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8화 (28/508)

28. 하여튼 이놈의 인기란

무한을 가로지르는 장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용천루 최상층.

꼴꼴꼴…….

술병을 기울이자 화주가 맑은 소리를 내며 잔을 채운다.

모용강이 잔을 들고는 저 멀리 펼쳐진 장강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군.’

세가들이 재력을 모아 만들었다는 정협관의 생도 중 일인자, 모용강.

그가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는 잔을 탁 내려두었다.

얼음을 깎아서 조각하면 저런 얼굴일까.

뭇 여인들이 눈길을 쉬이 거둘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한 외모지만 냉혹할 정도로 무감한 표정.

“끄으……!”

“아으윽……!”

주변에서 다 죽어가는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모용강이 무심히 눈길을 돌리니, 용천관 생도들이 곳곳에 쓰러진 채로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낸다.

아직 정리가 덜 끝난 것인지 아래층에서는 여전히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섞여 올라온다.

뭔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모용강은 다시 느긋하게 술잔을 채웠다.

꼴꼴꼴…….

그가 다시 술잔을 들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용천관 생도의 머리채를 잡은 채 질질 끌고 왔다.

정협관 생도 중 이인자이자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우기.

그가 끌고 오던 생도를 휙 던졌다.

털썩.

“크윽!”

만신창이 된 생도가 모용강이 앉은 탁자 옆에 힘없이 고꾸라졌다.

당우기가 손을 털면서 모용강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제길, 조강민이 안 보이는데?”

“마셔.”

모용강이 당우기 앞으로 잔을 내밀고는 술을 채워주었다.

단숨에 술을 들이켠 당우기가 건포를 집어 먹으며 물었다.

“크으! 좋네. 그런데 누가 먹던 거야?”

“모르지.”

“하긴. 뭐, 여기 널브러진 것들 중 한 놈이 먹던 거겠지.”

“그래서 조강민은?”

“이제 알아봐야지.”

당우기가 건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옆에 쓰러진 생도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긴말 안 한다. 조강민 어디 있어?”

“쿨럭, 컥! 하가네서 지뇨주니나고…… 큭…… 쿨럭!”

“뭐라는 거야?”

“나…… 나그저니…… 초, 초가미느 브스니벼…….”

“이 병신이 뭐라는 거야?”

퍽.

“커억!”

결국 힘겹게 말을 흘려내던 생도가 벽에 처박히면서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렸다.

모용강이 그렇잖아도 가늘게 찢어진 눈을 더욱 얇게 여미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게 말은 할 정도로 손을 봐야 할 게 아닌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당우기가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모용강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당우기가 은근히 자세를 바꾸며 말을 덧붙였다.

“뭐, 용천관 앞마당에서 이놈들이 개박살 났는데 조강민이 안 나타나겠어?”

“오늘이 자유견식기간 마지막 날이야. 자정이 지나면 사냥할 명분도 없어.”

“그 전에야 그놈이 기어 나오겠지.”

그때 낭랑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안 나타날 것 같습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온 사람은 다름 아닌 제갈기.

그가 주변에 잔뜩 널브러진 생도들을 보고는 휘파람을 한 차례 불더니 빈틈을 찾아 깡충깡충 뛰어 다가왔다.

당우기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무슨 소리야? 안 나타날 것 같다니? 그래도 용천관 일인자라면 자존심이 있어서라도 기어 나와…….”

“변수가 생겼습니다.”

“무슨 변수?”

“놀랍게도 조강민이 다른 생도에게 깨졌다는군요.”

당우기가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려치고는 으르렁댔다.

“뭐야? 니미럴, 벌써 무맹관 놈들이 손을 쓴 거야?”

구대문파의 쟁쟁한 후기지수가 많은 무맹관이라면 충분히 그럴 실력이 되리라.

한데 제갈기가 고개를 살래살래 내둘렀다.

“아뇨. 들으면 놀랄 겁니다.”

“썩을, 그럼 도대체 어떤 놈이 우리 사냥감을 먼저 친 거야?”

“남궁천입니다.”

순간 당우기가 어벙한 표정을 지었고, 모용강은 눈자위를 꿈틀거렸다.

잠시 후 당우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뭘 잘못 안 거겠지. 남궁천이 아니라…….”

“맞아요. 대살성의 사생아 남궁천.”

“허! 용천관 공식 호구, 그 남궁천?”

“그 남궁천.”

당우기가 입을 쩍 벌렸다.

말도 안 된다.

언제 적 남궁세가인가.

오대세가에서 빠지고, 칠대세가에서도 미끄러져 까마득하게 보이지 않는 곳까지 떨어진 게 남궁가 아닌가.

한데 이어지는 말이 더 가관이다.

“호신위 곽철주와 백리향, 송원교까지 가세했다더군요.”

“남궁천 쪽은?”

“혼자.”

“말도 안 돼!”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어요. 이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무슨 의민데?”

