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이걸 죽여?
귀왕반장은 규모가 크지 않은 밥집일 뿐이지만, 동산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어서 제법 너른 후원을 갖추고 있다.
그 후원에는 귀소이들이 진땀을 흘려가며 옮겨 놓은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위에서 남궁천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휘이이이!
정좌한 남궁천을 중심으로 회오리바람이 불자, 근방에 떨어졌던 낙엽이 사뿐히 몸을 띄운다.
휘우우웅.
색 바랜 단풍잎과 낙엽들이 남궁천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모습이 언뜻 경이롭게 보일 지경.
어느 순간 낙엽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떠서 유유히 흐르는 것만 같다.
남궁천의 전신에서 우러나오는 창연한 기운이 그 광경을 더 신비롭게 만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지금 오롯이 운기에만 집중했다.
창궁대연신공.
남궁세가의 기본이 되는 신공이자, 가장 중요한 심법이다.
남궁세가의 모든 무공은 창궁대연신공에서 출발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단전에서 일어난 기운을 소주천하고 대주천까지 마친 남궁천이 이번에는 서서히 운공법을 바꾸기 시작했다.
바로 남궁세가의 소가주에게만 전한다는 천뢰제왕신공(天雷帝王神功)이다.
확실히 창궁대연신공에 비하면 기운의 무게부터 다르다.
창궁대연신공이 가벼우면서도 경쾌하게 움직인다면, 천뢰제왕신공은 묵직한 만큼 강한 힘이 느껴져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
이는 남궁세가의 검법이 대체로 쾌검과 중검에 고루 무게를 두기 때문이리라.
소가주도 아닌 남궁천이 이런 천뢰제왕신공을 아는 이유는 남궁선 덕분이다.
여인임에도 천하제일룡으로 추앙받던 그녀는 일찌감치 소가주의 자격을 물려받은 바 있었다.
뭐, 나를 만나기 전까지였지만.
어쨌든 그 덕에 남궁선은 천뢰제왕신공뿐만 아니라, 가문의 절기를 모두 익혔다.
‘그리고 그걸 내게 모두 보여주었지.’
남궁천은 운공을 하면서도 잠깐 옛 추억에 젖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괜히 미소가 지어지는 그 시절.
하루하루 목숨 걸고 도망 다니면서도 가장 많이 웃었던 시절.
남궁천은 그중 어느 하루로 의식이 날아가서 진천랑이 되어 있었다.
눈앞에선 창연한 기운을 품은 검신이 허공을 매섭게 갈랐다.
쉬잇! 쉭쉭쉭! 쒜에엑.
그저 옆에서 지켜볼 뿐임에도 피부가 따갑다.
아마도 지금 펼치는 저 검법이 ‘천뢰(天雷)’의 기운을 품기 때문이리라.
화려한 검초를 쉴 새 없이 선보이던 남궁선이 마침내 검을 갈무리하며 심호흡을 했다.
바람결에 내려앉는 머리카락조차도 아름답게 느껴지던 그녀.
남궁선이 문득 돌아보며 활짝 웃는다.
“어때?”
“대단해.”
“그게 다야?”
“원래 너무 대단한 건, 말이 더 이상 안 나오는 법이지.”
“방금 그 표현은 나쁘지 않네.”
남궁선이 활짝 웃는다.
사람 얼굴에 꽃이 핀다는 건 아마도 저런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진천랑은 가슴이 뛰는 걸 누르며 말을 이었다.
“이걸 보여준 이유는?”
“당신이 봐줬으면 해서.”
“왜?”
“본 가의 검법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으음.”
“어때? 알겠어?”
진천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아.”
“정말? 역시 초견파공안!”
“하지만 그걸 곧장 고칠 자신은 없는데?”
“어째서? 모든 무공을 파훼할 수 있는 게 초견파공안 아니었어?”
“어디가 부러졌는지 안다고 해서 모든 대장장이들이 보검을 고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아…….”
“원래 잘못을 지적하긴 쉽지만, 내가 그것을 고쳐 뭔가를 만들기는 어려운 법이지. 그래서 알면 알수록 함부로 지적하지 않게 되는 거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 숙인다?”
“비슷한 개념이지.”
남궁선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진천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웃겨?”
“그냥. 뭔가 이런 이야기, 당신답지 않아서.”
“나다운 게 뭔데?”
