자면 무맹관 생도가 제일 많은 셈이었다.
새삼스러울 건 없다.
무림맹에서 직접 설립한 학관인 데다 구대문파의 후기지수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이니까.
한편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유현이 어디론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어? 사형!”
주연화가 얼른 유현을 따라갔다.
마침 발걸음이 향한 곳에 서 있던 모용강이 내심 냉소를 지었다.
‘날 의식하는 모양이군.’
사실 모용강도 유현을 경계하고 있었다.
정협관과 달리 무맹관은 생도끼리 순위가 뚜렷하지 않다.
하지만 화산파의 후기지수로 이름을 떨치는 유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그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경쟁 상대였으니까.
성큼성큼 걸어온 유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또 뵙는군요. 화산파 제자이자 무맹관 이년생인 유현이라 합니다.”
“나는 모용세가…….”
말을 꺼내던 모용강이 멈칫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줄 알았던 유현이 그대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슬쩍 돌아보니 유현이 남궁천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이 새끼들이……!’
모용강의 싸늘한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유현이 남궁천에게 포권하며 말을 이었다.
“소협의 무위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혹, 실례가 안 된다면 존함을 여쭤도 될지요?”
“거 비슷한 또래끼리 존함은 무슨. 편히 말하시오. 내 이름은 남궁천이오.”
그러자 유현을 따라 온 주연화가 손가락을 들며 소리쳤다.
“앗! 그럼 용천관 공식 호구!”
주연화의 반응에 유현이 황망해하면서 얼른 꾸짖었다.
“화야! 그 무슨 말버릇이냐?”
“아…… 죄송합니다.”
주연화가 어깨를 움츠리며 사과하자, 유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사매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러게. 대연무장에서도 혓바닥 잘못 놀려서 곤경에 처했던 것 같은데, 이 정도면 거의 바보가 아닌가 싶소만.”
“뭐, 뭐라구요? 저기요!”
주연화가 다시 발끈하자, 유현이 무서운 표정으로 호되게 나무랐다.
“화야! 자꾸 이럴 거면 같이 다니지 말자꾸나!”
“사, 사형…….”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는 지금 화산의 얼굴이나 다름없다고!”
“잘못…… 했어요.”
“쯧쯧.”
유현이 혀를 차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다시 한번 정중히 사과드립니다.”
“뭐, 괜찮소.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니.”
남궁천의 대꾸에 주연화가 내심 발끈했지만 사형의 눈치를 봐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유현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남궁세가의 자제분일 줄은 몰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사이에 무슨 부탁까지.”
“하하, 그런가요?”
유현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생도들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남궁천은 이제 막 도착한 생도를 힐끔 보았다.
광대뼈 아래로 주근깨가 박힌 여자 생도였다.
평범한 외모에 체구보다 조금 커 보이는 수수한 옷차림.
남궁천이 그녀에게 유독 눈길이 갔던 이유는 처음으로 용천관에서도 같은 청룡반 생도였기 때문이다.
‘별로 말이 없고 조용한 아이였지?’
딱히 호구 괴롭히기에도 동참하지 않았던 아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던 아이인데 의외로 경공 실력이 출중한 모양이다.
그러고 나서도 얼마나 지났을까.
“흐아압!”
요란한 기합성과 함께 시커먼 인영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쿠웅.
육중한 소리와 함께 갑판에 떨어진 사람은 다름 아닌 팽수혁.
물에 빠졌던 탓에 전신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가 씨근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남궁천과 시선을 마주치자 거칠게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한편 하나둘 도착하는 생도들을 보면서 질풍대주 초립표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올해는 제법 인재가 많은 편이군. 서두르지 않아도 되겠어.’
그나저나 저 아이가 남궁천이었다니.
용천관 공식 호구로 알려져 있는 남궁천은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한데 이렇게나 압도적으로 일등을 할 줄이야.
하긴. 제 아비가 질풍대 때문에 그리 고생을 했으니 결코 들어오고 싶지 않은 조직이겠지.
운명이란 참으로 묘하구나.
때마침 저쪽 배에서 붉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삐이익, 팡.
저쪽 배에서 붉은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일백 명의 정원이 다 찼다는 뜻.
초립표가 수하에게 물었다.
“우리는 얼마나 남았나?”
“현재 아흔여덟 명! 두 명 남았습니다!”
수하가 말을 하는 사이 또 한 명의 생도가 밧줄을 타고 올라왔다.
이제 남은 한 명.
초립표는 뒤처진 생도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마다 누선으로 먼저 달려오려고 난리도 아니다.
초립표가 수하들을 향해 명령했다.
“이제 밧줄 하나만 남기고 모두 끊어라!”
수하들이 일제히 밧줄을 끊어버리자, 몇몇 생도들이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하필 자기가 잡은 밧줄이 끊어졌으니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말하지 않았던가.
강호에서는 운도 실력이라고.
더구나 이렇게 후순위에 있는 녀석들에게는 특히나 운도 실력이 되는 법이다.
