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이걸 죽여?
“그, 그만…… 내가 잘못…… 크어억!”
퍽! 퍽! 퍼억.
어김없이 쏟아지는 매질에 조강민이 말을 마저 잇지도 못하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결국 그가 눈을 허옇게 까뒤집더니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보다 못한 곽철주가 이를 빠득 갈고는 소리쳤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요? 소가주께서 사과를 하려는데 왜 듣지도 않고……!”
“아, 그랬어? 난 못 들었지. 미안.”
“이익……!”
“에이, 이렇게 되기 전에 진작 사과했으면 좋았을걸. 어쩔까? 다시 깨울까?”
벌써 깨우고 기절시키기를 세 번째.
사실 못 들은 게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남궁천은 조강민이 사과를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전생에 도망자로 살 때는 싸움의 결과가 언제나 셋 중 하나였다.
가장 흔한 경우가 모조리 죽이는 거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찾아온 자들을 남김없이 처리하는 것. 후환 걱정이 없으니 가장 깔끔하다.
뭐, 간혹 살려두는 경우도 있었다.
괜히 기분이 좋은 날, 어울리지 않게 측은지심이 생긴 날, 그도 아니면 남궁선처럼 맘에 쏙 드는 상대였다든지.
흐음, 정정해야겠다.
남궁선의 경우는 내가 살려준 게 아니라, 그녀가 날 살려준 거고.
내가 이렇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어쨌든.
싸움의 결과가 뜻밖에도 인연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바로 적을 수하로 거둬들일 때다.
대체로 흑도 놈들이었지만.
아무튼 그때 내가 한 행동이 지금과 같다.
사과를 요구한 다음 입만 열려고 하면 두드려 패는 거다.
조강민은 벌써 수차례 사과를 하려고 했으나 나는 듣지 않았다.
입만 벙긋하면 두드려 팼으니까.
한마디로 너무 사과하고 싶은데 처 맞느라 사과를 못하는 상황.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겠지.
이러면 어떤 현상이 생기느냐.
앞으로 나만 보면 뭔가 잘못한 사람 마냥 주눅이 들고 용서를 구하려는 자세가 된다.
나만의 세뇌 방식이랄까.
죄인이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게 만드는.
내가 이렇게 사람을 잘 계도한다.
그러고 보면 나도 종교 하나 만들어서 교주 노릇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어디 보자.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인지 곽철주와 송원교, 백리향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다.
함께 온 생도들만이 반장 안에서 국수를 맛있게 처먹고 있다.
문득 이 상황이 웃겨서 남궁천은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어느새 주위로는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는데, 대체로 용천관 생도들이나 인근 주민들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생도 하나를 두드려 패고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남궁천.
그 와중에도 반장 안에서는 그릇에 코를 박고 국수를 먹는 생도들.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광경에 사람들이 술렁거린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유견식기간이라서 생도들 사이에 싸움이 난 모양인데?”
“야, 저 녀석! 용천관 공식 호구 아니었어?”
“이건 좀 심하네. 완전 피투성이야.”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윤종승과 팽수혁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인파에 가로막혀 멈춰 선 윤종승이 이맛살을 구겼다.
“아무래도…… 남궁천이 심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데?”
“칫! 남궁천……! 그놈은 나한테 처 맞아야 하는 건데!”
팽수혁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인파를 헤치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남궁천을 짓밟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할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자식.
이제야 좀 밟아줄 가치가 생겼다고 여겼는데, 조강민이 패거리를 끌고 와서 다 망쳐놓다니.
마치 뜯어 먹어야 할 고기를 남에게 빼앗긴 기분이랄까.
‘남궁천! 너는 나한테 처발렸어야 했다! 이런 곳에 널브러져 있으면 안……!’
인파를 뚫고 맨 앞으로 나간 팽수혁이 순간 우뚝 멈췄다.
그 바람에 뒤를 바짝 쫓던 윤종승이 등에 코를 박았다.
“큭, 왜, 왜 그래? 남궁천은 어떻게……!”
윤종승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딱 벌렸다.