“글쎄…… 당신다운 게 뭘까? 아! 날 죽여 버리겠다면서 쌍욕을 뱉으며 달려들던 모습은 확실히 당신다웠어.”
“됐어. 두 번 죽긴 싫어.”
“얍!”
돌연 남궁선이 진천랑의 어깨에 와락 매달렸다.
그녀가 진천랑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래도 약속해 줄 거지? 잘못된 부분…… 고쳐보는 걸로.”
그 말이 무척 묘하게 들렸다.
잘못된 부분.
이 세상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의 운명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으며, 남궁세가의 무공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진천랑이 남궁선의 희고 고운 손을 잡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뛰어난 무공 고수가 손마저 이처럼 고운 건 반칙이라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진천랑의 입이 열렸다.
“약속할게. 고쳐보기로.”
하지만 결국 진천랑은 그녀가 떠날 때까지 아무것도 고치지 못했다.
세상도, 자신의 운명도, 그녀의 무공도.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남궁천의 뺨에 한 가닥 눈물이 흐른다.
그리움에서 빠져 나온 남궁천이 다시 혈맥을 따라 흐르는 공력에 정신을 집중했다.
일주천을 마친 공력은 이제 더욱 힘 있게 달려간다.
전신의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것만 같다.
이는 천뢰의 기운이 깨어나는 감각이다.
천뢰제왕신공을 대성하게 되면 강기를 운용할 수 있는 천뢰기(天雷氣)가 만들어진다.
물론 지금은 내공이 부족한 만큼 실현하기엔 어려운 단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삼주천을 끝낸 공력이 다시 사주천에 들어갔다.
조금이나마 천뢰의 기운을 품게 되면서 모든 감각이 칼날처럼 예민해지고, 남궁천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사뿐히 떠올라 넘실거린다.
그렇게 마지막 대주천을 끝낸 남궁천이 두 눈을 부릅뜨자, 여섯 방위에 서 있던 귀왕과 귀소이들이 날카롭게 외쳤다.
“준비 완료!”
“와라!”
파바바밧!
순간 남궁천이 허공으로 치솟자, 귀왕과 귀소이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날렸다.
쉬쉬쉬이잇-
파라라라라!
남궁천이 돌개바람처럼 몸을 회전하면서 검을 빠르게 내질렀다.
검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가면서 쇄도해오는 무언가를 섬세하게 베어간다.
쉭! 쉬쉬쉬쉭.
남궁천은 그야말로 하늘에 일렁이는 바람 같았고, 유유히 떠도는 구름 같았으며, 번쩍이는 낙뢰 같기도 했다.
“와…….”
“쥑이네요…….”
귀왕과 귀소이들이 넋을 놓고 남궁천을 보았다.
마침내 남궁천을 향해 쇄도했던 것들이 세밀한 검기에 썰려 사방으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촤아앗! 철컥.
마지막으로 뭔가를 베어낸 남궁천이 그대로 벽라검을 검집에 갈무리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투둥.
마지막 검식에 썰린 건 생닭.
곱게 썰린 생닭이 냄비에 담기면서 화려한 검무의 끝을 알렸다.
넋을 놓고 있던 귀왕과 귀소이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짝짝짝짝…….
귀왕이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주변 접시와 냄비에 담긴 식재료들을 보았다.
“주군, 완벽합니다! 모든 식재료에 검기까지 입혀서 신선도가 확실히 유지되고 있습니다요! 이러면 맛도 일품이 되지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오이와 양파, 대파가 아주 균일하게 잘렸습니다요!”
귀소이들도 저마다 접시와 냄비를 들고 와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쏟아냈다.
이들이 남궁천에게 일제히 던진 건 바로 닭 요리에 사용될 식재료.
남궁천이 진중한 표정으로 식재료를 훑어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주접떨지 말고 가져가라. 아직 멀었다.”
“주접이라니요? 정말 대단하신……!”
“그만. 애써 손질한 재료에 침 튄다. 가져가기나 해.”
“복명!”
귀왕과 귀소이들이 일제히 대답하고는 식재료를 들고 물러났다.
남궁천이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생강의 두께가 조금씩 달랐어.’
즉, 검술이 완벽하지 못했다는 뜻.
창궁대연검법과 창궁무애검법을 혼용했는데 완벽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남궁선이 펼친 것과 똑같다.
벌써 수십 번 펼쳤으니 오의도 깨우친 상태.
