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3화 (33/508)

33. 일차시(一次試)

파바바밧.

유현이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다.

비교적 늦게 출발한 그였지만 벌써 선두에 속해 있었다.

그 뒤를 주연화가 바짝 쫓았다.

“헉, 헉, 사형……! 같이 가요!”

주연화가 옷자락을 붙들자 유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화야, 시험 중에 옷을 잡으면 어떡해?”

“아이참, 우리가 탈락하진 않을 거예요. 보세요. 우리 뒤에 훨씬 사람들이 많다구요. 냉정하시긴!”

“미안하지만 나는 대충할 생각이 없다. 너도 최선을 다해라.”

탓.

“어엇! 너무해!”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주연화를 버려두고 유현이 쏜살같이 달렸다.

그가 제일 앞서 달리는 남궁천을 보았다.

‘저자는 분명…….’

황보승의 일권을 맨손으로 받아낸 자.

그것도 단 한 손으로.

그래서 완력이 강한 자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한데 경공까지 빠르다.

아니, 오히려 경공에 특화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단언컨대 지금껏 본 경공 고수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힐 수준이다.

‘내가 견식이 많이 부족하구나.’

그나저나 누굴까.

저 정도로 빠른 데다 황보승을 간단하게 제압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역시 낙양조가의 조강민.

소문은 들어봤다.

어린 나이에 절정의 경지를 앞둔 후기지수.

용천관주가 직접 발 벗고 나서서 입관시켰다는 이야기까지.

다만 듣던 것과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정말 빠르네.’

누가 보면 평생 경공만 연구한 사람인 줄 알 지경이다.

제일 앞서 달리는 남궁천과 선두에 선 자들의 거리 차이는 제법 컸다.

마침 저만치 장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림맹 깃발을 꽂은 누선 두 척이 복판에 떠 있고 군데군데 나룻배와 통나무들이 떠 있었다.

아마도 경공술을 이용해 나룻배와 통나무를 밟아가면서 누선까지 가라는 뜻이리라.

‘연화는 잘 따라오고 있으려나?’

유현이 슬쩍 돌아보니 조금 뒤처진 곳에서 주연화가 달려오고 있었다.

뭐, 저 정도면 충분히 합격선이겠군.

그런데…… 저건 뭐지.

생도들 사이에서 성난 황소처럼 유별나게 질주하는 자가 있었으니…….

“으아아아압!”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빠른 속도로 생도들을 제치는 자는 다름 아닌 팽수혁이었다.

팽수혁은 저만치 앞서가는 남궁천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남궁처언!’

일차시가 경공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팽수혁은 대충 치를 생각이었다.

어차피 합격만 하면 될 테니까.

하북팽가의 무공 특성상 경공이 위력적이지도 않고.

가전무공이 거칠고 패도적인 도법을 구사하는 만큼 경공도 그만한 무게를 버티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여타의 경공에 비해서는 자연히 속도가 빠르진 않았다.

한데 남궁천이 제일 앞서 달리는 것을 본 팽수혁은 생각이 바뀌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남궁천에게만은 지기 싫었다.

그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악착같이 내달렸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혹시 용천혈에만 집중해서 공력을 발출한다면?’

이는 남궁천 때문에 떠올린 생각이다.

사실 듣기엔 간단할지라도 실제로 떠올리고 실행하기까지는 그렇게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수십,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과 습관을 깨고 새로운 방식에 도전한다는 건 동전을 뒤집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뒤집어 보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하나 팽수혁은 남궁천 덕에 이미 그 동전 뒷면을 확인한 상태였다.

여기까지 떠올린 그는 일순 연곡혈에서 발출하는 기운을 막아 버리고 모든 공력을 용천혈에만 집중했다.

파앙!

순간 팽수혁의 몸이 휘청거리면서 앞으로 튀어나갔다.

마치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를 펼친 것처럼 그의 몸이 비틀리면서 빠른 속도로 나아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수법이었기에 팽수혁은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하나 연이어서 용천혈에서만 공력을 발출하자 곧 자세가 안정을 취해갔다.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하북팽가의 도법을 지탱해 주기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칼을 부릴 필요가 없을 때는 꽤나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궁천의 말대로 번갈아 쓰면 또 하나의 무기가 될 수도 있을 테고.