맙소사, 이게 다 뭔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을 줄 알았던 남궁천은 미친놈처럼 웃고 있고, 조강민은 완전히 떡실신이 되어 널브러져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엇! 팽수혁, 어디 가?”
윤종승의 말은 듣지도 않은 채 팽수혁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입매가 길게 찢어졌다.
‘남궁천!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더욱 짓밟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넌 내가 확실히 밟아……!’
큰 보폭으로 걸어가던 팽수혁이 순간 돌처럼 굳었다.
‘뭐, 뭐냐? 이건……!’
모종의 기운이 전신을 사슬처럼 옭아맨다.
‘살기……?’
팽수혁이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한데 느낌이 묘하다.
딱히 자신을 향한 살기 같진 않다.
그저 주변에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진 죽음의 기운 같다.
마치 남궁천이 시산혈해가 된 언덕 위에 우뚝 올라선 것만 같달까.
그 스산한 기운 때문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끼친다.
‘저 녀석……!’
남궁천을 둘러싸고 있는 모종의 기운이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말라.
경고를 무시하고 다가오는 자,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 중 한 구가 되리라.
“이익……!”
팽수혁이 그 불쾌한 기운에 맞서 무거운 걸음을 겨우 옮기는 사이, 남궁천은 발끝으로 조강민을 툭 건드려 깨웠다.
“끄으으……!”
조강민이 신음을 흘리며 남궁천을 올려다보았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든 상황.
남궁천의 무정한 시선이 마치 염라의 눈길 같다.
“남궁 형…….”
두려움에 맞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번엔 사과할 수 있을까.
“미, 미안했소. 제발 그만…… 용서해주시오.”
마침내 말했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사과를 했다.
가만, 사과를 원했다고? 내가.
모르겠다. 아무렴 어떤가.
이제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조금이나마 생겼다.
곧 죽어버릴 것만 같은 고통에서 자존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다.
남궁천이 씨익 웃는다.
어딘지 사악해 보이는 미소에 조강민은 아스라이 절망감을 느꼈다.
“그래? 그럼 용서의 의미로 한 대만 더 맞자.”
남궁천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내가 전생에 지금처럼 용서를 한 적이 있던가.
거의 없다.
대부분 죽여 버렸으니까.
항상 느끼지만 용서란 늘 어려운 법이다.
도망자였던 내게 용서란, 결국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용서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거다.
그러니 타인에게 이제 그만 용서하라거나 잊으란 말 따위를 함부로 씨불이면 안 된다.
목숨을 걸 만큼 힘든 게 용서니까.
쉬이이이잇!
마침내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다.
찰나.
스팟!
한 줄기 미풍이 불어 닥치는가 싶더니 시커먼 그림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남궁천이 두 눈을 부릅뜨고는 얼른 손을 뒤집었다.
상대 역시 금나술을 펼치며 곧장 반격을 해온다.
어딜.
누굴까? 곽철주는 이만한 민첩성이 없다.
상대 얼굴을 확인하고 싶지만, 워낙 반응이 빨라서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파바밧.
순식간에 두세 차례 공방이 오간 후 공력을 실어 일장을 날렸다.
슈우우웃-
퍼어엉!
응축된 공기가 터지면서 남궁천이 그림자와 멀찍이 떨어졌다.
촤촤아아앗!
두 사람이 빗길에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비 젖은 땅에 기다란 발자국이 상흔처럼 남았다.
쏴아아아아.
다시 사방을 가득 채우는 빗줄기.
이제야 상대가 보인다.
‘비량……?’
남궁천이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어느새 비량의 옆구리에는 만신창이가 되어 널브러진 조강민이 들려 있었다.
곽철주와 송원교, 백리향도 그제야 비량을 확인하고는 맥이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았다.
비량이 휘파람을 분다.
“휘유. 요란하게도 했네.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떨까? 아무리 자유견식기간이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교관이 개입할 수밖에 없거든.”
“지나치지 않는 정도가 어디까집니까?”
남궁천이 묻자, 비량이 잠시 턱을 괴더니 말했다.