하나 검법 자체에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두 검법이 힘은 강하나 정교함이 떨어진다.
이걸 고치기 위해서는 역시 천뢰제왕신공의 단점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단 말이지.
이런 경우 둘 중 하나다.
처음부터 검법이 한쪽으로 편중되어 단점을 가지고 있었거나, 유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질되었거나.
보통은 후자의 경우가 많다.
물론 남궁천의 이런 고민을 누군가 알았다면 입을 딱 벌리고 말을 잇지 못할 것이다.
남궁세가의 대표적인 두 검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고서도 부족하다니.
세상에 이런 사치가 또 있을까.
‘뭐, 오늘은 이 정도 해둘까?’
모처럼 남궁세가의 심공과 검법까지 연마하니 몸이 부쩍 가벼워진 것 같다.
물론 수련을 오늘로 끝낼 생각은 없다.
앞으로 계속해서 연마하면서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나갈 생각이다.
뭔가를 고쳐서 발전시키는 것은 초견파공안의 영향력 밖이니까 노력이 필요하다.
가진 재능이 있음에도 그 이상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 자, 그게 바로 나다.
보람찬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마침 후원으로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남궁천!”
우렁찬 목소리를 터뜨린 사람은 다름 아닌 팽수혁.
그가 빤히 쏘아보더니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비무를 청한다.”
“내일하면 안 될까?”
“도망치는 거냐?”
“그건 아니고. 도망치는 건 지긋지긋하다.”
“그럼 따라 나와.”
하아, 왜 이렇게 따라 나오라는 인간들이 많은 거지.
그냥 여기서 해도 되지 않나.
아, 나름 밥집 후원이라고 배려하는 건가.
팽수혁은 남궁천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어서 모퉁이를 돌아갔다.
웃기는 놈일세.
저렇게 가면 내가 정말 따라 나갈 거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안 간다.
숙소로 가서 잠이나 잘 생각이다.
일단 나는 누군가 시킨 대로 하는 성질이 못 된다.
애초에 반골 기질이 강하다 보니 명령처럼 들리는 말을 들으면 무조건 반대로 행동한다.
이걸로 남궁선하고도 많이 싸웠지.
어쨌거나 나는 따라 나갈 생각이 없다.
감히 누굴 보고 오라 가라야.
남궁천이 반대쪽 모퉁이로 걸음을 옮기는데, 마침 반장 뒷문이 열리면서 귀왕이 커다란 솥을 들고 낑낑거리며 나왔다.
“어? 주군, 어딜 가십니까요?”
“왜? 뭔데?”
남궁천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귀왕이 솥을 내려두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저 하셔야지요?”
“뭘?”
“이거…… 안 하세요?”
남궁천이 미간을 좁히고는 솥을 보자 갖가지 식재료가 가득 담겨 있었다.
남궁천이 살기 서린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너 지금 나한테 일시키는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수련을 하시는 김에 아까처럼 도와주신다면 품질이 올라가서 장사도 잘될 것 같고…… 하하하……!”
“아무래도 그 솥에 고기가 좀 부족한 것 같네. 마침 늙은 돼지가 눈앞에 있으니 재료 좀 채울까?”
스르르릉.
남궁천이 스산한 얼굴로 벽라검을 뽑아 들자, 귀왕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하하핫! 제, 제가 다듬겠습니다! 무공 수련도 할 겸! 살펴 가십시오!”
귀왕이 솥을 들더니 후다닥 반장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마침 솥을 지고 나오려던 귀소이들과 부딪치면서 우당탕 넘어지고 난리도 아니다.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저것들, 진짜 죽일까.
아서라. 이러다 정말 대살성 될라.
* * *
‘이 새끼 왜 안 나와!’
기다리다 못한 팽수혁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반장 모퉁이를 돌아갔다.
“뭐 하고 자빠졌기에 안 나타나는……!”
팽수혁이 소리치다 말고 입을 다물고는 눈을 끔뻑였다.
후원에 모인 귀왕과 귀소이들이 양손에 칼을 꺼내 쥐고는 흉흉한 기운을 풀풀 휘날리는 게 아닌가.
양손에 칼을 쥔 귀왕이 어딘지 서늘한 음성을 흘렸다.
“음? 고기 다듬는 거 도와주시려고?”
“아, 아니오!”
얼른 대답을 마친 팽수혁이 재빨리 모퉁이를 돌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