“두 가지. 하나는 남궁천의 신상에 변화가 있다는 거지요. 기연을 얻었거나, 자살 시도 후 어떤 깨달음을 얻었거나.”

“가능성이 희박하네. 다른 하나는?”

“조강민이 허명성세라는 겁니다. 뭐, 백리향이나 송원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굳이 따지면 이쪽이 더 가능성이 높군.”

“자, 이제 자정까지 세 시진 남았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제갈기의 질문이 모용강에게 향했다.

당우기도 모용강을 돌아보았다.

모용강은 말없이 주변에 널브러진 생도들을 보았다.

붉은 노을빛이 스며들자 마치 허공에도 피가 번진 것처럼 더 처참한 광경으로 보였다.

마침내 모용강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왕 저질렀으면 끝을 봐야지. 자정이 되기 전에 남궁천을 친다. 구성은 제갈기가 알아서.”

제갈기가 생글 웃으며 당우기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실하게 가는 게 좋겠죠? 당 형과 악굉, 황보 형이 주축이 되어주시죠.”

“그딴 호구를 잡으러 그렇게 많이?”

“아시잖아요? 제가 돌다리도 두드려보는 것.”

“하여튼 오대세가를 제멋대로 부린다니까.”

당우기가 입술을 비죽 내밀고 말하자 제갈기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어찌 감히. 싫으시면 조정하겠습니다.”

“싫을 리가.”

당우기가 피식 웃고는 벌떡 일어났다.

모용강은 창밖 노을로 시선을 던지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남궁천이라. 재미있네.’

* * *

남궁천은 휘영청 떠오른 달을 올려다보며 저잣거리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달빛 좋네.’

이렇듯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면 늘 감회가 새롭다.

전생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여유니까.

특히 전생에는 이런 골목길을 지날 때마다 주변에 매복한 놈이 없을지 항시 긴장해야 했다.

그렇다고 도망자 주제에 대로로 다닐 수도 없었고.

‘누구라도 날 알아보면 며칠간 잠은 다 잤었지.’

골목길은 내게 그런 의미다.

날 숨겨주지만, 어디선가 죽음의 손길이 뻗어올 수 있는 장소.

“그나저나 무연회라…….”

확실히 정파 놈들은 이런 소소한 재미를 많이 만든다.

뭐, 그 점이 편하기도 하지만.

무연회에서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게 되면 남궁세가를 재건하기에 훨씬 유리한 상황이 될 테니.

물론 그만큼 견제도 심해지겠지만 상관없다.

견제가 심할수록 적아는 더욱 분명해질 테니까.

‘일단 목표를 무연회 우승으로?’

우승이 너무 눈에 띄면 준우승이나 삼사 위 정도에서 멈춰도 되고.

천천히 생각하지 뭐.

그런데…….

생각을 거듭하던 남궁천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둑하고 좁은 길에 달빛이 교교히 내려앉는다.

남궁천이 불쑥 입을 열었다.

“골목은 내 방과 같은 곳이야. 그래서 쥐새끼가 숨어 있으면 금방 눈치채지. 좋은 말 할 때 기어 나와. 처맞으러 온 거면 빨리 맞고 끝내자.”

그러자 골목 귀퉁이에서 그림자 하나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남궁천이 거구의 그림자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였구나. 팽수혁.”

“그래, 나다. 남궁천. 다행히 자유견식기간이 끝나기 전에 이렇게 만나게 됐구나.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스르르릉.

팽수혁이 등에 맨 대도를 꺼내 들자 도신에서 흉흉한 예기가 풀풀 휘날렸다.

“진짜 어지간히도 쫓아다니네. 그렇게 내가 좋아?”

“미친 새끼. 죽다 살아나더니 대가리가 처돈 게 확실하군.”

“원망이 꽤 깊구나.”

“닥쳐라. 검이나 뽑아라, 남궁천!”

“뭐, 네 조부 일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닥치라고 했다.”

“네 조부를 내가 죽…… 아니, 내 아버지가 죽이지만 않았어도 하북팽가는 여전히 오대세가에 손꼽히고 있을 텐데. 내가 대신 사과를…….”

“검이나 뽑으라고, 이 개새끼야!”

타닷.

순간 팽수혁이 바닥을 차며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

남궁천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족소음신경(足少陰腎經)을 이용한 신법이군. 그럼 역시 어기신풍(御氣神風)인가?’

어기신풍은 하북팽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독문신법이다.

여느 신법처럼 용천혈에서 주로 공력을 발출하지만, 연곡혈(然谷穴)에서도 상당한 공력이 터져 나온다.

이는 하북팽가 특유의 무겁고 패도적인 도법을 지탱하기 위함이리라.

‘그래서 종국에는 그만큼 느려진다는 게 단점이지만.’

스슷.

