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뭘 드시겠습니까?
명분에 죽고 사는 정도인들.
그러니 반장에 와서 음식도 시키지 않은 채 쌈박질을 하느라 영업에 피해를 준다면 생도들도 할 말이 없다.
명분은 오롯이 귀왕반장의 몫이 될 테니까.
게다가 당장에라도 찍어 누를 것만 같은 이 엄청난 투기!
평범한 숙수와 점소이들이 아니다.
무공을 익힌 자들임에 틀림없다.
뭐, 금분세수하고 장사나 하는 강호인들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이상할 것은 없다.
문제는 강호인들의 금분세수 따위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정사를 막론하고 다신 칼을 들지 않겠다는 다짐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게 바로 무인이니까.
한마디로 이 은퇴한 것으로 보이는 숙수와 점소이들이 작정하고 나서면 감당이 안 될 것 같다.
스르르릉.
귀왕이 식칼 두 개를 서로 비비자 매끄러운 쇳소리와 함께 불꽃이 일어났다.
그의 뺨에 새겨진 검상이 신이 난 것처럼 흔들린다.
“손님들? 뭘 드시겠습니까요?”
“끄음…….”
생도들이 침음을 흘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당장 밖에서는 조강민이 얻어맞고 있는 중인데도 손을 쓸 도리가 없다.
쾅!
순간 귀소이 하나가 진각(震脚)을 밟더니 버럭 소리쳤다.
“비가 와서 그런지 잘 안 들립니다요! 손님들! 뭘 드시겠습니까요!”
사자후 같은 외침이 쩌렁쩌렁 울리자, 한쪽 구석에 앉은 생도가 딸꾹질을 한다.
“히끅! 저, 저어…… 국수…… 한 그릇만.”
“나, 나는…… 수육 한 접시…….”
“아…… 만두로 할까나…….”
콰앙!
이번에는 귀왕이 진각으로 발을 굴리더니 귀소이들을 둘러보며 쩌렁쩌렁 소리쳤다.
“이런 썅! 이것 봐라! 내가 이럴 거라고 했지? 아무리 이제 막 개업해서 재료가 다 갖춰지지 않았어도 손님들은 우리 사정 따위는 개똥만큼도 생각지 않을 거라고! 이렇게 온갖 음식을 다 시킬 거라고! 요리하는 새끼는 거들떠도 안 볼 거라고 내가 말 했냐? 안 했냐?”
“했습니다.”
귀소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곁눈질로 생도들을 노려본다.
생도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헉, 지금 째, 째려보는 건가?’
‘왜, 왜? 개업하면 오히려 더 많은 재료를 준비하는 것 아니었어?’
귀왕이 다시 사자후로 외쳤다.
내공이 약한 몇몇 생도들은 고막에서 피가 찔끔 흐를 지경이었다.
“에라이! 밥버러지들아! 이렇게 음식을 골고루 시켜대는데 왜 재료 준비를 안 해서 요리도 못 하게 만들어! 어엉? 이 불상사를 어떻게 책임 질 거냐!”
스르릉! 스르릉!
귀왕이 연신 식칼을 비벼대며 수하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고기가 부족하니 네놈들을 토막 내서 요리해 줄까? 어엉? 어디 보자! 네놈은 살결이 야들야들하니 수육하기 딱 좋겠군! 너는 근육과 기름이 적당하니 만두 속으로 채우면 딱이겠구나!”
귀왕의 살벌한 호통에 생도들은 점점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기분 탓인지 저 호통이 마냥 점소이를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노리는 것만 같다.
결국 생도 중 하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저어…… 주, 주인장.”
“이런 빌어 처먹을! 이 중요한 순간에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감히 날 불러대고 지랄…… 아…… 손님, 헤헤. 저 부르셨습니까요?”
그야말로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던 귀왕의 얼굴이 활짝 웃음을 머금었다.
생도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이, 이렇게 웃는 게 더 무서워!’
“손니임? 불렀으면 말씀을 하시지요오?”