“딱 여기까지인 듯.”
“딱 한 대만 더 때릴게요.”
“안 돼.”
“그럼 반 대만.”
“좋…… 응? 반 대는 어떻게 때리는 거냐? 안 돼.”
“쳇, 안 통하네. 그나저나 어떻게 알고 온 겁니까?”
비량이 한쪽에 선 팽수혁과 윤종승을 가리켰다.
“저 두 녀석을 따라왔더니 이런 일이 벌어져 있더라고.”
남궁천이 힐끔 돌아보니 팽수혁이 눈을 부라리고 있다.
그래, 뭐 너는 네 할아버지가 내 손에 죽었으니 인정해 준다.
적어도 재미로 약자를 괴롭히는 것들보단 명분이 있잖아.
그나저나 비량이라.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확실히 강하다.
잠시 손을 섞었지만 엄청난 상대다.
저 정도면 무림맹에서도 적수가 거의 없겠는데.
아마 전력을 다 보이지 않았을 테니 어쩌면 무림맹에서도 한 손에 꼽힐 실력일지도.
그래도 맹주보단 약하겠지.
……아니다. 속단은 금물이다.
거북이도 경공을 익혀 토끼를 이기는 곳이 바로 무림이다.
어떤 변수가 일어나더라도 놀랄 수 없는 곳.
그게 바로 강호다.
‘이걸로 하나는 확실하군.’
좀 더 강해져야 한다는 것.
단지 내공을 쌓아올리는 수준이 아니라, 나만의 무공이 필요하다.
도망자로 살던 전생에도 뼈저리게 느끼던 것이다.
초견파공안이 대단한 재능이긴 하지만 만능은 아니라는 것.
한 분야를 평생 갈고닦은 절대고수를 만나면 초견파공안도 그 벽을 넘기 어렵다는 것.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우선 천하제일룡이었던 남궁선을 생각해서라도 남궁세가의 무공을 바탕으로 두는 게 좋으리라.
뭐, 익숙하기도 하고.
게다가 남궁천으로 살고 있으니 이보다 좋은 조건도 없을 터.
평생 쫓기느라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전생과 다르다.
잠시 상념에 빠진 남궁천의 귀에 비량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이만하면 승부는 난 것 같으니 부상자는 내가 데려가마. 불만 없지?”
“뭐, 그러시죠.”
딱히 반대할 수도 없는 상황.
비량이 조강민을 들고는 걸음을 옮기다가 팽수혁을 힐끔 보았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남궁천에게 하는 말인지, 팽수혁에게 하는 말인지 모호하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에게 하는 말일지도.
팽수혁이 어금니만 까득 씹어버리자, 비량이 싱긋 웃어 보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팽수혁이 남궁천을 빤히 쏘아보았다.
“남궁천. 조만간 나하고도 즐겨보자고.”
“그러자고.”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코웃음을 친 팽수혁이 걸음을 옮겼다.
하여튼 이놈의 인기란.
전생이나 지금이나 사람 끌고 다닐 운명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상황이 대충 정리되자 반장에서 귀왕이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괜찮으십니까요?”
“괜찮아. 그쪽은?”
“아, 저희도 덕분에 개업하자마자 대목입니다요! 흐흐흐. 다들 국수에 환장하던데요?”
“그거 잘됐네.”
“그리고 주군이 궁금해하신 사실 하나를 또 알아냈습니다.”
“호오, 그게 뭐야?”
비량에 관한 것인가.
남궁천이 눈빛을 반짝이며 묻자 귀왕이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비 오는 날에는 확실히 먼지가 나지 않습니다. 물방울만 튈 뿐이지요. 그게 안개처럼 흩어지면 먼지처럼 보이긴 합니다만.”
“…….”
“……?”
따악.
“큭! 왜, 왜……?”
“참 대단한 걸 알아냈어. 아주 칭찬해.”
“흐흐, 역시 그렇죠? 제가 이렇게 관찰력도 좋습니다.”
남궁천이 헤실헤실 웃는 귀왕을 빤히 보았다.
하아, 이걸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