가만, 남궁천의 말대로.

‘제길! 누가 네놈 따위 말을 들을까보냐!’

그러면서도 용천혈에서만 공력을 발출하는 이유는…… 그래, 단지 이게 편해서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데 마침 저만치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주저앉은 윤종승이 보였다.

‘저 멍청한 새끼가 왜 길을 막고 있는 거야?’

불끈 화가 난 팽수혁이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발로 걷어차자, 윤종승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이제 팽수혁의 눈에는 저만치 앞서 달리는 남궁천만 가득 들어왔다.

남궁천은 벌써 강물로 뛰어들기 직전이었다.

나룻배와 통나무가 군데군데 둥실둥실 떠 있는 장강.

‘네놈이 일 등 하는 꼴은 죽어도 못 보지!’

이건 원수고 나발이고 그냥 자존심 문제다.

이제 강가에 도착했으니 가까운 나룻배와 통나무를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보면 거리는 한층 좁혀지리라.

그때 도기라도 날려 보내면 남궁천의 발길은 붙잡을 수 있을…….

“수상비(水上飛)……? 저, 저! 미친!”

팽수혁이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놀랍게도 강가에 도착한 남궁천은 인근의 나룻배 따위는 찾지도 않았다.

대신 그대로 누선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는 게 아닌가.

파바바밧.

수면을 박차는 남궁천이 마치 물수제비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물론 누선까지 계속 수상비를 펼치는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통나무나 나룻배가 걸려들면 어김없이 박차면서 더 멀리 도약하길 반복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수상비라니?’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짧은 거리라면 어린 생도라도 할 수는 있다.

경공은 어디까지나 기술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공법이 아니라 경공술이라 부른다.

따라서 심후한 공력보다는 그 기술적 방법이 더 중요하다.

한마디로 공력의 크기는 경공술에 영향을 미치기보단 지구력에 영향을 준다.

즉, 그만한 경공술을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하느냐의 문제.

아무리 그래도 아직 약관도 지나지 않은 생도가 수상비를 펼친다면 거리를 떠나 놀랄 만한 일이다.

물론 통나무와 나룻배를 밟아가며 펼친다곤 하지만…….

수십 년간 경공술만 연구한 자가 아니고서야.

사실 남궁천만큼 오랜 기간 경공술을 고민하고 연구한 자는 없겠지만, 그러한 내막을 모르는 팽수혁으로서는 정말이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도대체 저놈 정체가 뭐야?’

용천관 공식 호구로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녀석이 갑자기 만만해지는가 싶더니, 이젠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젠자앙! 네놈이 한다면 나도!”

팽수혁이 괜히 욕지거리를 터뜨리며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파앙!

마침내 강변에 도착한 그도 수상비를 펼치면서 직진했다.

하지만…….

팟! 팟! 철퍽! 철퍽…….

열댓 걸음을 걸어간 그가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꼬로록…….

“크익!”

결국 헤엄을 쳐서 가까운 통나무를 붙든 팽수혁이 간신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제길!”

팽수혁의 주먹이 애꿎은 수면만 거칠게 때렸다.

* * *

‘도대체 저 아이가 누구지?’

누선 갑판에 우뚝 선 중년의 사내.

질풍대주(疾風隊主) 초립표가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그는 강변에 생도 하나가 빠른 속도로 도착했을 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이다.

무림맹에서도 발 빠른 자들만 모아놓은 추격대가 바로 질풍대다.

초립표는 이 기회에 눈에 띄는 재목이 있으면 점찍어 두었다가 대원으로 발탁하는 것까지 고려해둔 상태.

한데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빠른 녀석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 녀석이 강변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조금 더 지켜보려고 했다.

뭍에서는 빠를지라도 강변에 다다라서 순위가 뒤집히는 경우는 허다했으니까.

흔들리는 나룻배나 통나무에서 중심을 잡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기술이다.

그게 아니면 나룻배 하나를 잡아타고 안전하게 이동하는 방법도 있는데…….

“……다짜고짜 직진이냐!”

놀랍게도 강가에 도착한 생도는 거침없이 수상비를 펼쳐오는 게 아닌가.