“아…… 그, 그게…… 우리는 음식을 국수로 통일하겠소.”
“아니잇! 그게 정말이십니까앗!”
“그, 그렇소.”
“이런 감사할 데가! 사정을 헤아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국수를 인원수에 맞춰 요리해 오겠습니다!”
“그, 그러시오. 다들 괜찮지?”
생도의 물음에 다른 생도들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인다.
귀왕이 다시 귀소이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얼빠진 것들아! 너희들은 오늘 손님 덕에 토막 날 신세 면한 줄 알아라! 저분들은 기본적인 예의를 안다! 지금부턴 국수가 나와서 다 드실 때까지 단 한 걸음도 떼지 않으실 거다! 그게 요리하는 자에 대한 예의라는 걸 잘 아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지켜보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즉각 갖다 바치도록!”
“복명!”
귀소이들이 일제히 출입구로 달려가서 뒷짐을 진 채 섰다.
‘뭐, 뭐야? 출입구는 왜 막는 건데?’
‘끄응, 수발드는 게 아니라 감시하는 것 같은데.’
‘왜 대답이 복명이냐고…….’
생도들은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이지도 못했다.
* * *
“끄아아아아!”
곽철주가 제 분을 못 이겨 괴성을 지를 때, 남궁천은 재빨리 손을 놀려 조강민의 마혈을 점했다.
탁탁.
그러자 조강민의 몸이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축 늘어졌다.
남궁천이 조강민의 목덜미를 쥔 채 곽철주를 보고 툭 던지듯 말했다.
“어이, 충견. 조용히 좀 해. 시끄럽잖아. 밥집 앞에서 그렇게 고성방가하면 영업에 방해되잖아. 아, 방가는 아닌가?”
“노오오옴!”
곽철주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더니 남궁천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왔다.
파밧!
저 봐라.
상황 파악 못하고 저리 달려드는 건 이미 정신이 헤까닥 돌았다는 뜻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주인의 안위도 생각지 않고 저리 들소처럼 미쳐 날뛰겠나?
뭐, 그렇다면 상황 파악이 되도록 만들어줄 수밖에.
남궁천이 순간 조강민을 눈앞에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빠아악!
“커억!”
얼굴을 얻어맞은 조강민이 제 자리에서 팽이처럼 휘돌면서 쓰러졌다.
달려오던 곽철주가 그 자리에 바위처럼 굳어버리더니 소리쳤다.
“소가주!”
“워, 워어. 옳지. 이제 좀 정신이 돌아와? 그래, 얌전히 굴지 않으면 네 주인이 힘들어져. 지금처럼!”
쉬이잇, 퍽!
“크아악!”
“안 돼!”
조강민의 비명과 곽철주의 절박한 외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남궁천이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벽라검을 검집채로 휘둘렀다.
“안 되긴, 개뿔.”
퍽! 퍽! 퍽……!
“크억! 아악! 으악……!”
“그만! 멈춰라! 나도 멈췄다!”
“후우. 이제야 좀 말 잘 듣는 강아지가 됐군. 그렇지? 동생아?”
“끄으으……!”
졸지에 일방적인 구타를 맞은 조강민은 제대로 대답도 할 수 없을 지경.
그럴 수밖에.
검집에 내공을 실어서 후려쳤으니 지금쯤 뼈마디가 조각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곽철주가 뺨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원하는 건?”
남궁천이 검집을 어깨에 척 걸치고 턱을 치켜들었다.
“꿇어.”
쿠웅! 털썩, 털썩!
곽철주뿐만 아니라 송원교와 백리향도 절로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곽철주가 소리쳤다.
“꿇었다!”
“그래, 하니까 되잖아. 너도 얌전해질 수 있는 개였잖아.”
“소가주는 그만!”
“싫은데?”
퍼억! 퍼억! 퍽!
다시 휘둘러지는 검집.
거침없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
“노오오옴!”
격분한 곽철주가 바닥을 차며 내달렸다.
하나 그 순간 남궁천의 입에서 소름 끼치도록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는다.”
촤아아악!