* * *
꼬로록……! 꼬록…….
가라앉는다.
몸과 마음이 차갑게 젖어간다.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대로 가라앉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죽음.
그래, 한 많은 세상, 이대로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 기는 개뿔.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순간 윤종승이 눈을 번쩍 떴다.
‘여긴…… 물속?’
마침 마지막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 팽수혁의 발길질에 자갈돌처럼 날아가 버렸었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그동안 어떻게 지옥을 버텨왔는데.
용천관 공식 호구인 채로 죽을 수는 없다.
윤종승은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몸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저 수면 위로 빛이 어른거린다.
‘빛을 향해서 나아가야 해! 빛을 향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벌써 물을 많이 마신 탓인지 몸이 더 무겁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얼마나 발버둥을 쳤을까.
마침내 수면의 빛이 윤종승을 끌어안았다.
“푸하악! 흐어업! 흐억!”
참았던 숨을 토해내면서 연신 팔다리를 저었다.
마침 손끝에 뭔가가 턱 걸렸다.
밧줄…….
‘살, 살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누선 난간에서 밧줄 하나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 날 구해주려는 거구나!’
새삼 감격해서 눈물이 흐른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생도들이 와글거리며 윤종승을 향해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혹시 저들도 물에 빠진 날 구하기 위해서?’
아아, 아직은 살 만한 세상이 아닌가.
그래, 이토록 인정 넘치는 세상인데.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
“모두들 걱정 마시오! 난 안전하오!”
밧줄을 잡은 채 목청껏 소리쳤지만 윤종승을 향해 달려오는 생도들은 멈추질 않는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간절한 표정들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확실히 누선 위로 올라가서 안전하다는 걸 보여줘야겠다.
윤종승이 악착같이 밧줄을 쥐고 누선을 오르기 시작하자, 달려오는 생도들이 소리친다.
“안 돼!”
“멈춰!”
거참, 나는 안전하대도.
죽다 살아난 터라 몸은 죽을 듯 힘들었지만, 만인의 걱정에 마음만큼은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어때? 인재 좀 찾았어?”
문득 들려온 낭랑한 목소리에 초립표가 돌아보니 당예설이 서 있었다.
그녀는 생도들이 대연무장을 떠나는 것을 확인하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었다.
초립표가 쓴웃음을 지었다.
“압도적 일 등에게 영입 거절당했습니다.”
“호오? 그 맹랑한 녀석이 누구지? 혹시 모용강?”
모용강이면 그럴 만도 하리라.
한데 돌아온 대답이 뜻밖이다.
“아뇨. 남궁천입니다.”
“남궁천……?”
당예설의 표정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녀의 눈길이 빠르게 생도들을 더듬다가 남궁천을 찾았다.
“저 아이가…… 압도적으로 일 위? 그러고 보니 조강민은 안 보이네?”
“조강민이 이번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조강민이? 왜?”
“좀 심하게 다친 모양입니다.”
“어쩌다가?”
“저도 자세한 사정까진 모르겠습니다. 애들 일이잖아요. 용천관에서 나름 쉬쉬하는 분위기 같더라고요.”
“흐응. 그 조강민이 다쳤단 말이지…….”
당예설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여자의 직감이랄까.
촉이 온다.
조강민은 불참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남궁천이 압도적 일 등을 했다.
이 두 가지가 전혀 별개의 일로 보이지 않는 건 과민반응일까.
“조강민이 빠지고 남궁천이라…… 벌써 재미있네.”
그녀의 중얼거림에 초립표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그래도 이제부터가 문제죠.”
“왜?”
“다음 시험부터는 조별 대결 아닙니까?”
“그렇지.”
“생도 중에 누가 대살성의 자식과 같은 조가 되길 원하겠습니까?”
하긴. 일리 있는 지적이다.
내일부터 치러질 시험은 조별 대결.
문제는 조를 편성할 때, 생도들의 자율에 맡긴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스스로의 인지도를 높이고 타인의 마음을 얻는 것 또한 백도 무인이 가져야 할 소양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조 편성 자체도 일종의 시험.
하루 동안 조를 이루지 못하면 실격처리 된다.
‘확실히 남궁천에겐 어렵겠군.’
당예설이 늘어지도록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다.
“기다리기도 지루한데 올해는 그냥 한 명 모자란 상태로 종료할까?”
“그럴까요?”
초립표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답했다.
그때였다.
난간 위로 손이 불쑥 튀어 올라오는 게 아닌가.
“크헉, 헉, 헉! 살, 살았어!”
간신히 갑판으로 넘어온 자는 다름 아닌 윤종승.
대회고 나발이고 오로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배에 올라탄 그였다.
윤종승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난간 밖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여러분, 고맙소! 나, 나는 안전하오! 다 여러분 덕분이오! 나는 이렇게 살았소!”
그 모습을 본 초립표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사자후로 외쳤다.
“이상, 이백 명 승선! 일차시를 종료한다!”
순간 윤종승이 어벙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엉……? 일차시……? 뭐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