물론 누선까지 줄곧 수상비만 펼친 건 아니다.

그러기엔 내공이 부족할 터.

중간중간 나룻배나 통나무를 밟아가며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생도의 행동은 초립표의 모든 예측을 깼다.

생도는 조금도 우회하지 않았다.

오로지 최단거리만을 이용한다.

저 모습은 마치…….

‘천하대살성…….’

문득 떠오른 생각에 초립표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괜히 부정 타는 생각을 지우려는 듯.

그러는 사이 남궁천은 누선 아래까지 다다라 늘어진 밧줄을 잡고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올라왔다.

파밧, 탓.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은 남궁천이 날렵하면서도 안정적인 자세로 갑판에 착지했다.

그 모습을 본 질풍대원들이 저마다 넋을 놓았다.

그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한결같았다.

‘이, 이 새끼는…… 특채다!’

압도적 일 위.

나무랄 데 없는 경공술.

질풍대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인재.

“우오오!”

순간 질풍대원들이 갈채를 보내왔다.

짝짝짝…….

다른 생도들은 이제 막 강변에 도착해서 우왕좌왕거리고 있었다.

초립표도 감탄한 듯 박수를 치며 남궁천에게 다가갔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합격입니까?”

“그럼! 합격이고말고!”

초립표의 칭찬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초립표가 당황한 듯 얼른 불렀다.

“자, 자네! 잠깐만!”

“뭡니까?”

남궁천이 퉁명스레 되물으며 돌아섰다.

초립표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생도 주제에 뭐가 이리 당당한가.

하긴, 아직 자신이 누군지 몰라서 그럴 지도.

만약 자신이 무림맹에서 가장 발 빠른 추격대인 질풍대주라는 사실을 알면 자세가 싹 바뀌리라.

초립표가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자네. 질풍대원 해볼 생각 없나?”

“관심 없습니다.”

“그렇겠지. 당연히 관심 없…… 엉?”

“그럼 이만.”

“잠, 잠깐만! 질풍대라니까?”

“그래서요?”

“뭐?”

“질풍대가 왜요?”

“너…… 질풍대 몰라? 무림맹 최고의…….”

“발 빠른 추격대. 무림맹의 대표 사냥개.”

“음…… 사냥개는 어감이 좀 그렇고.”

“어쨌든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런데 싫다고?”

“예. 관심 없습니다.”

“아니, 다른 곳에 관심이 있더라도 질풍대를 통하면 진급도 빠르고…….”

“괜찮습니다.”

남궁천이 거듭 사양하고는 걸음을 옮기자, 초립표는 물론 질풍대원 전원이 입을 척 벌리고는 바라보았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지? 굴러온 출세 기회를 발로 차?’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남궁천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남궁천이 초립표를 힐끔 보고는 혀를 찼다.

‘너도 많이 늙었구나.’

한창 날 쫓아다닐 때만 해도 새파란 애송이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중년이라니.

세월이 참 빠르다.

그나저나 질풍대라니.

내가 미쳤다고 질풍대에 들어갈까.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던 놈들인데.

질풍대는 정말 끈질긴 추격대였다.

게다가 발도 빨라서 내가 가는 곳곳마다 간발의 차이로 나타나곤 했다.

한번은 질풍대원 중 절반을 죽여 버린 적도 있었는데, 불과 석 달 만에 질풍대원이 그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그때 무림맹의 힘을 절감했었지.’

지긋지긋한 것들.

그래도 이렇게라도 복수하니 통쾌하네.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뒤끝 때문이 아니다.

나는 자고로 뒤끝이 없는 남자다.

단지 전생에도 빨리 달리느라 시간을 다 보냈으니, 이번 생은 좀 느긋하게 달려도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시험 치는 경우만 아니라면 말이다.

남궁천이 난간에 걸터앉아서 쉬는 중에 마침 두 번째로 도착한 생도가 갑판 위로 뛰어올랐다.

파라라, 탁.

화려한 동작으로 내려선 그는 다름 아닌 모용강이었다.

그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남궁천을 힐끔 보더니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초립표가 다가갔다.

“자네! 질풍대원 해볼 생각 없나?”

“관심 없습니다.”

“…….”

북풍한설처럼 차디찬 대답에 초립표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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