남궁천이 재빨리 가전 신법인 무한보(無限步)의 보법을 밟아 사선으로 떨어지는 도신을 피했다.

콰자앙!!

허공을 가른 대도가 그대로 바닥을 찍자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남궁처어언!”

휘이이이이잉!

팽수혁이 도풍을 이끌면서 그대로 횡으로 칼을 휘둘렀다.

생각보다 빠른 방향 전환에 남궁천이 내심 감탄을 터뜨렸다.

신법과 도법의 공력 운용을 기가 막히게 잘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건 수련만으로 갖출 수 없는 자질이다.

숱한 실전이 있지 않고서야.

그럼 팽수혁이 그토록 많은 실전을 겪은 것일까.

아니다. 하북팽가의 도법 자체가 무수한 실전을 겪으며 갈고닦아진 탓이다.

거기에 팽수혁의 자질도 한몫 했을 거고.

혈맥을 따라 빠르게 뻗어와 도신을 타고 날아드는 붉은빛.

물론 초견파공안으로 보이는 저 기운은 실제보다 늘 빠르다.

때문에 남궁천은 늦지 않게 검을 뽑아 들면서 도신을 막아냈다.

쩌어엉!

금속성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기풍이 사방으로 훅 불어나갔다.

동시에 팽수혁의 눈동자가 잔뜩 커졌다.

‘……막았어?’

조강민을 일방적으로 패는 걸 봤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한데 막상 도검을 섞어 보니 그 무게가 다르게 다가온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는다.

“좋은 무공이다. 하늘에 계신 조부께서 기뻐하실 거다.”

“이…… 이…… 개새끼이이익!”

스까앙!

도신을 휘둘러 남궁천을 밀쳐낸 팽수혁이 눈을 까뒤집고는 달려들었다.

조금 전보다 더 격한 분노가 도신에 고스란히 담겼다.

보통은 흥분할수록 손발이 어지러워지게 마련인데, 무수한 실전에서 파생된 하북팽가의 도법만큼은 예외다.

더 거칠고, 더 패도적이며, 더 위협적으로 변한다.

카앙! 깡! 쩌엉! 쉬이잇, 까아앙!

치솟는 격노마저 도법으로 승화시키는 자들, 그게 바로 하북팽가다.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이 일면서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성이 연신 터진다.

남궁천이 정신없이 도신을 막아내면서 혀를 찼다.

‘염병할, 조부가 기뻐할 거라고 칭찬해줬더니 왜 이 지랄이야?’

혹시 조부를 싫어했나.

아니, 그럼 날 왜 미워하지.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팽수혁이 마침내 기합성을 터뜨리더니 회심의 일격을 펼쳐왔다.

붉은 기운이 수궐음심포경(手厥陰心包經)을 따라 도신을 타고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다.

하북팽가 도법 중 철혈적성도(鐵血摘星刀)의 철혈패산(鐵血敗山) 초식.

남궁천이 혀를 찼다.

‘조부가 이걸 사용하다가 당한 줄은 모르는 모양이군.’

똑같은 방식으로 맞서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좀 들지만 어쩔 수 없다.

투기를 넘어 살기까지 느껴지는 이 공격을 어영부영 막으려다 보면 부상을 입기 딱 좋다.

‘어쩔 수 없이 예전 방식 그대로.’

남궁천이 지금껏 유지하던 무한보를 버리고 제멋대로 발을 놀렸다.

물론 제멋대로라고는 하지만 그 오래전 팽 가주를 죽였을 때와 같은 보법이다.

그럼에도 그럴싸한 무공명 없이 제멋대로라고 표현한 건, 그 당시 어린 남궁천이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였던 보법이기 때문이다.

남궁천이 갑자기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자, 팽수혁도 당황했다.

‘이건 또 뭔……?’

처음엔 남궁천이 실수로 발을 헛디딘 줄 알았다.

그 움직임이 너무 어설퍼 보였기에.

한데 도신이 떨어져 내리는 순간, 남궁천이 거짓말처럼 몸을 회전하며 피하는 것이 아닌가.

콰직.

도기가 그대로 바닥을 찍자, 어느새 옆구리 쪽으로 돌아온 남궁천이 검파를 휘둘러 팽수혁의 등을 찍었다.

퍼억.

“커억!”

슈우우웃, 쿠당탕탕.

포탄처럼 튕겨 나간 팽수혁이 한참이나 바닥을 굴렀다.

남궁천이 벽라검을 검집에 갈무리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조강민보단 백번 낫네. 그나저나…….”

남궁천이 뒤로 돌아서더니 어둑한 골목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구경 끝났으면 그만 기어들 나오지 그래? 모처럼 처맞으러 와서 그냥 돌아가면 아쉽잖아.”

말이 끝나자마자 건물마다 지붕 위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보자…….

둘, 넷, 여섯, 열, 열다섯, 스물, 스물다…….

씨발, 좆나 많네…….

하여튼 이놈의 인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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