곽철주의 발이 미끄러지며 가까스로 제동을 걸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전신을 음습해온 지독한 살기!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소가주를 향한 것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다.
분명한 건 그 살기에 몸이 본능적으로 굳었다는 것.
곽철주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비에 젖어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남궁천의 안광이 형형한 빛을 뿜고 있다.
지독하리만치 무감한 시선이 전신을 얼어붙게 만든다.
‘무슨 열여덟 살짜리 눈빛이……!’
저 시선이 시린 것인가?
쏟아지는 빗줄기가 시린 것인가?
뼈마디로 오한이 스며든다.
남궁천의 입에서 다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눈깔에 힘 안 풀어?”
쉬익, 퍽!
“끄아악!”
“……!”
가차 없이 휘두른 검집에 어김없이 치솟는 처절한 비명!
곽철주의 눈자위가 파르르 떨린다.
“눈깔아.”
쉬익, 퍽!
“크흐억!”
“……!”
다시 한번 조강민의 비명이 터지고 곽철주의 눈꺼풀이 사정없이 떨린다.
가슴속에서 소리친다.
여기서 시선을 회피하면 이자를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그걸로 모든 게 끝이라고.
하지만 동시에 이성이 경고한다.
끝까지 버티면 소가주가 위험하다고!
고뇌가 깊어지니 사방이 적막해진다.
눈꺼풀에 빗방울이 맺힌다.
이내 빗방울이 뚝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시선도 아래로 향한다.
쏴아아아아…….
적막한 주변에 빗소리만 가득하다.
남궁천의 입매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바로 이거다.
맹수가 온순해지는 시간.
내가 가장 즐기는 순간이기도 하다.
털썩!
마침내 곽철주가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소가주를…… 풀어주시오.”
“싫은데?”
쉬이익, 퍼억!
“크익! 도대체!”
곽철주가 다시 일어서려다가 멈칫한다.
여전히 남궁천을 에워싼 모종의 기운이 섣불리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다.
지금 남궁천은 온몸으로 경고하는 거다.
멋대로 움직이면 주인이 다친다고.
남궁천이 비실비실 신음을 흘리는 조강민의 얼굴을 발끝으로 툭툭 찼다.
“얘도 말 할 줄은 알아. 주둥이는 살려 뒀거든.”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조강민이 피를 머금은 입으로 말을 뱉어낸다.
“죽, 죽여…… 버린다……! 이 개새……!”
“오, 역시 동생은 저기 충견보다 낫네. 신념이 있어. 개보다 못하다는 말은 취소. 그 신념 온 힘을 다해 칭찬해.”
쉬익, 퍽! 퍽! 퍼억!
“크억! 끄아아악! 아악! 살, 살려…… 크아아악!”
주인의 처절한 울부짖음에도 곽철주는 주먹만 꽉 말아 쥘 뿐 꿈쩍도 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불현듯 함께 온 생도들이 떠올랐다.
‘아니, 근데 이 개새끼들은 도대체 뭘 하느라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려 반장을 쳐다보니,
후루룩, 후루룩……! 쩝쩝……!
생도들이 국수를 맛있게 처먹고 있었다.
* * *
콰자앙!
발길질로 문을 걷어찬 팽수혁이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와서는 윤종승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었다.
“커억, 컥! 왜, 왜 그래……? 컥!”
“애들 어디 갔냐?”
“애들이라니……? 컥, 이것 좀 놓고……!”
팽수혁이 휙 집어 던지자 바닥에 나동그라진 윤종승이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팽수혁이 눈을 부라렸다.
“남궁천, 송원교, 백리향. 다 어디 갔냐? 조강민을 포함한 삼년생도 대부분 안 보인다.”
“아…….”
윤종승이 잠시 생각하느라 침음을 흘렸다.
팽수혁이 성큼성큼 다가서는데, 윤종승이 굳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어딘지 알 것 같아.”
두 사람이 방을 나서자, 복도 모퉁이 너머에 서 있던 한 그림자가 가만히 뒤를 따랐다.